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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룡 암탄주로부터 용의 유산을 받았고, 유천주에게서 용족의 지혜를 배우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 설명에는 수탄왕령과의 계약도 포함되어 있었다. 단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수탄왕령을 언급하여 용으로부터 정령에 대한 지식을 알아내려고 노력했다.
“안타깝군. 불이 아니라 물이라니. 그래도 자넨 물의 용은 아니군. 드물게 탄생하는 바람의 용이라면 불의 마법도 다룰 수 있으니까.”
“가르침을 내려 주십시오.”
“풍갑이라고 들어 봤나?”
“……금시초문입니다.”
“바람의 갑옷일세. 나도 직접 본 적은 몇 번 없지만, 바람을 몸에 둘러서 갑옷처럼 만들 수 있다더군. 자네는 풍갑을 두르고 저 아래로, 용암의 호수로 내려가야 한다네.”
무열군주는 이글거리는 분화구 아래의 용암의 호수를 가리켰다.
단태는 할 말을 잃었다.
“쉽지는 않겠지. 자네가 풍룡이기에 내겐 자네를 가르칠 자격이 없네. 그저 풍갑을 통하여 불로부터 안전한 방법을 깨닫게 자네에게 충고를 할 수 있을 뿐이지. 물론 자네가 저기서 안전할 수 있다면, 자넨 불의 묘리도 일부 깨칠 수 있을 걸세. 그러면 수고하게나.”
무열군주는 눈앞에서 사라졌다.
이번에도 단태는 놀라지도, 당황하지도 않았다. 그동안 만난 용 중에도 이런 식으로 할 말만 내뱉고 사라진 용도 꽤 많았다. 용족의 공통점은 극에 이른 이기주의였다. 자존심 때문인지 외부에서 찾아온 손님을 배려하는 용은 극히 드물었다.
단태는 분화구 가장자리로 걸어갔다. 타오르는 열기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분화구는 직경이 대략 500절(1절은 2미터, 대략 1킬로미터)에 달했다. 천천히 분화구 둘레를 걸으면서 무열군주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것인지, 아니면 무시할지 고민했다. 시도하지 않고 용옥 밖으로 나가는 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력을 이용하여 용옥에서 빠져나가는 법을 알아냈지만,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때, 땅이 흔들렸다.
분화구의 반대쪽 가장자리 일부가 먼지를 일으키며 무너졌다. 산사태를 일으킨 바위와 흙더미는 먼지를 피워 올리며 뜨거운 용암에 풍덩 빠졌다. 용암은 그 많은 바위를 집어삼켰는데도 소화불량에 이르기는커녕 더 힘차게 부글거리고 있었다. 곳곳에서 피어나는 시꺼먼 연기는 저 붉은 괴물이 한바탕 식사를 마치고 터트린 트림과 방귀 같았다.
두려움에 뒤로 물러선 단태는 잠시 고민했지만 결론은 마찬가지였다. 포기하고 돌아갈 수는 없었다.
“……해 보자.”
단태는 정신을 집중했고, 곧 정수리와 발 그리고 손에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암탄주의 음모를 간파한 그날 이후, 단태는 바람을 다룰 수 있었다. 물처럼 자유자재로 변형하기는 어렵지만, 필요한 순간에는 언제든 바람을 일으켜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문제는 바람의 형태를 제한하는 작업이었다. 바람은 그 본질상 흘러 다닌다. 바람은 그릇이나 냄비 같은 공간에 담는 순간 더 이상 바람이 아니다. 바람 자체가 이동, 흐름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단태는 바람을 갑옷의 형태로 만드는 데 애를 먹었다.
이런저런 시도에도 실패하고 만 단태는 일단 용옥 밖으로 나왔다. 포기는 아니었다. 두둑이 배를 채운 뒤에 다시 들어갈 생각이었다. 유천주가 풍기는 공포를 이겨 내고, 암탄주의 음모를 분쇄한 단태는 두려움을 잊은 지 오래였다.
일곱 번째 도전 만에 바람을 일정한 공간에 가둘 수 있었다. 비결은 ‘회전’이었다. 지쳐서 포기하기 직전, 단태는 낙엽을 공중으로 띄우는 조그만 소용돌이를 떠올렸다. 좁은 골목에서 먼지와 낙엽을 휘감고 공중으로 올라가는 소용돌이를 흉내 내자, 바람은 더 맹렬하게 돌면서 더 좁은 공간에 존재할 수 있었다.
단태는 다양한 형태의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돌멩이 정도는 너끈히 들어 올리는 소용돌이는 물론 손톱만큼 작지만 윙윙 소리를 내는 소용돌이도 만들어 방어력을 비교했다.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같은 힘이라도 부피가 작을수록 방어력이 커졌다. 단태는 최대한 작은 소용돌이를 창조했고, 그 소용돌이를 이어서 몸을 덮을 만한 갑옷을 만들었는데,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한 정신적 작업이었다.
포기하고 싶을 만큼.
용이라고 해도 넌더리를 낼 만큼.
