소설리스트

단태신곡-123화 (123/293)

<-- 123 회: 3-42 -->

‘나는 인간이야. 용이 아니라. 인간으로 태어났어. 그러니까 나는 인간이야.’

오랫동안 자신을 괴롭힌 의문에 대한 답을 찾아냈지만 단태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한동안 잊었던 공포에 호흡이 거칠어졌다. 공기가 드나드는 그 소리가 싫었지만 몸은 더 많은 공기를 필요로 했다.

단태는 본질적인 진실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착각하고 있었다. 선택의 여지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강제로 용의 상속자가 된 순간, 서서히 이 과정이 진행되었다. 인간에게서 멀어지고, 용에 가까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유천주에게 잡히지 않았어도 이 과정은 계속 진행되었을 것이다. 유천주는 그 변화를 앞당겼을 뿐이다.

용의 유산은 오로지 용만 받을 수 있다.

인간의 유산을 인간이 받는 것처럼.

왜 몰랐을까?

강해지려는 욕구가 진실을 보지 못하게 막았을까?

위대한 존재가 되고픈 욕망이 눈을 가렸을까?

진실을 알았다고 해서 문제가 사라지진 않는다. 몸의 변화는 계속될 것이다. 그와 더불어 마음의 변화도 진행될 것이다. 설고와의 대화가 그 변화의 속도를 늦춘다고 해도 결국 용의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다. 용족처럼 생각하고, 용족처럼 행동할 것이다.

이 변화를 이겨낼 수 있을까? 힘들 것이다. 엄마의 배 속에서 버텨도 결국 밖으로 밀려나온 것처럼. 몸은 이미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마음만 용족의 사고방식으로 젖어든다면 고룡 암탄주의 의도대로, 수룡 유천주의 뜻대로 단태는 위대한 존재로, 용족의 일원으로 인정받을 터였다. 가족을 향한 애정을 잃는 대신, 강대한 힘과 깊은 지혜를 갖춘 위대한 존재로서 살아갈 것이다.

두 번째 탄생.

단태에서 료마주로의 변화.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떤 인간에게도 주어지지 않았던 기회가 찾아왔다. 비루한 인간의 운명에서 벗어나 위대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움켜쥐려면 대가를 치러야 한다. 인간으로서의 삶을 버려야 용으로서의 삶이 시작된다. 더러운 과거를 발로 걷어차야 찬란한 미래로 옮겨갈 수 있다. 질끈 눈 한 번 감으면 그만이다. 그만큼 엄마와 설희를 찾으려고 애를 쓰면 충분하지 않을까? 누구라도 그 노력을 깎아내리지는 못할 것이다. 엄마도, 설희도 이해할 것이다.

그래, 가보자.

새로운 세상으로.

하나의 세계에서 벗어나 다른 세계로 옮겨가려는 순간, 단태는 멈추었다. 갑자기 하나의 질문이 떠올랐기 때문에.

‘고룡 암탄주는 왜 내게 용의 유산을 물려 주었을까?’

단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분명히 암탄주 앞에서 말했었다. 용족의 부활에 대한 약속은 할 수 없다고. 비록 속내는 달라도 서약을 한 누천파, 반우현을 제쳐놓고 왜 끝까지 맹세를 거부한 사람에게 용의 유산을 물려 주었을까? 솔직해서? 솔직함이 용족의 운명을 바꿀 수는 없다.

암탄주는 왜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하필 물의 도시와 관련이 깊은 세 사람을 선택했을까? 특별해서? 누천파, 반우현 둘 다 똑똑하고 어릴 때부터 교육을 잘 받아 세련된 매력을 지닌 사람이긴 해도 용의 유산을 노리고 모여든 사람들을 밟고 올라갈 만큼 탁월한 사람이라고 보긴 어렵다. 앉아서 당한 누천파, 반우현보다는 당시 기습적으로 공격해서 성공 직전에 이르렀던 염종화탑의 하쿠가 더 적격이었을 텐데.

