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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태가 륜사와 가까운 사이라는 사실을 아는 운미는 주워들은 소문을 시시콜콜 단태에게 들려주었다. 그중에는 륜사가 유천주를 죽여서 없앴다는 허황된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단태는 즐겁게 운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누구나 자신이야말로 세상의 중심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간다. 단태 역시 그런 사람이었다. 그 때문인지, 유천주 때문에 피해를 입었지만 물의 도시가 별 문제 없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리 달갑지 않았다. 한 사람이 사라져도 세상은 잘 돌아간다는 평범한 진리는 환영할 만한 진실은 아니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단태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운미가 질문을 던졌다.
“공자님, 여기는 어디예요?”
“…….”
단태는 말문이 막혔다. 빚 때문에 노예로 팔렸다가 용신전의 제물 신세가 된 이 여자에게 그동안의 일을 설명할 수 있을까? 설명한다고 해도 이해할 수 있을까?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절 팔아 버린 부모님은 밉지만, 돌봐야 할 동생들이 거기 있으니까요.”
한숨을 내쉰 단태는 진실을 들려주기 위해 입을 열었다.
천진난만한 미소로 단태를 쳐다보던 운미의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천장에 박힌 신비로운 돌이 빛을 밝히는 이곳이 수룡 유천주의 용혈이라는 사실에 운미의 눈이 흔들렸다.
“……농담이죠?”
“…….”
“그렇죠?”
“설고!”
단태가 부르자, 천장 너머 통로에서 기다리던 설고가 벽을 타고 내려와 단태 옆으로 다가왔다.
설고를 본 운미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는데, 발이 꼬여 넘어지고 말았다.
그 날카로운 소리에 단태는 눈살을 찌푸렸다. 여자 특유의 고음이 귀로 파고들자 두통이 찾아왔다. 강화된 감각의 부작용이었다. 단태는 버둥거리며 벽까지 물러선 운미를 쳐다보며 가만히 있었다. 흥분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다.
비명이 줄어들자, 단태는 천천히 다가갔다.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진실을 알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어요. 설고, 와서 인사드려. 이쪽은 운미야.”
하얀 거미가 다가오자 운미는 또 고함을 질러 댔다.
“안녕하세요. 설고라고 해요.”
비명이 뚝 끊겼다.
운미는 자신도 모르게 설고를 쳐다봤다. 입술이 씰룩거렸다.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질러야 한다는 본능과 어떻게 거미가 말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호기심이 마음속에서 충돌하고 있었다.
단태는 운미를 위하여 설고의 단단한 다리에 손을 올렸다.
“설고는 아주 착한 거미예요.”
“료마주 님의 말씀이 옳아요.”
설고가 말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운미가 그 고요를 깨뜨렸다.
“……정말 여기가 수룡 유천주가 있는 곳이에요?”
단태는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멍하게 단태를 쳐다보던 운미는 무릎 사이에 얼굴을 처박고 울음을 터트렸다. 듣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로 그녀는 서럽게 울었다. 금세 그칠 울음이 아니었다.
단태는 운미를 용옥간에 내버려 두고 밖으로 나왔다. 처음 유천주에게 붙잡혀 용혈로 들어섰던 순간이 떠올랐다. 세상이 다 끝난 기분이었지만, 희망을 놓지는 않았었다. 엄마와 설희 때문이었다. 저 여자도 아끼는 동생들 때문에라도 기운을 차릴 터였다. 그 후에야 정상적인 대화가 가능할 것이다.
용혈은 거대한 집이었다.
크게 구분한다면 유천주가 본체로 쉬는 거대한 공간 ‘대혈’, 금룡어 등 다양한 물고기가 서식하는 ‘어혈’, 수초 등이 자라는 ‘초혈’이 지하 1층이었다. 그 아래로 유천주가 인간의 몸으로 지내는 ‘주혈’, 용옥을 보관하는 ‘용옥간’, 마법과 관련된 물품으로 가득한 ‘마간’, 검과 방패 등을 수집한 ‘무간’, 온갖 종류의 책으로 그득한 ‘서간’, 눈이 휘둥그레지는 보물로 채워진 ‘보간’, 조각품과 그림 등 예술품을 모아 놓은 ‘예간’은 지하 2층에 해당하는 공간이었다. 지하 3층에는 거미들이 거주하는 ‘소혈’, 황금의 방이라 불리는 ‘금혈’, 마력석이 보관된 ‘마혈’이 있고, 그 아래 지하 4층에는 용족 특유의 이동 마법진이 설치된 ‘동혈’이 자리 잡고 있었다.
대혈과 용옥간만 출입이 가능한 단태는 산책하듯 용혈 곳곳을 돌아다녔는데, 일단 문이 닫히면 복도의 벽과 출입문이 구분하기 어려워 어디에 무슨 방이 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대혈로 올라간 그는 커다란 웅덩이 앞에 섰다.
