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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을 남긴 유천주는 사라졌다.
처음부터 거기 없었던 것처럼.
단태가 새로운 관점으로 유천주의 용혈 곳곳을 둘러보고 있는데, 유천주가 물에 젖은 여자를 데리고 단태 앞에 나타났다. 여화와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그 여자는 정신을 잃어 유천주가 손을 놓자 축 늘어지고 말았다.
“선물이야.”
“선물이라니요?”
단태는 유천주를 쳐다봤다. 의도가 무엇일지 궁금했다.
“난 잠룡으로 지낼 때 나보다 일찍 태어난 용의 기억을 접하면서 한 가지 소원을 가졌어. 바로 그 어떤 동물보다 월등한 영향력을 자랑하는 인간을 하족으로 삼고 싶었거든. 한데, 나의 명룡은 내가 말하지 않았는데도 내 생각을 간파하고는 처음부터 안 된다고 딱 잘라 버렸어. 그 때문에 난 멍청한 거미를 하족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지. 허나, 너 료마주는 달라. 난 네가 인간을 하족으로 삼기 원한다.”
“…….”
단태는 깜짝 놀랐다. 유천주가 이런 요구를 하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
“이 인간과 계약을 맺어. 그러면 모든 인간이 네 앞에 무릎을 꿇을 거야. 어때? 멋지지?”
“하지만 어떤 용도 인간을 하족으로 삼지는 않았잖아요.”
단태는 용옥간에 있는 그 어떤 용옥에서도 인간을 하족으로 삼은 용은 보지 못했다.
“과거는 지나가 버렸어. 나약하고 도전하지 않는 용들은 모조리 저주로 죽어 버렸다는 점을 잊지 마. 넌 현룡 무한주를 뛰어넘어야 해. 그래야 용족의 명맥이 이어질 테니 말이야.”
“그래도…….”
“나 유천주는 명룡으로서 잠룡 료마주에게 명령한다. 인간을 하족으로 삼아라.”
유천주의 목소리가 묵직해졌다.
“…….”
용옥을 통해 명룡의 권한이 얼마나 막강한지 알고 있던 단태는 말없이 유천주를 쳐다보았다. 저 용, 못 배운 게 한이 되어 책을 싫어하는 아들을 억지로 학교에 보내는 아버지 같았다. 자기가 인간을 하족으로 삼고 싶었지만 그 꿈을 이루지 못하자 이런 식으로 강요를 하는 것이다.
용에겐 하족을 삼을 기회가 단 한 번뿐이었다. 만약 여러 번 가능했다면 저 유천주는 이미 인간을 하족으로 삼았을 것이다.
“대답해라, 잠룡.”
낮고 묵직한 소리가 통로를 울렸다. 거부하면 죽이겠다는 노골적인 협박이 담긴 명령이었다.
단태는 유천주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인간은 그 어떤 동물보다 똑똑할 뿐 아니라 협력에 능한 존재여서 하족에 가장 적합한데도 어떤 용도 인간을 하족으로 삼지 않은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 거예요. 만약 당신이 명룡으로서 내게 강요한다면, 난 이 문제를 용오군 앞으로 가져갈 생각입니다.”
최대한 침착하고 차분한 대답이었다.
“용오군? 후후, 그놈들은 다 뒈졌다. 저주 때문에.”
“어떻게 그걸 알죠?”
“그건…….”
유천주는 말문이 막혔다.
“적어도 100년, 아니 150년 이상 이 호수를 떠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용족의 다섯 군주가 저주로 모두 죽었는지 알 수 있어요? 그리고 용오군이 전부 죽었다고 해서 그 지위를 계승한 용이 없다고 단언할 수도 없잖아요. 당신이 여기 살아 있는 것처럼 말이에요.”
단태는 용옥을 통해 얻은 지식을 무기 삼아 유천주의 명령에 저항하고 있었다.
용오군은 용족 최고의 지위로 독립적인 용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면 중재하거나 판단을 내리는 다섯 용군주였다. 보통 황중룡, 청동룡, 적서룡, 백남룡 그리고 흑북룡이라 불렸다. 단태가 마지막으로 경험한 용옥은 적서룡 무열군주가 남긴 용옥이었다.
“그래서 인간을 하족으로 삼지 않겠다? 넌 인간이 아니라 용인데도? 설마 아직까지 자신을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유천주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이 땅에 살았던 용들이 한 번도 인간을 하족으로 삼지 않은 이유도 모른 채 명룡의 명령에 따를 수는 없어요.”
