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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고 싶지 않아?”
“…….”
운미의 제안은 지극히 정상적이며, 그녀의 입장에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럼에도 단태는 이유를 알기 힘든 저항감이 마음 안쪽에 있음을 알아차렸다. 왜 이 계획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할까?
곧 그 이유 중 하나를 찾아냈다. 설고 때문이었다. 유천주를 죽이면 설고는 그 본능에 휩싸여 자신을 잃고 말 터였다.
“네가 가만히 있어도 난 할 거야.”
“실패하면 죽어요.”
“난 이미 죽었어. 넌 아닐지도 모르지만.”
슬픈 눈으로 단태를 쳐다본 운미는 마간 밖으로 나갔다.
*아레마고의 계승자
힘겹게 언덕 꼭대기에 이르자, 흘러내리는 땀을 날려 버릴 만큼 시원한 바람이 명국영을 에워쌌다. 지팡이를 짚은 채 아름드리나무 그늘 아래에 선 그는 이제 막 모습을 드러낸 물의 도시를 쳐다보았다. 곧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호수 위에 세워진 듯한 유타루체의 아름다움 때문이었다.
“역시…….”
3년 만이었다.
명국영은 소맷자락으로 땀과 함께 섞인 눈물을 닦아 냈다. 도망치듯 저 도시를 떠난 지 3년 만에 돌아왔건만, 그날의 충격은 그대로였다. 다만, 무너졌던 중앙의 시청과 첨탑은 예전처럼…… 어쩌면 과거보다 더 웅장하고 예리하게 느껴졌다.
짐을 가득 실은 마차들이 줄지어 유타루체로 움직이고 있었다. 먼지를 일으키면서.
명국영은 마부석에서 마차를 몰거나 마차 옆에서 걸어가는 사람들의 표정을 통하여 물의 도시가 과거의 명성을 되찾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수룡 유천주의 습격 이후로 한동안 유타루체의 인구는 큰 폭으로 줄어들었다.
노예, 아이, 여자를 제외하고도 25만 명에 달하던 인구가 반년 만에 19만 명으로 줄었는데, 대부분 수룡이 또다시 도시로 날아와 난동을 부리지 않을까 걱정한 귀족, 대상인 등 상류층과 거기 딸린 노예들이었다.
유타루체에서 그리 멀지 않은 별장으로 옮겨 갈 수 있었던 그들과 달리, 하층민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서쪽 방책을 힐끔거리며 불안한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수룡은 이후 한 번도 방책 너머로 침입하지 않았다.
그늘에 앉아 지나가던 사람들이 나누는 정겨운 대화를 듣던 명국영은 가방에서 편지를 꺼냈다. 마지막으로 읽기 위해서였다.
그는 물의 도시를 떠나 용금탄에 도착한 이후 열흘에 한 번꼴로 편지를 썼다. 수신인은 당연히 유타루체에 남았던 륜사였다. 용금탄에서의 생활, 어사대부 패환과의 만남 등을 자세히 편지에 쓴 명국영만큼이나 륜사도 마둔수탑 내부의 상황, 도시의 분위기, 시장 반명의 움직임 등을 상세히 적어서 보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횟수가 뜸해졌다. 최근 몇 달 동안에는 한 번도 편지를 받지 못했다.
명국영은 저 푸르게 반짝이는 도시를 쳐다보며…… 괜히 이곳으로 내려온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을 했다. 사람은 입이 아니라 몸으로 진실을 말한다. 륜사는 더 이상 과거에 명국영이 알았던 그 륜사가 아닐지도 몰랐다. 어쩌면 저 도시에서 깊은 실망감에 사로잡힐지도 몰랐다.
명국영은 마지막으로 받았던 편지를 펼쳤다.
[편지]바쁜 와중에 짬을 내어 타마로 승급한 마법사 여화와 함께 방책 너머 호수로 나갔는데, 이전과 다를 바가 없었어. 수룡 유천주는 나타나지 않았으니까. 물론 호수 중앙으로 나가서 온종일 거기 머문다면 유천주가 갑자기 나타나 배를 덥석 물고 물속으로 끌고 가겠지만 말이야. 천마인 나조차도 아직은 호수 중앙으로 갈 수는 없어.
요즘엔 용마렵 준비로 바빠. 유타루체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시장 반명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모양인데, 나로서도 찬성하지 않을 이유는 없어. 제국 전역에 흩어져 있는 천마를 불러 모을 뿐 아니라, 수룡 유천주를 죽이는 사람에게는 무려 100만 마전이라는 거액을 주겠다는 계획 덕분에 도시의 우환을 제거할 수 있다면 반대할 필요는 없으니까. 난 유타루체를 대표하는 마법사로서 각지에 있는 마탑과 긴밀히 연락을 주고받느라 좀 지쳤지만 그래도 지낼 만해.
자네도 얼마 전에 승진했다지?
축하해.
언제 한번 만나면 술이나 한잔 하지.[편지]
륜사는 단태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내비치지 않았다. 대략 1년 전부터 그런 낌새가 보였는데, 최근에는 좀 노골적인 느낌마저 들었다. 편지는 직접적으로 그런 언급을 하지 않았지만, 명국영은 륜사가 이미 단태는 죽었다고 결론 내렸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내 생각은 달라.’