수탄왕령에게서 진정한 용의 상속자라는 이야기를 들은 이후, 단태는 은연중에 암탄주가 선택한 사람이라는 사실로 인하여 자부심을 가졌다. 암탄주가 누천파, 반우현을 제쳐놓을 만큼 자신에게 무언가 특별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암탄주의 선택에는 문제가 있었다. 암탄주는 자기가 선택한 인간, 용족의 유산 전체를 물려준 인간이 기껏해야 몇 년 밖에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풍혈지체를 알았다면 용족의 운명을 그런 체질의 소유자에게 맡길 리는 없었으리라. 아무리 위대한 용이라고 해도 인간의 체질까지는 알아낼 수 없었을까? 아니면 알아낼 필요가 없었을까?

용옥을 통하여 용족 특유의 사고방식에 익숙한 단태는 후자라고 확신했다.

호흡을 가다듬어 마음을 가라앉힌 단태는 암탄주의 입장에서 생각했다. 지금 이 순간, 단태는 그 어떤 인간보다 용족을 잘 알고 있었다. 단태보다 용족의 방식에 익숙한 인간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마지막 남은 용으로서 인간 하나를 택한다면 누구에게 용의 유산을 맡길까? 즉시 륜사의 얼굴이 떠올랐다. 뒤이어 명국영이 생각났다. 유언을 듣기 위해 모인 사람들 중에는 륜사, 명국영처럼 마법과 학문에 익숙한 사람들이 많았다. 거기에는 일곱 명의 천마 중 한 사람인 황명거사 석장명도 있었다.

왜 그들이 아니었을까?

왜 힘없는 종자를 택했을까?

“아…….”

단태는 진실을 직감했다.

암탄주는 겨우 열여섯 살에 불과한 소년에게 용족 전체의 운명을 맡길 생각이 없었다. 처음부터. 그게 아니라면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몇 년 후에는 죽을 수밖에 없는 체질의 소유자에게 유산을 덜컥 넘길 리가 없다.

그러면 암탄주의 의도는 무엇일까?

왜 그런 거짓말을 했을까?

등골이 오싹했다.

왠지 암탄주의 의도가 선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단태는 기억력을 동원하여 과거로 돌아갔다.

천마룡의 등에서 내려다본 용혈이 한눈에 들어왔다. 거대한 바위산 앞에 수백 개의 천막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그 사이로 개미처럼 작은 사람들이 부지런히 오가고 있었다. 활력이 느껴졌다. 반면에 시꺼먼 동굴 입구에는 기이한 정막이 흘렀다. 파멸의 끝에 다다른 종족과 힘이 넘쳐 주체할 수 없는 종족 사이의 기묘한 대비가 얄미울 정도로 확연했다.

당시 사람들이 거기 모인 이유는 단 하나 암탄주가 남길 유산 때문이었다. 용족의 소멸에는 관심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기뻐했다. 인간에게 용은 두려움의 존재였던 바, 용족이 사라지면 인간이 세상의 주인이 되는 것은 지당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실제로 그런 대화를 나누며 걸어가는 사람들이 거기 있었다.

‘암탄주는 그 바위굴 안에서도 사람들의 대화를 들을 수 있었어. 지금의 내게도 그런 능력은 있으니까. 얼마나 화가 났을까? 장례식에 와서 슬퍼하기는커녕 즐겁게 떠들면서 먹을 것만 밝히는 꼴인데. 내가 암탄주라면 그냥 죽더라도 절대 거기 모인 인간에게는 유산을 남기지 않았을 거야. 특히 나 같은 아이에게는. 내가 암탄주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그냥 죽었을까? 아니, 그럴 생각이었다면 유언 이야기로 사람들을 끌어 모으지 않았을 거야.

암탄주에게는 계획이 있었어. 그 계획이 뭘까? 암탄주에겐 중요한 계획이었어. 한데, 왜 나 같은 사람에게 유산을 남겼을까? 누천파, 반우현이라면 그래도 좀 납득할 수 있지만.

암탄주가 어떤 용인지 나는 잘 몰라. 그 때문에 암탄주의 의도를 파악하기도 어려워. 이렇게 생각해 보자. 유천주가 거기 있었다면, 마지막 용으로서 유언을 남기기 위해 인간을 모았다면, 유천주는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을까?’

자존심 강한 유천주는 절대 그런 상황을, 마지막 용이 남길 유산을 노리고 몰려든 사람들이 용혈 앞에 진을 치는 그런 광경을 참아내지 못할 것이다. 힘이 남아 있다면 천막을 깡그리 날려버리고, 사람들까지 모조리 죽였을 것이다.

