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135화 (135/293)

<-- 135 회: 4-12 -->

단태가 살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이렇게 축 처지지는 않을 텐데.

한숨을 내쉬는 명국영 앞에 수레 한 대가 섰다.

“힘들면 타시오.”

햇살에 반짝이는 대머리 사내가 고갯짓으로 장작이 쌓인 수레를 가리켰다.

“고맙습니다.”

명국영은 충동적으로 가방을 집어 들고 수레에 올라탔다. 수레를 끄는 커다란 소 두 마리는 느릿느릿 주인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혹시 명 선생 아니오?”

“……저를 압니까?”

명국영은 깜짝 놀랐다.

“언젠가 수청보에 글을 쓰지 않았소? 그 글, 참 재미있게 읽었소.”

“아, 맞습니다.”

륜사의 부탁을 받아서 당시 힘없는 종자였던 단태를 위해서 글을 썼던 적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얼굴을 보자마자 자신을 알아보다니. 명국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실은 용태학에서 선생을 본 적이 있소.”

“용태학에서요?”

“거기 잠시 기웃거렸는데, 명 선생의 강의를 듣고 마음 깊은 곳까지 서늘해진 적이 있었소. 참으로 사람의 깊은 곳을 흔드는 강의였소.”

“……과찬입니다.”

명국영은 이런 곳에서, 저 허름한 옷을 입은 대머리 사내에게 이미 잊어버린 과거의 일로 인해서 칭찬을 받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용태학 수석 입학과 수석 졸업, 그리고 처음 도전한 용문거에서의 수석 합격은 명국영을 대번에 용금탄 최고의 유명인사로 만들었다. 그로 인해 용태학에서 그를 교수로 받아들였는데, 명국영은 자신이 직접 쓴 ≪제국의 빛과 그늘≫이라는 책을 바탕으로 강의를 진행했었다. 그러다 선대 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쫓겨나고 말았지만.

“아직도 그때의 생각을 고수하고 있소?”

대머리 사내는 한 번도 뒤를 보지 않고 질문을 던졌다.

“그때의 생각이라니요?”

“역사의 주인은 민중이라는 생각 말이오.”

“아, 그거 말입니까?”

명국영은 당황했다. 바로 그 내용 때문에 황제 연장춘이 명국영에게 분노했던 것이다. 황제가 곧 국가와 역사의 주인이라는 게 연장춘의 생각인데, 명국영의 책은 그 주장을 정면으로 거부했던 것이다. 한때 흥분한 황제는 명국영을 죽이라고 명령을 내리기도 했었다.

“대답하지 않아도 좋소.”

“실은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그렇소?”

사내는 고개를 돌려 명국영을 힐끔 봤다. 무심한 듯한 눈초리인데 어딘지 모르게 힐난하는, 비난하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쪽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명국영이 물었다.

“난 민중이 역사의 주인이라고 믿고 있소이다.”

사내는 힘주어 말했다.

“실체가 모호한 민중을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

그 질문에 사내는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사내의 태도에 명국영은 대화를 나눌 만한 상대라고 판단했다. 책으로만 세상을 공부한 젊은 학사들은 ≪제국의 빛과 그늘≫을 읽고는 민중을 위해서 무엇이든 하겠다고 큰소리치곤 했다. 그러나 그들은 곧 현실과 이상의 격차에 실망했는데, 그만큼 민중은 황제와 달리 그 실체가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책에 감명을 받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또 다른 책과 철학, 주장으로 휩쓸려 그쪽으로 몰려갔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삶을 움직일 기둥 같은 생각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유식함을 드러낼 수 있는 매개체로서의 철학이었다.

극소수는 민중을 움직여 역사를 바꾸겠다는 신념을 바탕으로 자신의 삶을 던졌다. 그들은 짧게는 몇 년, 길게는 10년 이상의 시간을 통하여 진실 하나를 깨달았다. 민중이 역사의 주인이지만, 민중 자체는 신뢰할 수 없다는 진실이었다.

민중은…… 날씨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집단이었다.

그러니 민중을 이끌겠다는 생각 자체가 불가능한 시도였던 것이다.

명국영은 햇볕에 그을린 사내의 대머리를 쳐다보면서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촌부로 보일 뿐, 저 사내의 삶은 결코 촌스럽지 않을 것 같았다.

“영웅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명국영은 속내를 조금 드러냈다.

“영웅?”

사내가 몸까지 돌려 명국영을 쳐다봤다. 그 때문에 수레는 길을 벗어났고, 소는 이때다 싶었는지 풀을 뜯기 시작했다.