단태는 단호했다. 물러설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아하, 인간을 하족으로 삼았다가 어떤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지 몰라서? 그래서 싫다?”
유천주가 놀리듯 말했다.
“마지막 용일 수도 있으니까요.”
“…….”
유천주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그는 의식을 잃은 인간 여자를 물뱀 밥으로 던져 주려다 이 기이한 녀석을 쳐다봤다. 처음 볼 때부터 이상한 녀석이었다. 인간의 몸을 가진 용이라니. 아무리 현룡 무한주가 이 녀석처럼 인간의 손에 자랐다고 해도 그건 긴 용족의 역사를 통틀어 딱 한 번뿐이었다.
정말 이 녀석은 무한주처럼 용일까?
아니면 용으로 위장하여 이곳에 있는 보물을 훔치러 온 천박한 인간일까?
지금까지 지켜본 바에 의하면 저 녀석은 용에 가까웠다. 용옥에 담긴 기억에 접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용의 심장을 가졌던 것이다. 무엇보다 용심이야말로 용이라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어떤 인간도 용심을 스스로 만들어 낼 수는 없으니까.
그러나 원래 두 개여야 하는 용심을 단 하나밖에 가지지 않았다는 점은 무시 못할 결점이었다.
유천주는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저 인간 여자를 녀석에게 맡겨 보자. 그러면 저 녀석이 자신을 용이라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인간이라고 믿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 지켜보는 수밖에 없어.’
유천주는 만약 몸은 용이라고 해도 마음이 인간이라면 명룡으로서 용족 전체의 운명을 위해 료마주를 죽일 생각이었다.
유천주가 사라지자, 단태는 몸을 숙여 의식을 잃은 여자의 몸을 살폈다. 다행히 놀라서 기절한 것뿐이었다. 그는 여자를 두 팔로 안고 용옥간으로 향했다. 지금은 그곳 외에는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마력으로 돌문을 밀어 올리고 용옥간 중앙의 바닥에 여자를 눕힌 단태는 봉긋한 가슴을 보고는 얼굴이 빨갛게 변했다. 물에 젖어 가슴의 윤곽이 고스란히 드러났던 것이다.
그때, 여자가 기침을 하며 깨어났다. 힘겹게 눈꺼풀을 밀어올린 여자는 단태를 보고는 겨우 입을 열었다.
“……여긴 어디……예요?”
“안전한 곳입니다.”
단태는 진실을 말할 수 없었다.
“……공……자……님께서 절 구……해…… 주셨군요. 감……사……드려요.”
“전 아무것도 한 일이 없습니다.”
이번에는 진심이었다.
“전 운……미……라고 해요. 공……자님은요?”
여자의 눈빛은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듯 간절해 보였다.
“단태입니다.”
“……단태 님, 고맙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운미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그나저나, 이 사람을 어쩌지?”
유천주에게 맡겼다가는 물뱀이나 악어에게 던져 주고 말 텐데.
단태는 고민에 빠졌다.
*가능성
“그러니까 공자님……이 그 유명한 마둔수탑의 종자장이라는 말씀이에요?”
잘 익힌 금룡어를 허겁지겁 뜯어먹던 운미는 동그란 눈으로 단태를 쳐다봤다.
“종자장이었지요. 지금은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테니까요.”
단태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지만, 왠지 모를 서운함을 숨기기 어려웠다. 탑의 운영 방식으로 볼 때, 종자장은 비워 둘 수 없는 자리였다. 그러니 절차에 따라 새로운 종자장을 세우는 건 지극히 당연한 결정인데, 왜 이리 속이 쓰릴까?
단태는 인내심을 발휘하여 운미가 허기와 정신적 충격에서 벗어날 때까지 기다렸다. 단태가 원하는 건, 소식이었다. 유천주가 난동을 피운 이후 물의 도시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궁금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눈앞에 그 소식을 알려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단태는 재촉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운미가 팔뚝만 한 금룡어를 뼈만 남기고 게걸스레 먹어 치우자, 단태는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위쪽은 어떻습니까?”
운미는 단태를 눈여겨보았지만 곧 단태가 원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여덟 번째 천마가 등장했다는 사실, 그 천마가 바로 륜사라는 사실에 단태는 깜짝 놀랐다. 유천주가 무너뜨린 시청 건물의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라는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