암탄주는 왜 그러지 않았을까? 죽어가느라 자존심까지 쪼그라들었을까? 아니다. 직접 대면한 단태는 암탄주가 마지막 순간까지 위대한 존재로서 위엄을 지켰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답이 나왔다.

몸이 떨렸다.

과거에서 빠져나온 단태는 절벽 끝에 서서 까마득히 깊은 바닥을 내려다볼 때처럼 현기증을 느꼈다. 암탄주는 용족의 부활에 관심이 없었다. 아니, 그 자존심 강한 용이 인간에게서 희망을 봤을 리는 없다. 용족 전체가 달려들어도 해결 못한 문제를 인간이 해결할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면, 그건 이미 용이 아니다. 단태는 용옥을 통하여 그 어떤 인간보다 용족의 사고방식을 잘 알고 있었다.

암탄주는 유산을 남겼다.

인간을 파멸로 이끄는 유산이었다.

용족의 부활이 아니라, 인간을 절벽 끝으로 몰아 가는 유산이리라.

저항해야 한다.

맞서야 한다.

몸이 변해도 마음만은, 정신만은 인간으로 남아야 한다.

‘왜 그래야 하지?’

단태는 잠시 그 질문을 생각했고, 곧 답을 찾아냈다.

‘나는 단태니까. 료마주가 아니라.’

그때, 단태는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깨달았다.

‘그래, 나는 나 자신이고 싶어. 다른 누구가 아니라. 난 내가 되고 싶다. 진짜 내가. 완전한 내가. 난 용족의 몸을 거부할 거야.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야 해. 나를 잃고 싶지 않으니까. 용족의 유산 전체를 포기해서라도, 차라리 죽더라도 나 자신을 잃진 않을 거야.’

설고의 말이 옳았다. 진정한 근원은 내면에 있지, 바깥에 있지 않았다. 외부는 가짜가 도사리는 공간이었다.

혼란은 사라졌다.

피아가 명확해졌다.

단태는 내면에 집중했고, 그로 인해 바깥에 무엇이 있는지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만족감을 느낄 수 있었다. 구겨진 종이가 완전히 펴진 것처럼, 아니, 구겨진 흔적조차 없는 새 종이처럼 바뀐 것 같았다. 밀려드는 기쁨에 가슴이 따뜻해졌고, 더 나은 존재가 된 듯한 확신에 몸이 날아갈 것처럼 가벼웠다.

그 순간, 정수리가 열려 거기로 시원한 바람이 밀려들었다. 바람은 머릿속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아래로, 아래로 내려왔는데 심장을 에워쌌다가 다시 아래로 이동했다. 바람은 고민과 염려의 찌꺼기가 가라앉은 마음을 시원하게 녹인 후에 발바닥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갔다. 또 다른 바람, 이번에는 따뜻한 바람이 발바닥으로 들어와 몸을 돌아다니다가 정수리를 통해 몸을 벗어났다. 그런 식으로 바람은 정수리와 발바닥을 입구 삼아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바람의 통로가 된 단태는 몸을 살폈다. 이 현상도 용족에 가까워진 증거가 아닐까 두려웠다. 섬세한 공기의 흐름은 정수리를 통해 몸 안으로 들어온 후에는 마력의 형태로 바뀌었다. 몸 안에서 부는 바람은 마력의 흐름이었다. 이 바람 같은 마력은 심장에 저장되지 않고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마치 용의 심장을 무시하는 것처럼.

위엄을 갖춘 목소리가 머리 안쪽에서 울렸다.

-두 번째 시험마저 통과했구나, 인간.

수탄왕령이었다.

즉시 그 목소리를 기억해낸 단태는 주먹을 꽉 쥐었다. 수탄왕령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이 싫지만, 도리가 없었다.

“……시험이라니요?”

-넌 암탄주 면전에서 용족의 부활을 이루겠다는 약속을 거절했다. 그럴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그게 첫 번째 시험이었다. 그 시험을 통과했기 때문에 넌 상속자가 될 수 있었다.

“두 번째 시험은 무엇입니까?”

-인간이면서 용을 꿈꾸는 자가 치러야 할 대가와 관련된 시험이지.

“……만약 제가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용이 되기로 결정했다면 어떤 대가를 치렀을까요?”

