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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도 보지 못한 할아버지의 마지막, 즉 임종을 지켜보는 것처럼 단태는 마음이 아팠다. 광기를 지닌 존재, 인간의 입장에서는 사악하기 짝이 없는 존재지만, 용옥을 통하여 용족의 사고방식을 누구보다 잘 아는 단태가 보기에 유천주는 괜찮은 용이었다. 유천주는 인간을 괴롭히는 악취미를 가진 용이 아니었다.
복도로 나온 단태는 닫힌 문을 쳐다봤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데, 좀 더 따뜻한 말이라도 남길걸. 후회가 몰려왔다. 한편으로는 기뻤다. 드디어 감옥 같은 이 지하 구덩이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었다.
자신의 마음을 단태는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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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이 쩍 벌어졌다.
엄청난 양의 책이 벽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마법서를 죄다 가져와 이 거대한 공간을 채운 것 같았다. 마둔수탑의 지하 서고가 조그만 골방이라면 눈앞에 펼쳐진 마간은 거대한 책의 도시였다.
책 특유의 냄새를 맡으며 안쪽 끝까지 걸어간 단태는 탕무 신국 당시에 만들어진 책을 발견했다. 양피지 재질의 책은 두툼했다. 책이 부서지지 않을까 염려하면서 책장을 넘겼는데, 기이한 문자가 눈에 들어왔다. 고대문자는 낯설었다. 글은 읽기 어려웠지만 책 곳곳에 자리 잡은 화려한 그림 덕분에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알 수 있었다.
놀랍게도 당시 마법사는 신전에 의해 사악한 무리로 단죄되었고 정체가 드러나면 쫓기다 결국 붙잡혀 불구덩이에 던져지는 신세였다. 단태는 한참이나 그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지만 인기척을 놓칠 정도로 몰입하지는 않았다. 언제 어디서 또 그 일이 벌어질지 몰라서였다.
단태는 몸을 돌렸다. 일부러 열어 둔 문을 통해 하얀 거미가 마간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오랜만이야.”
“……료마주 님.”
“너 아니었으면 위험했을 거야. 고마워.”
“그 끈질긴 충동을 겨우 참았어요. 기적이었어요. 다시 그 거칠고 강렬한 충동이 찾아오면 이겨 낼 자신이 없어요.”
단태는 가만히 설고를 쳐다봤다.
뭐라고 말을 해서 확신을 주고 싶은데 방법이 없었다. 유천주와의 계약이 설고를, 이곳 용혈에 존재하는 거미들을 사로잡고 있었다. 저주로 인해 그 계약이 깨진다면 거미들은 야성이라는 자유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런 상태를 원치 않는 설고마저도.
“부탁드려요. 제발 저주를 풀어 주세요.”
설고는 간절했다.
“……알았어.”
차마 설고에게 저주는 용족 전체가 해결 못한 문제라고 말할 수 없었다.
혼자 마간에 남은 단태는 정신을 잃은 유천주를 안고 복도로 나왔을 때 봤던 그 조용하고 서늘한 거미들의 시선을 떠올렸다. 등골이 오싹해지는 차갑고 무시무시한 눈빛이었다.
평소 그는 유천주와 거미와의 관계를 주인과 노예의 관계로 파악했었다. 그 관점이 옳다면 저주로 인해 야성을 되찾은 거미들은 자유를 찾은 노예와 다를 바 없다. 명국영 덕분에 자유를 찾았던 단태는 누구보다 그 심정을 잘 알았다.
그런데 설고는 그 자유를 거부했다. 아니, 설고에게 그 자유는 자유가 아니었다. 오히려 저주이며, 재앙이었다. 유천주를 통하여, 또한 스스로 노력해서 종족의 한계를 돌파한 설고에게 그 자유는 추락이며, 절망이었다.
자연스레 질문이 떠올랐다.
진정한 자유는 무엇일까?
그저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는 권리일까?
그때 단태는 거미들이 자유를 되찾은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새로운 관점을 찾아냈다. 유천주에게 지배당했던 거미들은 용족을 괴롭히는 저주로 인해 계약이 흔들리는 바람에 자유를 되찾았지만, 그건 진정한 자유가 아니었다.
유천주 대신 본능이라는 또 다른 주인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다. 설고가 언급한 그 강렬한 충동은 본능이라는 주인이 내린 명령이었다. 설고는 본능이라는 주인에게서 해방되고 싶었던 것이다.
본능은 정체가 모호한 자연의 법칙이었다. 약육강식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는 본능은 고양이가 생쥐를 뒤쫓아 잡아먹게 하고, 사람이 사냥으로 고기를 확보할 수 있게 하며, 극단적으로 부유하고 강한 자가 그렇지 않은 자를 노예로 삼게 한다.
