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 회: 4-4 -->
용옥간에는 용의 기억을 담은 구슬 수천 개가 있을 뿐이지만, 단태 내부에는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의 기억이 모조리 저장되어 있었다. 수만 개, 아니 수백만 개의 용옥으로도 담을 수 없는 삶의 역사가 마음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것이다.
그 진실을 깨달은 이후, 단태는 주기적으로 과거로 돌아갔다. 마치 기억을 담은 용옥 내부로 들어가는 것처럼.
생생한 과거,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옆에서 지켜보는 듯한 과거는 단순히 단태로 하여금 인간 특유의 사고방식을 유지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단태가 품고 있던 막연한 생각, 환상을 깨뜨리기까지 했다.
쓰라린 기억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또래의 아이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위해 수치와 굴욕을 감수했음에도 그 마을에서 대대로 살았다는 자부심을 가진 아이들은 단태를 배척했다. 가끔 단태를 놀이에 끼워 주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 단태는 혼자였다. 도박에 미쳐 집을 비우는 아버지에 대한 소문 때문이었다. 아이들은 너무도 쉽게 그 이야기를 입에 올려 단태의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남겼고, 낯빛이 어두운 단태를 보며 깔깔 웃어 댔다.
단태는 아버지를 증오하는 이유 중 하나를 새롭게 찾아냈다. 이전에는 몰랐다. 엄마와 설희 때문만은 아니었다. 정상적인 아버지였다면, 단태 자신도 그 아이들 중 하나가 되어 신 나게 들판을 달릴 수 있었을 텐데. 아버지로 인해 잃어버린 어린 시절의 소속감이 아들로 하여금 아버지를 미워하게 만든 것이다.
그 어느 것도 빠뜨리지 않는 기억은…… 인정하기 싫은 진실도 드러낸다.
기억은 엄마에 대한 단태의 막연한 인상을 무너뜨렸다.
단태는 아버지는 항상 악하지만 엄마는 늘 착하다고 생각했다. 아버지 때문에 집이 풍비박산 나고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있다고만 생각했다. 그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엄마는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갑자기 떠맡은 짐 때문에 휘청거렸고, 그 충격은 고스란히 아들에게로 전해졌다. 냉혹한 현실 앞에 마음까지 흔들린 엄마는 아직 어린 아들의 어깨를 꽉 잡고 이렇게 말했다.
“넌 아버지처럼 살아선 안 돼. 넌 이 집의 가장이야. 그러니까 넌 절대 무너지면 안 돼. 절대 도망가서도 안 되고. 무슨 일이 벌어져도 넌 가족을 책임져야 해! 무슨 일이 벌어져도 엄마를, 설희를 버려서는 안 돼! 알았니?”
‘가장’이라는 단어의 뜻조차 모르는 어린 단태를 붙잡고 엄마는 오랫동안 하소연을 했다. 다그치는 엄마가 무서워 아들이 눈물을 뚝뚝 흘리는데도 엄마는 아들이 절대 아버지처럼 되지 않도록, 될 수 없도록 주문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그 말은 아이에게 일종의 마법이었다.
워낙 어릴 때여서 단태가 용족의 기억력을 암탄주로부터 받지 않았다면 절대 기억하지 못할 과거에 벌어진 일이었다.
하루, 이틀…… 아니 한 달이나 이어진 그 의례 같은 일방적인 주입 과정이 끝나자, 어린 단태는 어른처럼, 가장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엄마는 스스로 새벽에 일어나 물을 길어 오고 장작을 패는 아들을 보며 마음을 추슬렀는데, 아들에게 ‘넌 가장’이라는 무언의 압박을 가하는 일 자체를 멈추지는 않았다. 기회만 생기면 ‘집을 책임지는 아들’, ‘어려도 착하고 올바른 아들’, ‘아버지를 대신하는 아들’이라며 사람들 앞에서 단태를 칭찬했던 것이다.
단태는 가족을 향한 사랑, 아니 엄마와 설희에 대한 책임감이 언제 시작되었는지 깨달았고, 마음이 아팠다. 당시 엄마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지만, 엄마의 선택을 지지할 수는 없었다. 엄마는 어른이 감당해야 할 책임 중 일부, 아니 대부분을 어린 아들에게 전가했고, 아들의 변화에 기대어 몸을 일으켰다.
엄마는 우울한 기분에 휩싸일 때가 많았고, 그런 날이면 단태는 음식까지 준비해야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엄마는 좀 더 적극적으로, 아들과 딸을 위해 더 열심히 살기 시작했지만, 마음 안쪽에 숨겨진 거대한 구멍이 커지는 날이면 내면으로 숨어 버려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상태에 빠져들었다.
단태는 그런 엄마를 보며 가장으로서의 압박을 받았다. 그 부담감은 단태로 하여금 하고 싶은 일보다는 해야 하는 일에 몰두하도록 만들었다.
