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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 기억력을 확대경 삼아서 과거를 들여다보기 전까지, 과거에 대한 인상은 실제 과거와 사뭇 달랐는데도 단태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마음이 과거의 일부를 받아들인 반면, 다른 부분은 제거해 버린 것이다. 단태에게 엄마는 한없이 착하고 아버지는 삶의 모든 부분이 악한 사람이었지만, 실제로 가서 확인한 과거는 그게 전부가 아님을 보여 주었다.
마음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있었다.
항상 마음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단태는 마음이 보지 않는 것에 관심이 생겼다.
무엇을 보지 못할까?
왜 보지 못할까?
어떻게 하면 못 보는 것을 볼 수 있을까?
이미 지나가 버린, 그래서 과거라 불리는 기억 속으로 들어간 후에야 진실을 깨닫고 싶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눈앞에서 펼쳐지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고 싶었다. 마음을 넓히고 싶었다. 세상 전체를 고스란히 포함할 만큼.
그러면 모든 것을 볼 수 있지 않을까?
모든 것이 보이는 세상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쾌감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거대한 소름처럼.
단태는 또 한 번 속으로 암탄주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진심이었다. 비록 암탄주의 의도는 악했지만. 생각해 보면 아버지와 암탄주는 비슷했다. 둘 다 단태에게 긍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둘 다 지금의 단태를 만든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순간, 단태는 외부와 조건, 환경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님을 깨달았다. 마음이 곧 세상이니, 마음이 굳건히 선다면 냉혹한 환경은 오히려 성장에 필요한 자양분이 될 것이다. 조개가 고통을 견디며 모래를 진주로 바꾸는 것처럼, 장애물은 오히려 한 사람을 더 찬란하게 빛나게 할 것이다. 장애가 클수록 성취도 커질 테니까.
순간, 단태는 거인이 된 느낌을 받았다. 용옥간에 갇힌 신세지만, 왠지 그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다. 유천주도 그리 중요한 존재가 아니었다. 세상마저 작아진 느낌이었다.
자유가 느껴졌다.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아버지 때문에 이런 꼴이 되고 말았다, 엄마가 무식해서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다, 여동생은 아무것도 모르고 할 줄 아는 것도 없어서 하나부터 열까지 챙겨 줘야 한다, 스승과 사부가 무능력해서 아직까지 구하러 오지 않는다, 밑바닥 같은 삶은 운명이다, 누천파나 반우현 같은 삶은 꿈도 꿀 수 없다…… 등등 누군가를 탓하고,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사고방식을 더 이상 유지할 필요가 없다는 깨달음은 단태에게 기이한 해방감을 선사했다.
그 누구도, 부모도, 륜사도, 명국영도, 저 바깥 어딘가에 있는 유천주도,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도 자신을 위협할 수 없다는 진실은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오직 자신만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는 진실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어쩌면 세상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보물이었다.
단태는 마음이 세상을 창조한다는 진실, 마음을 다스리는 자가 세상을 다스릴 수 있다는 진실을 몸에, 피부에, 뼈에 깊이 새기고 싶었다.
절대 잊지 않도록.
이 보물을 절대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단태는 공중에 떠 있었다.
바람이 단태를 에워싸며 불고 있었다.
단태가 눈을 뜨자, 오랫동안 단태를 바라보던 설고가 말했다.
“……료마주 님, 무언가 달라졌어요.”
“그래?”
단태는 빙긋 웃었다.
그런 단태 앞에 선 설고는 기묘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단태가 분명 눈앞에 있는데도, 사라져 버린 느낌이었다. 그와 동시에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존재감을 발휘하는 단태를 느낄 수 있었다. 노려보는 것도 아닌데,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느낌도 있었다. 유천주에게도 느껴 보지 못한 분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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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태는 용옥간 입구를 가로막은 거대한 돌문 앞에 섰다.
지금이라면 순수한 마력을 이용하여 저 돌문을 밀어 올리고 밖으로 나갈 수 있다. 망설이는 이유는 단 하나, 유천주 때문이었다. 유천주는 아무것도 모른다. 암탄주가 인간에게 재앙을 줄 목적으로 용의 유산을 남겼다는 점은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유천주는 단태를 철석같이 용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단태는 지금까지 그 착각을 깨지 않았다. 앞으로도 잘못을 지적할 생각도 없었다. 유천주보다 강해지기 전까지는 금물이었다.