따지고 보면 노예제도는 자연이 부과한 본능을 철저히 따르는 사회적 관습이었다. 자연은 서로 다른 노예제도의 중첩으로 가득한 세계였다. 수초를 뜯어 먹는 조그만 물고기는 그보다 더 큰 물고기에게 잡혀 먹고, 그 큰 물고기는 악어에게 먹힌다.
이런 관계가 사슬처럼 연결된 게 자연이 아닌가. 따라서 노예제도를 부정하려면 본능을 부정해야 하고, 그 본능의 원천인 자연마저 부정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하족과의 계약은 그 본능을, 자연적 관계를 뛰어넘는 기이한 징검다리였다. 설고는 자연이 설정한 노예제도를 벗어날 수 있다는 증거였다. 비록 강압적이며 착취적인 방식이지만.
세계에 대한 의구심이 머릿속에서 천천히 떠올랐다. 누가, 왜 이런 관계를 정했을까? 왜 세상에 인간이 존재할까? 왜 용은 인간보다 강하고 명석할까? 왜 거미는 저런 식으로밖에 살지 못할까? 왜 세계는 이런 식으로밖에 돌아가지 않을까? 다른 가능성은 없을까?
가능성!
울림이 있는 단어였다. 마치 소라 껍데기에 귀를 대면 바다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는 것처럼, 가능성이라는 단어는 자유의 향기를 강렬하게 풍기고 있었다.
가능성이 곧 자유다.
다양한 가능성이 곧 진정한 자유다.
설고는 거미라는 종족에게 또 다른 가능성이 있다는 실질적인 증거였다. 비록 거미들은 설고가 품은 가능성을 알아보기 힘들겠지만, 오히려 이질적인 설고를 공격하여 죽일 수도 있을 테지만.
자연은 엄격한 법처럼 생물과 사물의 관계를 고정시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능성의 문은 여전히 존재한다. 딱 맞는 열쇠를 찾아야 하고, 무거운 문을 열어젖히기 위해 적지 않은 피를 뿌려야 할지도 모르지만, 문이 열릴 가능성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바뀔 수도 있으리라.
순간, 놓쳤던 진실을 깨달았다.
단태는 빙긋 웃었다.
자연은 쇠사슬과 창살 같은 엄격한 노예제도를 세상에 부여함과 동시에 변화의 가능성을 살며시 숨겨 놓았다. 마치 누군가 찾으라고 보물을 숨겨 둔 것처럼. 이런 생각을 지지할 만한 근거는 없었다. 그저 자연은 자식이 스스로 가치 있는 그 보물을 찾아내어 성장하기를 바라는 부모 같은 무엇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찾아내야지.”
기지개를 켠 단태는 머릿속 생각을 정리한 다음, 가까운 곳에 있는 책을 집어 들었다.
유천주가 저주 때문에 칩거를 선택한 이상, 여기 있는 책이야말로 지혜를 얻을 수 있는 최선의 수단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한계를 뛰어넘기 좋아하는 마법사들이 평생에 걸쳐 고군분투한 내용을 들여다본다면 어딘가에서 예상치 못한 보물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니 힘이 솟구쳤다.
한참 동안 책에 푹 빠졌던 단태는 인기척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쟁반에 수초와 금룡어 눈알을 담아 온 운미를 발견했다. 설고가 조치를 취한 덕분에 운미는 그 난동에도 다치지 않았었다.
“고마워요.”
“……유천주에게 문제가 생긴 거 맞지?”
쟁반을 내려놓고 주위를 둘러본 후에야 운미가 신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수룡 유천주의 용혈로 잡혀 왔다는 충격에서 벗어나자 운미는 하층민 특유의 끈질기고 억척같은 분위기를 되찾았다. 단태에게 나이를 물어본 그녀는 자기가 누나임을 은연중 드러내고 있었다.
“아마도요.”
단태는 운미가 마간 밖으로 나가 주기를 바랐으나, 운미는 일부러 그런 시선을 모른 척했다.
“지금이 기회야.”
누가 들을까 봐 한껏 목소리를 낮춘 운미.
“기회라니요?”
단태는 책에서 눈을 떼고 운미를 쳐다봤다. 운미의 눈에 깃든 묘한 열기가 낯설게 느껴졌다.
“모르겠어?”
답답해하는 운미.
“속 시원하게 말해 봐요.”
“지금이야말로 유천주를 죽일 절호의 기회란 말이야.”
“…….”
단태는 속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다.
“모든 것을 다 바꿀 수 있어. 그 용을 죽이기만 하면. 넌 도시를 구한 영웅이 될 거야. 훌륭한 마법사들도 어쩌지 못한 용을 죽였으니 모두가 널 우러러볼 거야.”
“나는…… 잘 모르겠어요.”
그런 생각까지 해 본 적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