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132화 (132/293)

<-- 132 회: 4-9 -->

뿌리의 힘이 풀리자, 단태는 바닥에 떨어졌다.

좀처럼 몸을 일으키지 못하는 단태 앞으로 유천주가 다가와 허리를 굽혔다. 굴욕적인 독설을 예상했던 단태는 유천주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얼마나 거창한 비난을 퍼부으려고 골똘히 생각하고 있을까?

‘어?’

어딘지 이상했다.

자세히 봤더니, 동공이 풀려 있었다. 피부도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창백했고, 손가락 끝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괜찮습니까?”

“나, 나를 예, 예……간으로 데려가라. 당……장…….”

입술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아 짧은 말을 하는데도 시간이 꽤 걸렸다.

“예간으로 말이에요?”

“……어서!”

크지 않은 목소리에 깃든 다급함에 놀란 단태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유천주를 업었다. 아니, 업으려 했으나 불가능했다. 몸이 석상처럼 딱딱했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두 팔로 인형 안 듯 유천주를 안아서 들어 올린 단태는 주혈을 벗어나 복도로 나왔다.

맡은 임무에 충실하느라 평소 어디 있는지 볼 수 없는 거미들이 복도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유천주가 나타나기만 해도 공포에 질려 달아나기 바빴던 거미들이 아니었다.

단태는 유천주를 안고서 예간이 있는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는데, 지켜보던 거미들이 조금씩 다가오기 시작했다. 단태가 빨리 걷자 거미들도 빨라졌다. 단태는 아예 달렸다. 있는 힘껏. 뒤쪽에서 탁탁탁 발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거미들이 이렇게나 빨리 달릴 수 있는지 처음 알았지만, 차마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벽과 천장을 타고 내려온 거미 두 마리가 동시에 단태를 향해 달려들었다. 유천주를 안고 있던 단태로서는 피할 수밖에 없는데, 그랬다가는 쫓아오는 거미들에게 잡히고 말 터였다.

그때, 설고가 동족을 향해 독액을 내뱉었다.

허연 침 같은 액체가 묻자 거기서 연기가 피어올랐고, 거미들은 고통스러워하다가 축 늘어졌다. 설고가 단태 앞에 서자 쫓아오던 거미들은 더 이상 다가오지 않았다. 그러나 몰려드는 거미의 수는 오히려 늘고 있었다. 수백 마리, 어쩌면 수천 마리의 거미가 이곳으로 몰려오는지도 모른다.

“……충동을 참기가 어려워요, 료마주 님. 그러니까 어서 안전한 곳으로 가세요.”

“충동이라니?”

“빨리요!”

단태는 유천주를 안은 채 예간이 있는 곳으로 달렸다. 뒤는 돌아보지 않았다. 설고를 향해 질문을 던진 순간, 그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달았던 것이다.

저주 때문이었다.

용족을 파멸로 몰고 간 저주가 유천주를 삼켰다. 그로 인해 유천주의 지배를 받던 거미들이 본성, 즉 야성을 되찾아 오랫동안 주인으로 모셨던 유천주를 죽이기 위해 모여든 것이다. 유천주로부터 특별한 능력을 선물로 받았던 설고조차 그 충동을 이기기 어렵다고 했다. 예간 앞에 선 단태는 유천주가 이렇게 죽어 버린다면 용혈은 거미의 세상이 되고 말 거라고 생각했다.

유천주의 존재를 인식한 예간의 문은 저절로 열렸다. 단태가 유천주를 안고서 예간 안으로 들어서자 문이 닫혔는데, 곧 단단한 갈고리 같은 거미들의 다리가 문을 긁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문이 쾅 닫힌 후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단태는 유천주를 바닥에 내려놓고 몸을 살폈다. 손목에 손가락을 얹어 맥박을 지켜봤는데, 느리면서도 힘이 있어 걱정해야 하는지, 괜찮은 상태인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이마는 차가운 편이지만 온기 역시 남아 있었다.

“……어쩌지?”

순간, 단태는 저 바깥 어딘가에 있을 운미를 떠올렸다. 광분한 거미들에게 잡혔다면 살아남기 어려울 텐데.

“수고했다.”

차분한 목소리.

몸을 돌린 단태는 눈을 뜬 유천주를 발견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알고 있을 텐데.”

천천히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키는 유천주.

“저주 때문입니까?”

