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131화 (131/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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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태는 물로 방패를 만들어 냈다.

사각형 방패 너머로 보이는 불꽃은 점점 커져 검의 형태로 변했다. 유천주가 다가오자 단태는 방패를 앞으로 내밀었다. 불꽃의 검에 닿은 물의 방패는…… 쉬쉬 소리를 내며 수증기로 증발했고, 그 시퍼런 검은 간단히 단태의 배를 스치며 지나갔다. 뜨거운 채찍에 맞은 것처럼 배에 검붉은 자국이 남았지만, 그 고통에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유천주는 빨랐다.

강화된 눈으로도 좇기 힘들 만큼이나 빨랐다.

단태는 오감을 총동원하여 피했다.

물이 불을 끌 수 있다지만, 저 시퍼런 불꽃 앞에서 물의 방패는 무용지물이었다. 도망치는 수밖에 없는데, 마법의 막으로 둘러싸인 원형의 공간 밖으로 나갈 방법이 없었다. 시퍼런 검에 스치기만 해도 머리카락이 타 버렸고, 어깨와 허벅지 등에 검붉은 자국이 남았다. 죽겠다고 말해도 유천주는 전혀 망설이지 않고 불꽃의 검을 휘둘렀다.

마치 죽이려는 것처럼.

정신을 집중하여 만들어 낸 두 겹의 방패도 그 시퍼런 불꽃을 막지 못했다.

불꽃의 검이 옆구리로 다가와 그 열기를 느낀 순간, 단태는 반사적으로 바람의 갑옷을 만들어 냈다. 윙윙 소리를 내며 나타난 바람의 갑옷은 그 맹렬한 회전력으로 불꽃의 검을 밖으로 밀어냈다. 유천주의 눈이 반짝거렸다.

“풍갑이라니, 오늘 너는 나를 두 번이나 놀라게 하는구나.”

“…….”

단태는 대답할 여유도 없었다. 유천주가 불꽃을 검이 아니라 망치 형태로 바꾸어 풍갑을 쉴 새 없이 내리쳤기 때문이다.

유천주는 빨랐고, 지치는 법이 없었다. 노련한 대장장이도 혀를 내두를 만큼 정확한 동작으로 불의 망치를 휘둘렀고, 결국 바람의 갑옷은 깨지고 말았다.

“수고했다.”

그렇게 말한 유천주가 불꽃의 망치를 휘두르자, 단태는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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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태는 힘겹게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걱정스러운 표정의 운미가 보였다.

그 뒤에 있는 설고도.

서서히 기억이 돌아왔다.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는 용족 특유의 기억력조차 흔들릴 만큼 충격이 컸던 모양이다. 일방적으로 당하고 말았다. 몸 곳곳에서 느껴지는 고통보다도 유천주에게 반격 한번 못 해 보고 당한 게 억울했다.

유천주는 강했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이나 강했다.

몸을 일으키는데 신음이 흘러나왔다.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팠고, 목과 옆구리 등 안 아픈 곳이 없었다.

운미가 금룡어 눈알이 가득 쌓인 그릇을 내밀었다. 단태가 가만히 있자, 손가락으로 눈알 하나를 집어 올려 단태의 입에 넣어 주었다. 겨우 입을 벌린 단태는 그 비릿하면서도 시원한 느낌을 주는 금룡어 눈알을 목구멍 너머로 밀어 넣었다. 숨을 헐떡이면서.

눈알 두 개를 겨우 먹은 단태는 다시 누웠고, 곧 눈을 감았다.

머릿속으로 그 장면이 떠올랐다. 그때는 몰랐던 사실이 보였다. 유천주의 얼굴, 표정이었다. 유천주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마치 장난치듯 단태를 갖고 놀았다. 그런 유천주를 상대로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최선을 다했으나 결국 놀림감이 되고 말았다.

오랜만에 두려움이 몰려왔다. 마음만으로 물리치기 어려운 감정이었다. 유천주가 당장이라도 나타나서 따라오라고 말한다면, 몸은 저절로 움츠려 들고 말 것이다.

“어떠냐?”

힘이 빠진 남자의 목소리였다.

눈을 뜬 단태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노인의 모습으로 유천주가 서 있었다. 운미와 설고가 옆으로 비끼자, 유천주는 단태 앞에 앉더니 가슴에 손을 올렸다. 거기서 시작된 따뜻한 흐름이 몸 전체로 퍼져 나가며 치료가 시작되었다.

“어떻게 내가 널 이겼을까?”

유천주가 물었다.

“……저보다 강하니까요.”

“왜 너보다 강하지? 난 노인의 몸을 가지고 있는데. 설마 이 가느다란 팔에서 나오는 힘으로 널 이겼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유천주는 소매를 걷어서 살이 거의 없어 마른가지처럼 보이는 팔을 드러냈다.