왜 물은 이토록 쉽게 다루는데, 바람은 그게 안 될까? 고민에 잠긴 단태는 오래지 않아 답을 찾아냈다. 수탄왕령과의 계약으로 인해 물과의 친화력이 급격히 상승했고, 그 때문에 물을 빠르고 쉽게 다룰 수 있었다.
단태는 자연스럽게 바람의 정령을 떠올렸다. 물의 정령왕과 계약을 할 수 있다면, 바람의 정령왕과도 계약을 맺을 수 있지 않을까? 그 생각의 타당성을 확인하기 위해서 용옥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온 단태는 처음 단태를 보는 것처럼 다가오는 무열군주에게 그 부분을 물었다.
“바람의 정령왕? 그대에게 소요왕령을 불러낼 능력이 있을까? 불러낸다고 해도 계약의 대가를 치를 수 있을까?”
“계약의 대가라니요?”
“그대가 수탄왕령과 계약할 수 있는 이유는 암탄주가 그 대가를 치렀기 때문일세. 그게 아니라면 그대의 수준으로는 수탄왕령의 그림자도 볼 수 없겠지. 그대의 존재 전부를 건다면 소요왕령을 불러낼 수도 있겠지만, 지혜로운 결정은 아니라고 생각하네.”
“……알겠습니다.”
“허나, 비천단령이나 의편치령은 불러낼 수 있을 걸세.”
“그런 정령도 있습니까?”
단태로서는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자네는 아무것도 모르는군. 용족의 어른으로서 어린 잠룡을 위하여 알려 주지. 정령은 여섯 계급으로 나뉘어 있네. 자네가 아는 수탄왕령은 물의 정령왕이지. 그 아래로 수령, 장령, 청령, 치령, 단령이 있네. 단령은 그 수가 많고 계약도 쉬우며 대가도 그리 크지 않지만, 소환한다고 해도 크게 도움을 받을 수는 없지. 자네가 가진 바람의 친화력이라면 크게 손해를 보지 않고도 비천단령, 의편치령은 소환할 수 있을 걸세.”
“어떻게 소환할 수 있습니까?”
“자네의 명룡은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았나? 자네를 담당하는 명룡에게 가 보게.”
무열군주는 사라졌다.
잠시 고민하던 단태는 용옥 밖으로 나갔다. 설고와 함께 푸짐한 요리를 즐긴 다음에 다시 용옥으로 들어선 그는 이전의 만남을 깡그리 잊고 처음으로 단태를 본 무열군주에게서 정령 소환법에 대해 물었고, 그 답을 알아내는 데 성공했다. 용옥은 이런 점이 좋았다. 원한다면 백 번, 천 번 들어가서 다른 질문을 던져서 또 다른 지혜를 얻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비천단령은 피 한 방울이면 소환하여 계약까지 맺을 수 있었다. 풍혈지체라는 타고난 체질 덕분이었다.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이 빛을 발할 때 소환된 비천단령은 한 줄기 실바람이었다. 부드럽게 어깨와 옆구리를 휘감으며 주위를 맴도는 비천단령은 말 잘 듣는 강아지와 비슷했다.
비천단령에 마력을 주입하자 상황은 달라졌다. 강아지가 늑대로 변한 듯, 강풍이 불었다. 놀란 설고는 벽을 통해 천장에 달라붙어 아래를 지켜보았고, 강풍에 흔들려 쓰러진 선반 옆으로 수백 개의 구슬들이 요란하게 부딪히며 돌아다녔다.
단태는 급히 마력을 차단했고, 비천단령은 다시 순한 실바람으로 돌아갔다.
“휴우…….”
두근거리던 가슴이 가라앉자 단태는 다음 단계에 돌입했다. 의편치령의 소환을 위해 바닥에 정교한 마법진을 그렸다. 용족의 기억력 덕분에 단태는 한번 본 것은 잊지 않고 정확히 재현할 수 있었다.
바닥으로 내려와 선반을 일으키고 여덟 개의 다리를 부지런히 움직여 용옥을 원래 위치로 돌려놓던 설고가 단태를 쳐다봤다.
“……괜찮을까요?”
“그럴 거야.”
단태는 설고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말했다. 반드시 괜찮아야 한다!
의편치령의 소환에는 피와 살이 동시에 필요했다. 물로 만든 칼로 팔뚝을 찔러 피와 살을 도려냈다. 새끼손가락의 손톱보다 작지만 쓰리고 아팠다. 다행히 소환은 잘 진행되었고, 곧 마법진을 통하여 흐릿한 형체를 지닌 바람의 정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를 부르셨습니까?”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당신이 의편치령입니까?”
“저는 취풍장령입니다.”
“…….”
단태는 깜짝 놀랐다.
취풍장령?
그러면 정령의 단계에서 어디에 속할까? 맞다! 취풍장령은 의편치령보다 두 단계나 위에 있는 정령이었다.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의편치령 대신 제가 왔으니까요.”
“그럴 수도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