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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국영은 자세한 이야기를 생략했다. 륜사가 진심으로 궁금해하지 않다는 사실도 알아챈 것이다.
“아무튼 잘 왔어. 안 그래도 자네에게 조언을 구할 일이 있거든.”
륜사는 곧장 본론을 꺼냈다. 용마렵이라는 행사에 천마들이 참석했으면 하는데, 방법이 없다는 고민이었다.
한참 상황을 듣기만 하던 명국영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방법은 간단하네.”
“그 간단한 방법 좀 알려 줘.”
“천마들 스스로 이곳으로 오게 만들면 되네.”
“어떻게?”
“내일 새벽에 서쪽 방책 근처의 늪지대에서 경비대원 하나가 낡은 양피지를 발견할 걸세. 그 양피지는 천파 대제국 초창기에 활약했던 대마법사 아레마고가 남긴 불세출의 마법서 ≪지완수≫의 일부라고 판명되어, 사람들을 특히 마법사들을 놀라게 할 거야. 더 놀라운 건, 그 양피지의 내용이라네. 바로 천마의 경지 위에 있는 또 다른 경지에 대한 언급이 있다는 거지. 적당한 이름을 붙여야 하겠지만, 내 생각에는 ‘언마’가 좋겠네. 그 소식이 퍼지기만 하면 대륙에 흩어져 있던 천마들은 용마렵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곳 유타루체로 몰려들 걸세.”
“…….”
륜사는 멍한 눈으로 명국영을 쳐다봤다.
“왜 그러나?”
“자네의 그 머리가 정말 부러워서 말이야. 내가 보기엔 자네의 그 머리야말로 진정한 마법인 것 같아. 그러니 평생 내 곁에 있어 줘. 부탁이야.”
“이미 난 자네의 동지가 아닌가?”
“그러면 약속한 거야!”
“……그래.”
명국영은 특별한 조건, 즉 단태를 위해서 무언가를 할 경우에는 륜사의 곁을 떠날 생각이었지만 굳이 여기서 륜사에게 그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륜사는 단태라는 이름 자체에 부담을 느꼈다. 단태가 살아 있다는 증거가 없는 지금, 괜한 말로 륜사를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륜사와 한바탕 수다를 떤 명국영은 특별히 마련된 19층의 방으로 향했다. 한때 용마 당고의 연구실이었던 그곳은…… 언젠가 내려올 명국영을 위해 내부의 구조가 달라져 있었다.
가지런히 책을 놓을 수 있는 서재, 언제든 편히 쉴 수 있는 침실, 책을 읽고 글을 쓰기에 딱 좋은 집필실까지 갖추어져 있었다. 방을 둘러본 명국영은 륜사의 마음씀씀이에 감동을 받았다. 비록 륜사가 단태에 대해 더 이상 관심을 가지지 않아서 조금 실망스러웠지만, 냉철하게 따진다면 륜사의 행동이야말로 정상이었다.
그는 손바닥을 폈다. 구름 문양이 손바닥 가운데 문신처럼 새겨져 있었다. 륜사에게 물어보고 싶었는데, 륜사가 자기 고민을 먼저 털어놓는 바람에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지완수≫ 때문에 천마들이 몰려들면…… 이 문양의 의미에 대해서도 더 깊이 알 수 있겠지.”
명국영은 륜사의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서만 그 방법을 알려 준 게 아니었다. 아레마고의 문이 깨어나서 자신에게 말을 건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알기 위해서 천마들을 이곳으로 불러 모은 것이었다. 제국에서 손꼽히는 마법사들이니 아레마고의 문에 대해 무언가 진실을 알려 줄지도 몰랐던 것이다.
무엇보다 단태 때문이었다.
용마렵의 목적은 수룡 유천주의 제거였다. 그러니 천마들이 모두 모인다면 유천주에게 붙잡힌 단태를 구해 낼 가능성이 높아질 터였다. 명국영은 단태를 찾아낼 희미한 가능성을 위해 거짓말을 해서라도 천마들을 불러 모았던 것이다.
해가 저물자, 통유리 너머의 도시는 서서히 잠들고 있었다. 거미줄처럼 뻗은 운하들을 가득 채운 배들이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는데, 거기에 도시의 생명력이 깃들어 있었다.
방책이 보였다.
그 너머 붉은 노을을 담고 있는 호수도.
저 어딘가에 단태가 있다!
아니, 있어야 한다!
명국영은 피곤을 느꼈으나 쉬는 대신 책상에 앉아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곳으로 오다가 만난 그 대머리 사내와의 대화에서 얻은 지혜를 글로 남기기 위해서였다. 이 글은 당연히 단태를 위한 것이었다. 단태가 돌아온다면 ‘역사의 주인’이라는 주제로 토론을 해 보고 싶었다. 단태는 누가 역사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지 매우 궁금했던 것이다.
‘제발 살아서 돌아오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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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태는 시간의 흐름도 잊고 책에 푹 빠져 있었다.
가끔 손가락에 침을 발라 오랫동안, 어쩌면 수백 년 이상 한 번도 펼쳐지지 않았던 책장을 조심스레 넘길 때 들리는 조그만 소리 외에 마간은 정적에 빠져 있었다.