“시간이 없다. 다시 주혈로 가서 수련을 시작한다.”

유천주는 단태가 뭐라고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예간의 문을 열었다. 밖에는 수백 마리의 거미가 복도를 가득 채우고 있었지만,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젊은 여자의 모습을 한 유천주가 복도로 저벅저벅 걸어 나가자 거미들은 공포에 질려 떨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거미들은 잠시 정신착란에 빠져 미친 짓을 저질렀다가 정신을 차린 사람처럼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금세 복도는 텅 비었다.

“따라와.”

“……네.”

단태는 당신에겐 휴식이 필요하다는 말을 내뱉고 싶었지만, 저 오만한 존재가 들을 리가 없다는 사실 또한 잘 알았다. 최근 들어 무섭게 몰아치는 이유는 바로 저주 때문이었다. 저주로 인해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면 누구나 저 유천주처럼 조급해질 것이다.

“만약 내게 문제가 생긴다면 예간으로 가라. 잊지 마라. 저 거미 놈들에게서 날 구하는 것보다 예간이 더 중요하다.”

유천주는 앞을 응시하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주혈의 그 공터로 돌아간 유천주는 단태가 정신을 잃을 때까지 끊임없이 몰아붙였다. 기절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깨워서 수련을 거듭했다. 단태 또한 그 이유를 알기에 죽을힘을 다해 버티며 유천주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

심장이 하나뿐이라서 바람과 물 외의 성질을 지닌 마력을 다룰 수 없는 단태는 수백 번의 수업이 진행된 후에야 물과 바람에 대한 친화력을 높여 약점을 보완했고, 그 단계를 통과한 이후로는 유천주의 공격에 맥없이 당하는 횟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용즉계의 경지 중 용즉수와 용즉풍을 단태가 몸으로 익힌 것이다. 노인의 몸을 취한 유천주도 단태의 방어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만.”

유천주는 처음으로 단태가 기절하지 않은 상태에서 수업을 끝냈다. 공터를 둘러싼 마법의 막이 사라졌다.

“휴우, 하마터면 지쳐서 쓰러질 뻔했습니다.”

“너스레 떨지 마라. 내가 약해진 이유도 있지만, 넌 충분히 강해졌으니까.”

“감사합니다.”

단태는 속으로 안도했다. 유천주가 더 힘껏 몰아붙였다면 항복, 포기를 선언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면 유천주는 비웃음 가득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며 나약하다느니, 의지박약이라느니 비난을 퍼부을 것이다.

“그래도 시간이 부족해.”

“…….”

단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천주가 일찍 죽는다면 이곳을 일찍 벗어난다는 뜻이므로 기뻐해야 하는데, 왠지 저주로 인해 약해지는 유천주를 쳐다보면서 그런 감정에 취하고 싶지는 않았다. 마치 부유한 노인을 속여 돈을 빼앗는 사기꾼이 된 것만 같았다.

“손을 내밀어라.”

“네?”

“두 번 말하고 싶지 않구나.”

“……알겠습니다.”

단태는 미심쩍어하면서도 유천주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유천주는 손바닥을 유심히 살피더니, 눈을 감았다. 곧 유천주의 몸에서 흘러나온 푸른 빛깔의 가루가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단태의 손바닥 위로 자리를 잡았다. 물방울 세 개가 기이한 각도와 형태로 맞붙어 있는 문양인데, 손바닥 중앙에 빛나는 문신처럼 새겨졌다.

그런데도 전혀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오늘부터 넌 용혈에 존재하는 방 모두에 출입이 가능하다. 한동안 나는 몸을 다스리기 위해 시간을 보내야 하니, 넌 오랫동안 용족이 모아 놓은 인간족의 유산을 통하여 지혜를 길러라. 만약 거미들이 그때처럼 행동한다면…… 넌 나를 찾지 말고 예간으로 가거라. 그러면 된다. 알겠느냐?”

“……네.”

단태는 왜 계속 예간으로 가라고 하는지 묻고 싶지만,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이제 가거라.”

“……고맙습니다.”

망설이던 단태가 말했다. 비록 유천주가 강제로 이곳으로 끌고 왔지만, 마지막 용으로서 죽어 가는 유천주에게 고맙다는 말 한마디는 해야 할 것 같았다.

“나중에 보자.”

가볍게 웃는 유천주는 처음으로 노인 특유의 담백하면서도 처량한 분위기를 풍겼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