“이곳을 떠나고 싶은 게냐?”
뒤에서 들린 소리에 몸을 돌린 단태는 흰 수염을 가슴 언저리까지 기른 노인을 발견했다. 광기 어린 눈이 반짝거렸다. 나이가 들수록 인자하고 부드러워지는 인간과 달리, 유천주는 여전히 날카롭고 예리한 존재였다.
“언젠가는 독립해야 하니까요.”
“독립? 앞으로 백 년은 배워야 가능할 게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그랬겠지요.”
단태는 용옥을 통하여 잠룡이 명룡의 책임하에 용족 특유의 사고방식을 배우는 기간이 대략 백 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또한 저주로 인해 그 기간이 단축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 또한 잘 알았다.
“따라오너라.”
단태는 군말 없이 유천주를 따라갔다.
대혈로 올라오면서 봤던 벽에 유천주가 손을 대자, 벽의 일부가 갈라지며 좌우로 열렸다. 그 두꺼운 벽 너머에 숨겨진 공간이 나타났다. 유천주가 인간의 몸으로 지내는 공간, 주혈이었다.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운 탁자, 의자, 서랍 등이 졸졸 맑은 소리를 내며 흐르는 조그만 시냇물 옆에 배치되어 있었고, 그 근처에는 향이 좋은 푸른 빛깔의 꽃이 실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아!”
단태는 탄성을 터트렸다.
“어떠냐?”
“끝내주는데요.”
단태는 진심을 담아서 말했다.
단태가 용옥을 통하여 경험한 용족 대부분은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용은 황금이라면 사족을 못 쓴다고 알려졌으나 용의 마음을 사로잡는 건, 미적 감각을 갖춘 예술 작품이었다. 귀에서 시작하여 턱과 목을 거쳐 어깨에서 끝나는 그 우아한 선이 담긴 여인의 조각상 하나를 구하기 위하여 그 조각상보다도 무거운 황금을 값으로 치른 용도 있었다. 물론 대놓고 협박하여 빼앗은 용도 있지만.
벽을 파서 만든 공간에 자리 잡은 작품은 하나같이 걸작이었다. 날개 달린 여인은 살아나서 손에 쥔 검을 휘두를 것만 같았고, 군마에 올라탄 남자는 당장이라도 소리를 지르며 돌진할 것 같았다. 위대한 작품만이 지니는 그 압도적인 분위기에 단태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유천주를 따라가며 반쯤 넋을 잃고 지켜볼 뿐이었다.
원형의 공간이 나타났다. 그 공간을 둘러싼 벽에도 촘촘히 조각상이 자리 잡고 있었다.
유천주는 원형의 공터 중앙에 섰고, 단태는 그를 마주 보았다.
“오늘부터 너는 용즉계를 익힌다.”
“용즉계?”
처음 듣는 말이었다.
“원래는 기본적인 내용을 습득한 이후에 배우는 기술인데, 네 말처럼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니 앞당기는 수밖에 없지. 안 그러냐?”
“…….”
왠지 모르게 불안했다. 그러고 보니, 이 분위기 낯설지 않다. 어디선가 보았고, 또한 경험했다. 그래! 백화룡 시화원주의 용옥에 들어갔을 때와 같았다!
“용즉계는 교감 마법이다. 심장의 마력을 이용하여 물, 불, 땅, 나무, 금속 등 다양한 물질과의 교감을 이루는 것이지. 자, 시작하자꾸나.”
말을 끝낸 유천주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다가왔지만, 단태 역시 재빠르게 옆으로 피해 버렸다. 감각과 더불어 신체 역시 강화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천주가 휘두른 물의 채찍이 발목을 휘감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단태는 공중으로 끌려 올라갔고, 거꾸로 매달린 채 비웃는 유천주를 볼 수밖에 없었다.
유천주는 손목을 살짝 꺾어 단태를 던져 버렸다.
원형의 공간을 에워싼 마법의 막에 부딪혀 바닥에 떨어진 단태는 신음을 흘렸지만, 일어서는 동시에 그 역시 물의 채찍을 만들어 유천주의 허리를 휘감았다. 그러나 아무리 힘을 줘도 유천주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유천주가 그 물의 채찍을 잡아서 흔들자, 단태는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흔들리다 구석에 처박히고 말았다.
“오호, 물을 다룰 수 있단 말이지? 그렇다면 봐줄 필요가 없겠구먼.”
터진 입술을 손등으로 훔치며 일어선 단태는 속으로 생각했다. 처음부터 봐줄 생각 따윈 없었으면서.
유천주의 양손에서 불이 타올랐다. 시퍼런 불꽃이었다. 닿기만 해도 살갗이 타버릴 열기가 고스란히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