아버지에 대한 인상도 그 생생한 기억으로 흔들렸다. 엄마를 괴롭히고, 책임은 내팽개친 채 돈만 가지고 떠나는 사악한 인간으로 각인된 아버지도 한때는 가끔 따뜻하고 멋진 남자였다.
공기가 따뜻한 어느 날, 단태와 설희가 마을 아이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힘없이 집으로 돌아오자, 아버지는 근처 커다란 나무에 그네를 만들었다. 솜씨 좋은 아버지가 만든 그네는 멋졌고, 거기 탄 단태는 처음으로 자유로움을 느꼈다.
“어떠냐?”
아버지가 물었다.
“좋아요.”
그네가 위로 올라가면 하늘이 가까워졌고, 아래로 내려가면 산자락이 하늘을 삼키는 느낌이었다.
“왠지 모르게 하늘을 나는 것 같지 않냐?”
“그런 것 같아요.”
“아버진 어릴 때 하늘을 날고 싶었단다. 정말로. 생각만으로도 짜릿했거든.”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하는 아버지의 얼굴에서 빛이 났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용사, 영웅의 얼굴 같았다. 어린 단태는 아버지 같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엄마, 아버지에 대한 생각만 흔들린 게 아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단태 자신에 대한 생각이었다.
단태는 스스로 정의롭고, 인내심이 강하며, 누구 앞에서도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라고 여겼다. 어릴 때부터 엄마를 도와서, 때로는 엄마를 대신하여 가장 노릇을 했기 때문에 생겨난 자부심이었다. 그러나 진짜 과거는 그 자부심을 산산조각 냈다.
얼마나 교묘하게, 의도적으로 엄마와 설희를 괴롭혔는지 직접 보게 되자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니,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정말 자신이 저런 짓을 했을까 싶었지만, 이미 그는 알고 있었다.
기억에는 문제가 없다는 사실을.
가장으로서 설희에게 이런저런 명령을 내렸다.
때로는 쓸데없는 짓, 해 봐야 도움이 안 되는 건데도 어린 여동생에게 가장의 권위를 알리려고 지시를 하기도 했다. 설희가 저항하면 마치 아버지가 된 것처럼 거칠게 윽박질러 울린 적도 많았다. 계속 말을 듣지 않으면 아버지처럼 집을 나가 버릴지도 모른다고 협박도 했다. 설희에게 둘도 없이 착하고 훌륭한 오빠라는 생각은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엄마에게는 더 잔인한 짓도 서슴지 않았다.
엄마가 나약해서 아들이 고생한다는 점을 알리려고 일부러 힘든 척, 가끔은 아픈 척을 하면서 엄마의 표정을 살폈다. 들썩거리는 어깨, 퀭한 얼굴, 눈물 맺힌 눈을 보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일어나서 다 나았다는 거짓말로 엄마를 감동시킨 적도 있었다.
구토가 나올 만한 행동이었다.
과거는 들여다볼수록 상상도 못 한 무언가가 튀어나오는 기이한 상자 같은 것이었다.
초기에는 이런 짓, 과거로 돌아가서 직접 지켜보는 행동을 애써 부정하려고 했다. 가슴이 아팠고, 마음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태는 이 과정이 자신에게 힘을 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본인의 허약함 때문에 아들에게 책임을 전가한 엄마를 미워하는 감정이 생긴 게 아니라, 오히려 엄마를 향한 사랑이 더 깊어졌다. 엄마도 사람이며, 여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니 맹목적인 엄마를 향한 사랑은 서서히 ‘양지란’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개인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사랑으로 커졌다. 엄마가 겪어야 했던 아픔에 더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아버지에 대한 증오는 줄어들었다.
여전히 아버지의 결정, 아버지의 행동은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달라진 점은 아버지는 아버지, 나는 나라는 인식의 전환이었다. 아버지를 미워하는 것 때문에 더 이상 삶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아버지에게 고마움을 느끼기도 했다. 개떡 같은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단태는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을 테니까.
단태는 눈을 떴다.
천장에 박힌 돌멩이가 뿌리는 빛에 잠긴 용옥간이 보였다. 수천 개의 용옥간 내부로 들어가서 용이 남긴 기억을 경험했던 지난 시간이 머리를 스쳤다.
“끝나셨어요?”
설고가 물었다.
“아직. 정리할 게 있어. 조금만 기다려.”
단태는 다시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단태는 달라진 자신을 발견했다. 성장한 자신이었다. 아등바등 눈앞을 보며 달려가던 어린 시절은 지나가 버린 느낌을 받았다. 단태는 깨달았다. 어른이 되었다는 사실을.
진짜 어른이 되었다.
과거를 이처럼 생생하게 들여다보지 않았다면 절대 알 수 없는 진실을 깨달았기 때문일까?
다시 한 번 ≪무무비경≫의 그 문장이 떠올랐다.
[편지]네 마음이 세상이며, 세상이 곧 네 마음이다.[편지]
과거는 이 문장이 진실임을 증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