그때, 문이 저절로 열렸다.
단태 또래의 아이가 팔짱을 끼고 복도에 서 있었다.
단태는 놀라지 않았다. 이곳에 나타날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필시 유천주의 또 다른 모습일 것이다.
“왜 안 나오는 거냐? 용옥을 모두 경험했을 텐데.”
“잠시 숨을 골랐을 뿐이에요.”
단태는 스스로 생각해도 놀랄 만큼 자연스럽게,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마치 반가운 친구를 만난 것처럼.
“……뭐?”
유천주는 잠시 단태를 노려봤다.
“용족 특유의 여유가 왜 당신에게서는 느껴지지 않을까요?”
단태는 조급한 유천주를 느긋한 시선으로 쳐다봤다.
“나오겠다는 거냐? 거기 남겠다는 거냐?”
“잠깐만 기다려요.”
단태는 일부러 애를 태웠다. 그러고 싶었다.
“거기 서 있겠다면 난 지금 즉시 널 죽일 거야. 넌 용으로 태어났으면서도 인간이기를 선택했기 때문에. 만약 걸어 나온다면 난 네 명룡으로서 널 잠룡을 거쳐 훌륭한 초룡이 되도록 도울 거야. 선택은 네 몫이니까 마음대로 해.”
유천주는 아이처럼 말했다. 몸에 맞게 말투와 분위기까지 달라져 있었다.
단태는 밖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곧 유천주 앞에 섰다. 키가 커서 유천주를 내려다봤는데, 기분이 묘했다. 누군가를 내려다본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순간, 눈앞의 아이를 없애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저런 아이라면 물의 칼로 쉽게 죽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단태는 이성적인 판단을 놓지 않았다. 겉모습에 속아서는 안 된다. 어쩌면 유천주는 그런 반응을 끌어내기 위해 일부러 저 귀엽고, 무기력한 아이의 모습으로 나타났는지도 모르니까.
문득 유천주의 삶은 어떨까 생각해 봤다. 유천주에게도 숨겨진 모습이 있지 않을까?
유천주는 단태의 생각을 잘랐다.
“이제부터 너는 풍마룡 료마주다.”
“풍마룡 료마주?”
괜찮은 이름이지만, 단태는 그 이름을 받아들일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단태라는 더 좋은 이름이 있기에.
“네가 풍룡이라는 건 알고 있지?”
“당연히 몰랐죠.”
“하긴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을 테니까. 잘 들어, 넌 바람의 힘을 타고난 용이야. 내가 알기로 연마편이라는 건방진 인간이 세운 용령의 개국 이래로 풍룡은 태어나지 않았어. 그러니 넌 대단히 희귀한 재능을 타고난 용인 셈이지.”
“좋은 거죠?”
단태는 활짝 웃었다.
저 유천주를 왜 그렇게 두려워했을까? 아니, 이유는 알고 있었다. 그저 과거와 달라진 현재의 상태, 유천주를 보고도 애쓰지 않고 웃을 수 있는 지금이 만족스러울 뿐이었다.
“아무렴.”
유천주도 웃었다.
그때, 유천주가 눈살을 찌푸렸다.
“왜 그래요?”
단태가 물었다.
“보자, 아, 또 그놈들이 찾아왔어. 겁대가리를 상실한 놈들이야.”
“누군데요?”
“용신전.”
“용신전?”
단태는 마둔수탑의 종자로 있던 시절에 용신전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장당전이 ‘장제’라는 신을 숭배한다면 용신전은 용을 숭배하는 조직이었다.
“매년 이맘때가 되면 용신전은 어린 여자를 배에 태워 호수 중앙으로 보내. 난 인간 따위는 관심도 없는데, 용신전은 어린 여자를 그런 식으로 보내면 한 해 동안 모든 일이 잘된다고 철석같이 믿는 모양이야. 물론 난 인간에겐 관심 없지. 그 여자는 굶주리다가 물에 빠져 물뱀이나 악어의 배 속으로 들어가고 말 테니까.”
“어떻게 그런……?”
단태는 화가 났다. 사람을 제물로 사용하다니!
“왜 불쌍하다고 생각하니?”
유천주는 단태를 유심히 뜯어보았다.
“당연히…….”
단태는 얼버무렸다.
“단번에 인간의 잔재를 치워 버리긴 어렵지. 좋아. 명룡으로서 나의 잠룡을 위하여 선물 하나 마련해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