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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쪽 세상을 구경하고 싶은데, 실로 오랜만에 찾아온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요. 자, 저와 계약을 맺으시겠습니까? 아니면 의편치령을 데려올까요?”
목소리에 담긴 아쉬움, 슬픈 감정에 단태는 몸을 살폈다. 몸에는 이상이 없었다.
“계약을 맺는다면, 그 대가는 무엇입니까?”
“팔 하나를 원합니다.”
“그건 안 됩니다.”
단태는 잘라서 말했다. 아무리 급해도 팔 하나를 내주고 바람의 정령과 계약을 맺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저기 있는 구슬 중 하나를 제게 주십시오. 그러면 계약을 맺을 수 있습니다.”
단태는 잠시 정령이 가리킨 용옥을 들어 올렸다. 파란색에 구름이 낀 듯한 그 용옥은 현룡 무한주가 남긴 용옥이었다. 바람의 정령은 왜 용옥을 원할까? 단태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하지만 위대한 용이 남긴 귀중한 기억을 넘기고 싶지는 않았다.
“이것도 안 됩니다.”
대답하면서 단태는 특유의 ‘명국영식 생각’을 시작했다.
분명히 의편치령을 소환했는데, 부르지도 않은 상위 계급의 취풍장령이 나왔다. 왜? 무언가 목적이 있을 터였다. 게다가 소환의 대가를 거절했는데 저 정령은 종류를 바꾸면서까지 계약을 맺고 싶어 한다.
용족에 대해서는 그 어떤 인간보다 잘 안다고 자부하지만 정령은 또 다른 존재였다. 단태는 정령에 대해 아는 게 없기 때문에 본능적인 위험을 감지하고 있었다.
하나의 결론에 다다른 단태는 반투명한 여인의 형상으로 둥실 떠 있는 취풍장령을 쳐다보았다.
“이것은 제가 아끼는 물건입니다. 저기 있는 구슬보다 백배나 더 귀중합니다. 이것을 대가로 계약을 맺을 수 있습니까?”
단태는 금룡어 요리를 먹은 후에 이 사이에 낀 찌꺼기를 빼낼 때 사용하는 기다란 가시를 들어 올렸다.
바람의 정령은 한때 금룡어의 갈비뼈였던 그 가시를 유심히 살폈다. 그러더니 반응을 보였다.
“그렇게 하지요.”
정령이 가져간 가시가 가루가 되어 사라진 순간, 단태는 기묘한 연결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낯선 사람과 손을 잡은 것 같았다.
보이지 않는 존재와의 연결이 이루어지자 안 그래도 예민한 촉각이 몇 배나 더 날카로워졌다. 몸을 둘러싼 공기의 흐름이 손바닥 들여다보듯 알 것 같았다.
단태는 조금씩 선명해지는 취풍장령을 바라보며 아무런 가치도 없는 금룡어의 가시를 대가로 계약을 맺은 이유를 생각했다. 계약 자체가 중요했던 것이다. 저 정령에게 계약의 대가는 변동의 여지가 있는 부분이었다. 왜 그럴까 궁금했지만 당장 알아낼 필요는 없다.
심장에서 마력이 조금씩 빠져나갔다.
푸르스름한 형체를 가진 취풍장령이 허공에 뜬 채로 다가왔다. 대리석 석상이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았다.
“언제든지 저를 부르면 당신을 돕기 위해 이 세상으로 나오겠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정령과 계약을 맺은 소환자로서 말을 편하게 해도 된다던데, 그렇습니까?”
“물론입니다, 주인님.”
정령이 처음으로 웃었다. 차가운 미소였다.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어.”
“뭐든지 말씀하세요.”
“풍갑을 입고 싶은데, 일일이 바람을 갑옷의 형태로 만드는 게 너무 어려워. 방법이 없을까?”
“지금 한번 해 보세요.”
“좋아.”
단태는 암탄주 덕분에 갖게 된 강대한 정신력을 집중하여 바람의 갑옷을 떠올렸다. 곧 몸에서 흘러나온 바람, 외부에서 불어온 바람이 맹렬하게 회전하며 소용돌이를 이루었고, 그 소용돌이는 수백 개로 나뉘어 갑옷의 형태로 뭉쳤다. 바람의 정령과 계약을 맺기 전까지는 안간힘을 다 써도 불가능했던 작업이 그리 어렵지 않게 이루어졌다.
갑옷을 흩어 버린 단태는 취풍장령을 응시했다.
“……어떻게 된 거지?”
“저와의 계약으로 친화력이 증가했기 때문입니다, 주인님.”
“그래?”
단태는 내심 기뻤다.