“…….”

단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용은 마력의 종족이다. 인간은 마력석을 의지하여 마법을 펼치지만, 용은 아니야. 내가 너보다 강한 이유는 단 하나, 너보다 마력을 잘 다루기 때문이다. 마력의 흐름에 집중해라. 동작 하나하나를 마력의 흐름과 일치시켜라. 네 호흡, 사소한 동작에도 마력을 이용하거라. 그러면 네 몸 자체가, 동작 자체가 달라질 것이다.”

“……네.”

단태는 유천주에게서 전해지는 진지함을 느낄 수 있었다.

유천주는 생각보다 상태가 좋다면서 금방 가 버렸다.

대체 얼마나 심하게 다쳐야 상태가 좋지 않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기분이 확 나빠졌지만, 단태는 왠지 유천주가 일부러 그런 말을 하는 것 같았다. 혹시 걱정하면서도 그런 내색을 드러내지 않으려 한 게 아닐까?

‘그럴 리는 없어.’

단태는 다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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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개의 벽감에 놓인 열두 개의 대리석 조각상은 원형의 공터를 둘러싸고 있었다. 시간이 멈춰 버린 듯 움직이지 않는 바깥쪽과 달리 푸르스름한 마법의 막 안쪽은 눈으로 좇기 힘든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물로 만든 대검을 빠르게 찔러 넣은 단태는 뒤로 물러나며 바람의 방패를 들어 올렸다. 유천주가 휘두른 화염의 채찍이 맹렬하게 회전하는 바람의 방패를 에워쌌다가 강력한 원심력을 이기지 못하고 가닥가닥 끊어지며 흩어졌다.

“제법인데.”

젊은 여자의 모습을 취한 유천주가 말했다.

단태는 붉은 옷 사이로 드러난 가슴골을 보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요즘 저런 가슴을 보면 얼굴이 화끈거릴 때가 많았다.

“……바람의 회전 속도를 순간적으로 높이는 법을 알아냈거든요.”

“그래?”

요염하게 웃은 유천주가 사라졌다.

단태는 즉시 바람의 갑옷, 즉 풍갑을 몸에 둘렀다. 윙윙 바람 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단태는 몸을 이리저리 돌려 유천주를 찾았으나 가끔 인기척만 느껴질 뿐 정확한 위치를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강화된 감각으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시꺼먼 나무뿌리가 바닥을 뚫고 올라와 발목을 감았다. 잡아당기는 막강한 힘에 몸이 흔들려 집중력을 잃자 풍갑은 사라졌다. 단태는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려 땅 위로 올라오는 유천주와 빠르게 평평해지는 바닥을 볼 수 있었다. 공터의 바닥은 마치 파헤쳐진 적이 없는 것처럼 깔끔하게 회복되었다. 유천주의 오른쪽 다리 일부가 나무가 되어 뿌리와 연결되어 있었다.

“어때?”

“……땅속은 상상도 못 했어요.”

단태는 그렇게 말하며 바람의 칼로 뿌리를 자르려 했는데, 발목으로 마력이 빠져나갔다. 끌어 올린 마력은 모조리 그 뿌리를 통하여 사라졌다.

“얕은 수는 통하지 않아.”

뿌리는 막을 향해 단태를 던졌다.

몸을 웅크릴 시간도 없이 막에 부딪힌 단태는 바닥에 떨어졌다. 등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에 신음을 흘리며 겨우 몸을 일으킨 단태는 다시 텅 빈 공간을 발견했다. 유천주, 다시 땅 아래로 숨어 버린 것이다.

단태는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살피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차피 공격의 방향은 정해져 있다. 빠르게 움직이면 다시 당할 이는 없…… 그 생각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두 개의 뿌리가 동시에 튀어나와 단태의 발목을 노렸다.

단태는 위로 몸을 솟구쳐 뿌리 공격을 피했지만 또 다른 뿌리가 이미 단태를 기다리고 있었다. 네 개의 뿌리가 팔다리를 꽉 잡았고, 단태는 능지처참 직전의 사형수처럼 공중에 매달려 있었다. 저 미치광이 용이 행여 딴생각이라도 품는다면 팔다리가 찢어질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몰려왔다. 단태의 생각을 아는지 유천주는 씨익 웃으며 다가와 단태를 올려다봤다.

“능지처참이라는 형벌이 있다면서?”

“…….”

단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참 이상해. 인간 말이야. 왜 그런 식으로 잔인하게 동족을 죽일까?”

유천주가 하얗고 기다란 손가락을 까딱거리자 잡아당기는 뿌리의 힘이 커졌고, 단태는 팔다리가 떨어져 나갈 것처럼 아팠다. 그래도 비명은 지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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