편지를 구겨서 가방에 넣은 명국영은 공기로 뺨을 부풀린 채 위를 쳐다봤다.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파란 하늘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걸 보고 있으니 졸음이 몰려왔다.
잠이 오다니.
명국영은 웃음을 터트렸다.
한때, 명국영도 단태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자신을 설득했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악몽에 시달렸다. 주황색의 크고 무서운 눈이 밤마다 꿈에 나타났던 것이다. 단순한 불면증이 아니었다. 잠을 자기 두려울 만큼 그 꿈에 시달리던 명국영은 단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바꾸었고, 바로 그날부터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었다.
명국영은 륜사를 비난할 생각은 없었다. 만약 그 악몽이 자신을 괴롭히지 않았다면…… 륜사처럼 단태를 잊고 현실에 충실했을지도 몰랐다. 그만큼 수도 용금탄의 분위기는 급변하고 있었다.
마둔수탑이 팔마탑의 일원이 된 지도 어언 3년이 되었지만 기존의 탑들은 겉으로 열렬히 마둔수탑을 환영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노골적으로 배척하고 있었다. 탑주들은 정기적으로 만나 웃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등 우호적인 분위기를 연출했지만 각 탑에 속한 종자들은 뒷골목에서 주먹을 휘두르는 등 화합과는 거리가 멀었다. 올해 초에는 종자들의 싸움이 수련사들의 다툼으로 번졌는데, 그 문제로 탑주들이 모여 회의를 할 정도로 문제가 커졌다.
명국영은 곧 내부에 쌓인 갈등이 터질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일단 어디에선가 한 번 터지면, 걷잡을 수 없이 일이 진행될 것이다. 그 결과 마둔수탑은 더 위로 올라가거나, 용금탄에서 쫓겨나 물의 도시로 돌아가거나 둘 중 하나가 될 터였다.
위기에 봉착한 건, 마둔수탑만이 아니었다.
지난달에 황제 암살 미수 사건이 벌어졌다. 황실은 필사적으로 그 일을 덮어 아무도 모르게 하려고 은폐를 시도했지만 감찰 임무를 맡은 명국영은 업무의 성격상 그 부분을 누구보다도 잘 알 수밖에 없었다.
자객은 내년이면 성인이 될 황제를 죽이려 했다. 황명거사 석장명이 아니었다면 황제는 죽었을 것이다.
조사 결과 자객은 용금탄에 자리 잡은 제국 최대의 용병 조직인 원무황단에 속한 용병이었다. 무려 1만 명에 달하는 용병을 거느린 원무황단의 ‘특무’ 용병이 황제를 죽이려 했다는 사실은 곧 불어 닥칠 피의 폭풍을 예고하고 있었다.
황제는 절대 가만히 있지 않겠지만, 원무황단은 황제의 말 한마디에 해체하거나 없애 버릴 수 있는 조직이 아니었다. 원무황단 출신 용병들이 황군의 요직 곳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반란을 일으킬 여지도 다분했다.
황제가 죽을 뻔한 위기를 겨우 넘었다면, 용금탄의 상인들도 한바탕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권력을 등에 업은 황전상단이 황실로부터 마력석 광산의 채굴권을 독점적으로 확보했는데, 그 상단의 수장인 황전수명은 마력석의 공급 가격을 무려 두 배로 인상했다.
황전상단으로부터 마력석을 사들여 각 마탑에 공급하던 군소 상단들은 그 결정에 반발했지만 권력이라는 든든한 배경을 가진 황전상단의 결정을 뒤집을 힘이 그들에게는 없었다. 게다가 황전상단은 원무황단과 긴밀한 관계에 있었다. 누구든 황전상단에 대해 험담을 늘어놓았다가는 건장한 용병들에게 끌려가 고초를 겪어 신문도 진실을 말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명국영은 황전상단과 원무황단 사이의 연결고리를 찾아내어 법의 심판을 받게 하려고 지난 1년 동안 종횡무진 돌아다녔으나 바로 며칠 전에 어사대부 패환에게 불려가 그 일에서 손을 떼라는 명령을 받았다. 일개 상단과 용병단이 어사대부까지 움직일 만큼 그 힘이 막강했던 것이다.
“자넨 내가 지시하는 일에만 충실하면 돼.”
패환의 말이었다.
안 그래도 답답한 용금탄을 벗어나고 싶었던 명국영은 그 말을 듣고 마음을 굳혔다. 편지 한 장 달랑 써 놓고 용금탄을 벗어나 이곳 물의 도시로 온 것이다.
용금탄은 그야말로 욕망의 도가니였다.
돈과 힘을 놓고 온갖 협잡과 음모가 판을 치는 공간.
저 도시라고 해서 크게 다를 리는 없겠지만, 명국영에게 저 물의 도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맹세를 했던 특별한 장소였다. 천하를 품을 그릇이라고 판단했기에 단태를 위해 모든 것을 걸 수 있었던 곳이 바로 유타루체의 허름한 기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