그 고요 속에서, 단태는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헷갈릴 때가 많았다. 자기가 누구인지도 잊어버렸다. 책은 하나의 세계였고, 좋은 책일수록 흡입력도 강했다. 어떤 의미로 본다면 최상급의 책은 비록 글로 기록되어 있음에도 용옥에 담긴 용족의 기억보다 더 깊고, 생생하며, 실제적이었다. 단태는 문장을 읽는 동시에 그 문장 안으로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순조롭지는 않았다.
‘삼협’, ‘삼광’, ‘칠명현’, ‘오천마로’ 등 까다롭기 짝이 없는 개념이 그를 괴롭혔다. 많은 마법사들이 그런 개념을 이미 안다고 가정하여 책을 썼지만, 불행히도 단태는 준비된 독자가 아니었다.
문맥으로 그 의미를 이해할 만하다 싶으면 견고한 철벽같은 단어가 나와 공든 탑을 무너뜨렸다. 단태는 그 철벽을 무너뜨리려고 무던히 애를 썼는데 결국 현실을 깨달았다.
시간은 단태 자신의 편이 아니었다.
처음엔 이해하기 위해 읽었던 부분을 뒤적뒤적했고, 책을 처음부터 다시 읽기도 했지만 곧 단태는 마법이 단기간에 소화할 수 없는 거대한 세계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지평선 너머에 또 다른 지평선이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세계였다.
자연스레 독서의 방식이 바뀌었다. 이해가 아니라 암기가 목표였다.
난해한 책도 포기하는 법 없이 머릿속에 우겨넣었고, 심지어 모르는 문자로 쓰인 책까지도 정교하게 그림을 그리듯 각인을 시켰다. 기억력은 사용할수록 좋아져서 상태가 좋을 때는 한 시간에 열 권 남짓한 책을 암기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해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그래도 소득은 있었다.
마법이 어떠한 역사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는지 감을 잡을 수 있었고, 유명한 마법사의 이름이 친숙해졌으며, 미치광이라 불릴 만큼 마법에 깊이 헌신한 마법사들의 존재도 알았고, 무엇보다 마법의 세계가 얼마나 방대한지 깨달았다. 용족이라고 해도 마법이라는 세계 전부를 정복할 수는 없을 터였다.
마법은 그 자체로 광활한 세계였고, 단태는 그 세계의 지도를 손에 쥔 채 한 걸음 내디딘 초보 탐험가에 불과했다. 단태는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마간 밖으로 나오기 전에 몸을 돌려 쌓인 책을 쳐다봤다. 저 어마어마한 책을 읽었다니. 비록 마간에 쌓인 책 전부를 씹어서 소화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왠지 모르게 뿌듯했다. 용의 유산 덕분에 가지게 된 기억력이 없었다면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다.
단태는 유천주가 머무는 주혈로 향했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거미들이 날뛰지 않는 걸 보면 유천주가 아직 저주와의 싸움에서 패하지 않았다는 뜻이지만 그렇다고 우세하다고 판단할 수도 없었다. 거기 서서 유천주가 저주와의 전투에서 지지 않기를 빈 후에야 단태는 몸을 돌렸다.
운미도, 설고도 보이지 않았다.
단태는 서둘러 용옥간으로 갔다. 마지막으로 경험했던 용오군의 구슬을 들어 올려 마력을 주입했다.
섬광이 터진 순간, 단태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분화구 가장자리에 서 있었다. 고약한 냄새와 열기가 느껴졌다.
무열군주가 다가왔다.
단태는 그가 고색창연한 말을 늘어놓기 전에 선수를 쳤다.
“삼협이 무슨 뜻입니까?”
혀를 차며 미간을 좁히는 무열군주. 그러나 표정과 달리 할아버지가 어린 손자를 가르치듯 부드럽게 그 뜻을 알려 주었다.
삼협은 기본적으로 세 가지 좁은 것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였다. 같은 양의 물이라고 해도 좁은 관을 통해 나올 때 그 기세가 강해지듯 마력도 마찬가지였다.
마력 자체를 압축하여 다루는 것을 첫 번째 협이었고, 압축된 마력을 좁은 통로로 이동시키는 것이 두 번째 협, 마지막 협은 마법을 펼칠 때 마력이 강하게 뿜어져 나오도록 출구를 좁히는 것이었다. 삼협은 같은 마력으로 보다 강력한 마법을 펼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원리였는데, 그 설명을 듣고 나서야 단태는 마둔수탑과 관련된 책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마둔수탑은 물론 다수의 탑에는 일정한 단계가 존재한다. 탑이 정한 교육과정을 마치면 수련사의 지위를 얻는데, 승급 시험을 통과해야만 마법사로서 인정을 받을 수 있다. 승급 시험은 크게 둘로 나뉜다.
첫 번째는 마법사로서의 지적 소양을 제대로 갖추었는지 평가하기 위한 이론 시험인데, 마법과 탑의 역사, 내부 규율과 그 의미, 세세한 마법 단계에 대한 질문으로 철저한 준비만이 그 시험에서 합격할 수 있는 비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