단태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수탄왕령이 두렵지는 않았다. 그저 심기를 거슬러 답을 얻지 못할까 염려할 뿐이었다. 유천주라는 실질적인 공포의 존재를 마음의 힘으로 이겨낸 단태에게 수탄왕령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넌 용이 되었을 것이다. 다만, 불완전한 용이겠지. 과거와 현재를 구분하기 어렵게 만드는 그 기억력, 상상력 때문에. 그래서 넌 너 자신을 괴롭히는 과거를 지우겠지. 깨끗하게. 무슨 뜻일까? 맞아. 결국 넌 너를 아는 모든 인간을 없애버릴 것이다. 인간 뿐 아니라 장소까지 깡그리 없앨지도 모르지. 그래야 완전한 존재가 될 수 있으니까. 하나의 존재에 두 개의 기억은 공존할 수 없단다.

단태는 거칠게 숨을 쉬었다.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섰다. 이 지독한 함정에 발 하나를 넣은 상태였다. 아니, 몸의 절반이 들어갔다. 마지막 순간에 그 질문을 떠올리지 않았다면 암탄주의 뜻대로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당신은 암탄주가 무엇을 하려는지 압니까?”

-물론 알지.

“……그게 무엇입니까?”

단태는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며 물었다.

-인간족의 파멸.

“…….”

단태는 소매로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았다.

-넌 다행히 깊은 구덩이를 알아보고 피했지만, 누천파라는 녀석은 오히려 구더기가 득시글거리는 구덩이로 몸을 던졌다. 곧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겠지.

“그게 무슨 뜻입니까?”

단태는 용옥간이 울리도록 크게 물었다.

-유산을 상속할 자격을 갖춘 너에게 많은 것이 달려 있음을 잊지 마라. 행운을 빈다.

수탄왕령이 풍기던 그 무거운 분위기는 사라졌다.

맥이 빠졌다. 그렇다고 무기력한 상태는 아니었다. 급격한 몸의 변화가 암탄주가 만든 두 번째 시험이라는 사실은 상상도 못 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야망, 욕망을 건드리는 교묘한 함정에서 무사히 빠져나올 사람은 얼마나 될까?

문득 수탄왕령이 누천파에 대해 언급한 내용이 생각났다. 그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여전히 감각은 예리했다. 마력이 저장되는 심장도 마찬가지였다. 기억력은 물론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 용족이라는 유혹은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함정은 숨겨져 있을 동안만 위험하다. 일단 드러나면 함정의 위치를 확인하고 수다를 떨고 웃으면서 지나칠 수도 있다. 아니, 함정을 다른 용도로 변경할 수도 있다!

단태는 웃음을 터트렸다. 기분이 좋아서였다. 그 위대한 존재가 삶의 마지막 순간에 공들여 만든 함정을 피해 버린 셈이다. 스스로 그 함정에 기어들어갈 뻔했지만, 눈앞에 암탄주가 있는 것처럼 단태는 웃고 또 웃었다. 나약한 인간이 위대한 존재를 이겼다.

단순한 승리가 아니었다. 전리품까지 챙긴 완벽에 가까운 승리였다. 암탄주는 인간의 파멸을 노리고 함정을 파 놓았지만, 그 함정에 빠지기는커녕 살짝 피해 버린 단태에게는 암탄주가 선사한 용의 유산을 합법적으로 소유할 자격이 생긴 셈이었다.

발달된 감각은 물론 마력으로 넘실거리는 용의 심장까지.

‘암탄주가 살아 있다면 고맙다는 인사를 꼭 할 텐데.’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단태는 돌 항아리로 가서 기절한 금룡어 한 마리를 꺼냈다. 이전처럼 날것 그대로 먹으려던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오른손을 가슴 위쪽으로 들어 올렸다.

용옥에서 본 대로 손바닥에 마력을 집중하며 불을 떠올리는 순간, 심장에서 흘러나와 손바닥으로 모여든 마력이 불꽃으로 변하며 손바닥 위에 나타났다. 깜짝 놀란 나머지 집중이 흐트러지자 푸르스름한 불꽃은 사라졌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단태는 불로 익힌 금룡어를 먹을 수 있었다. 입에서 살살 녹는 금룡어 특유의 식감을 느끼면서 단태는 크게 외쳤다.

“암탄주, 고마워!”

또다시 웃음이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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