“풍갑의 위력을 강화시키려면 저보다 상급의 정령과 계약을 맺으시면 됩니다.”
“알았어. 나중에 필요하면 부를 테니까.”
“네, 주인님.”
취풍장령은 사라졌고, 바람의 정령이 내뿜던 특유의 느낌도 자취를 감추었다.
“축하드려요, 료마주 님.”
정령의 등장에 잔뜩 겁을 먹고 천장의 출구로 올라가 있던 설고가 다가와서 말했다.
“……고마워.”
“그 말은 아무리 들어도 지겹지 않아요.”
“고마워. 고마워. 고마워. 고마워. 진짜로.”
단태의 장난에 설고는 앞다리를 부딪쳐 ‘박수’를 쳤다.
잠시 설고와 뒹굴면서 놀았던 단태는 다시 용옥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진지한 태도로 다가오는 무열군주와의 대화를 끝낸 그는 용기를 내어 바람의 갑옷을 입고 분화구의 가파른 비탈면을 미끄러지듯 내려가기 시작했다. 열기에 몸이 타 버릴 것 같았다.
바람의 갑옷을 일으키자 열기가 차단되어 서늘한 느낌이 돌아왔지만, 용암에 가까워질수록 더 강한 열기가 풍갑을 뚫고 안으로 침투했다. 단태는 용암에 풍덩 빠지기는커녕 가까이 접근도 못하고 용옥 밖으로 나왔다. 강화된 바람의 갑옷도 용암의 열기를 막아 낼 만큼 강력하지 않았다.
풍갑의 완성을 보고 싶지만, 단태는 흘러가는 시간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엄마는 무사할까? 설희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륜사 사부님과 명국영 스승님은 시장과 방단으로부터 공격을 받지는 않았을까? 걱정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찾아왔다.
‘그래, 지금 꼭 풍갑을 완성할 필요는 없어.’
단태는 마지막 용옥을 원래 있던 자리에 올려놓았다. 왠지 모르게 속이 후련했다.
다 끝났다고 생각하니 피곤이 몰려왔다. 그동안 이 순간을 위하여 전력 질주했었다. 단태는 비교적 평평한 곳에 누웠고, 눈을 감았다. 금세 잠에 빠져든 그는 엄마, 설희와 재회하는 꿈을 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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푹 자고 일어난 단태는 설고를 발견했다. 눈을 뜰 때마다 내려다보고 있는 설고의 눈은 더 이상 흉측하지 않았다. 설고는 용옥간에 갇힌 단태에게 엄마이자 친구, 그리고 스승이었다. 그 고마움을 갚으려면 반드시 몸을 바꾸는 마법을 알아내야 할 것이다.
“이제 밖으로 나가실 겁니까?”
“그래야지.”
몸을 일으킨 단태는 설고가 마시고 내뱉는 공기의 흐름을 통하여 설고의 마음을 짐작했다. 용옥간 안에서의 시간이 끝나서 아쉬운 모양이었다.
“축하드려요, 료마주 님.”
“다 설고 덕분이야. 고마워.”
“…….”
설고는 갑자기 뒤로 물러갔다.
단태는 예리한 감각으로 설고가 숨을 몰아쉬고 있으며, 그 이유도 추측할 수 있었다. 감정이 북받쳐 올라 평정을 잃어버렸다. 천천히 걸어가서 용옥간 구석진 곳에 있는 설고의 몸을 쓰다듬었다. 빳빳한 털이 전혀 거북하지 않았다. 단태는 이곳에서 설고를 통하여 겉모습이 아닌, 그 너머를 볼 수 있는 능력을 얻었다.
외모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언제까지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나와 항상 같이 있자.”
“……료마주 님.”
“약속한 거다.”
“네, 료마주 님!”
설고가 달려들었다. 포옹이었는데, 단태는 뒤로 벌러덩 넘어지고 말았다. 웃음을 터트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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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태는 용옥간 안쪽, 입구로부터 멀리 떨어진 구석으로 가서 앉았다. 마음이 살짝 떨렸다.
“하고 싶지 않지만, 그래도 해야 돼. 내게 도움이 되니까.”
설고는 그런 단태를 지켜보고 있었다.
하나의 구슬에 담긴 용족의 기억을 경험한 후에는 중립적인 관점을 가진 설고와 대화를 나누는데, 하얀 거미와의 이야기는 마음을 다스리는 데 큰 도움이 되지만 충분하진 않았다. 그 이상이 필요했다.
한참 고민을 거듭하던 단태는 자신의 내부에 무수한 용옥이 숨겨져 있음을 깨닫고 무릎을 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