“소진의 ≪영웅시대≫를 읽어 봤습니까?”

소진은 당대의 역사학자로 주류 학자들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된 인물이었다. 황제나 민중이 역사의 주인이라는 기존의 주장을 반박하고 소수의 영웅이 나타나야 시대의 흐름이 바뀐다는 주장을 펼친 까닭이었다. 명국영은 논리적 비약이 곳곳에 있지만 ≪영웅시대≫를 읽으면서 가슴속 갑갑한 부분이 조금씩 풀린다는 점을 깨달았다. 거기에 진실의 일부가 숨어 있다는 뜻이었다.

“명 선생께서는 영웅이 있다고 생각하시오?”

사내는 가죽주머니에 입을 대고 술을 한 모금 마신 후에 명국영에게 내밀었다.

시원한 술을 마시면서 생각을 정리한 명국영은 한 사람을 떠올렸다. 바로 단태였다. 소진이 역설한 영웅과는 거리가 있지만, 단태야말로 잘만 가르친다면 앞으로 영웅이 될 자질을 갖추었다고 명국영은 판단하고 있었다.

“평범해서 옆으로 지나가도 알아볼 수 없는 영웅은 세상에 많습니다. 다만, 그 영웅들 중에 극소수만이 시대의 흐름을 바꿔 놓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노력해서 얻은 힘 때문이 아니라, 그 시대에 맞는 자질을 타고났기 때문에 영웅이 된 사람이야말로 시대를 이끌어 또 다른 시대로 접어들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니까요.”

“시대가 낳은 영웅이라는 거요?”

“그렇습니다.”

“재미있군요.”

사내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더니 다시 고삐를 쥐었다. 소는 음메음메 울면서 수레를 끌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침묵을 지켰다.

명국영은 흔들리는 사내의 뒤통수를 쳐다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속으로 궁리하는 것과 입 밖으로 내뱉는 것은 확실히 달랐다. 사내와의 대화로 생각이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소진이 지혜롭고 힘 있는 소수가 세상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면, 명국영은 권력과 부를 독점한 영웅이 아니라…… 하늘이 내린 영웅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혁명을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그런 인물은 사람의 힘으로 길러 낼 수 없다는 점이었다. 하늘이, 이 시대가 그런 영웅을 만들고 있을 테니,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명국영은 답답했다.

용금탄에 머물면서 시간이 날 때마다 용태학 근처를 맴돌며 인재를 찾기도 했다. 그러나 ≪무무비경≫은 물론 도안집의 ≪역사≫, 장투의 ≪정전서≫ 따위를 줄줄 외우고 그 해석까지 완벽하게 해내면서도 삶은 엉망진창인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무무비경≫의 군왕편에 대해 신랄하게 논쟁을 벌이다가 밤이면 술을 마시며 기녀를 끼고 노는 등 시대를 책임질 인물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실망감에 사로잡히면 자연스럽게 단태가 생각났다. 좀 더 일찍 그 아이를 만났다면, 좀 더 일찍 힘을 갖추었다면, 단태가 시청으로 잡혀 가게 내버려 두지 않았을 텐데. 그러면 수룡 유천주에게 잡혀 가는 모습을 지켜보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곧 아레마고의 문이 나타났다. 크고 웅장한 아치형 문은 수백 년 동안 수리 한번 하지 않고도 튼튼하게 서 있었다.

수레가 그 아래를 지나가는데, 머릿속으로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전음]그대는 누군가?

너무나 생생해서 명국영은 주위를 돌아봤다. 도시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차례를 기다리는 상인들의 마차, 짐수레 따위에서 들려오는 소음이 제법 컸지만, 그 묵직한 목소리의 주인은 찾을 수 없었다. 잘못 들었나 싶은 순간, 또다시 그 음성이 들렸다.

-[전음]나는 아레마고의 문, 그대가 누군지 묻고 있다.

이번엔 더 선명한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렸다. 귓속에서 속삭이는 전성과는 차원이 다른, 위험을 갖춘 목소리였다.

그제야 명국영은 이 문에 얽힌 전설을 기억해 냈다. 대마법사 아레마고가 직접 세운 이 문은 계승자가 아래를 지나가면 스스로 깨어나 계승자에게 말을 건다는 이야기였다.

‘그게 사실이라니……?’

명국영은 대머리 사내에게 고맙다고 말한 다음, 가방을 들고 수레에서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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