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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향력
등잔불 앞에서 보고서를 읽던 철무는 두 팔을 위로 뻗으며 하품을 했다. 문득 볼일 때문에 유염상에 갔다가 돌아오던 길에 우연히 만났던 명국영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명국영은 과거에 비해 부드럽게 변했다. 열변을 토하면서 제국의 황제까지 비판했던 그 명국영이 아니었다.
“영웅이라고?”
철무는 한껏 비웃고 싶지만, 명국영이 지적했던 부분 때문에 웃을 수가 없었다.
명국영은 분명히 물었다.
민중을 신뢰할 수 있냐고.
철무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신뢰할 수 없다는 결론을 입으로 내뱉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윤강이 무영단의 일원이 되기 위해 물의 도시를 떠난 이후, 추명을 실질적으로 이끌게 된 철무는 불타는 사명감으로 추명이 된 사람들이 시간이 흐르며 어떻게 변해 가는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과거 추명의 일원으로 공을 세웠던 어떤 노인은 술을 몰래 만들어서 팔다가 시청에 잡혀 갔는데, 거기서 추명의 동료를 넘겨주는 대가로 무사히 풀려났다. 철무는 추명의 내부 규율에 따라서 그 노인에게 ‘살명’을 내렸다. 추명의 미래를 위해서 그 힘없는 노인을 죽여야 했던 것이다.
그날 밤, 추명이 보낸 자객이 노인의 목을 잘라 차망로의 교차로 장대 위에 매달았다. 그건 일종의 경고였다. 추명을 배신하면 이런 꼴이 된다는. 그러니 어떤 상황에서도 배신은 하지 말라는.
추명은 하층민을 보호하는 조직이었다. 첫 번째 목적도, 두 번째와 세 번째 목적도 억압받는 하층민을 적극적으로 보호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추명이라는 조직 자체가 커지면서 여기저기에서 부작용이 생겼다. 추명에 속한 자들이 각종 이권에 개입했던 것이다.
암방거로, 차망로, 서천목로는 추명에 속한 대표적인 구획이었다. 각 구획에는 소위 노른자라 불리는 곳이 있었는데, 그런 장소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추명의 추천이 필수적이었다. 추명이 뒤를 봐주지 않으면 그런 곳에서 장사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상인에게 뒷돈을 받고 추천장을 써 준 추명의 조직원이 생겼다. 기루, 여관, 요리점 등에게서 개인적으로 보호비를 걷는 추명의 조직원도 있었다. 철무는 내부 기강을 잡기 위해 불시에 그런 조직원을 찾아내어 벌을 주었지만, 뿌리까지 뽑을 수는 없었다. 이미 보호비는 말단 조직원뿐 아니라 ‘칠하’라 불리는 추명을 이끄는 고위 조직원들에게로 상납되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발본색원하기 위해 추명을 들쑤셨다가는 조직 자체가 무너질 가능성도 적지 않았다. 그 때문에 고민에 빠진 철무는 답답한 나머지 작년에 은퇴한 번운재를 찾아가서 의논을 하기도 했다.
“병이 든 걸세. 명의는 병을 죽이지, 환자를 죽이진 않네. 무슨 뜻인지는 자네가 더 잘 알 테지.”
당시 번운재가 한 말이었다.
철무도 그 뜻을 잘 알았다. 추명을 사람으로 본다면, 현재의 추명은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었다. 병이 들어 몸의 일부가 썩어 가고 있는데, 그 병을 고쳐야지 사람 자체를 죽이면 안 된다는 충고였다. 문제는 어디가 썩고 있는지, 어디를 쳐 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난 명의가 아닌 게야.’
철무는 씁쓸하게 웃었다.
윤강이 부러웠다.
두 번의 도전 만에 윤강은 무영단의 일원이 되었다. 물의 도시를 떠난 윤강이 보낸 단 한 통의 편지에 그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가슴을 찌른 칼이 조금만 위로 향했다면 죽고 말았을 거라는 부분도 담담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나도 훌훌 털고 떠나 버릴까?”
그런 말을 하자마자 철무는 그럴 수 없음을 깨달았다.
추명은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내부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3년 전의 수룡 난입 사건으로 추명이 시청의 압박을 이겨 내고 하층민을 제대로 보호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상은 반대였다. 추명으로 들어오는 돈의 액수가 커지자, 거기에 욕심을 낸 사람들이 많아졌고, 그로 인해 추명 내부의 결속력이 날이 갈수록 약해지고 있었다.
의외의 공격 한 번에 추명은 와르르 무너질 수도 있었다. 추명이 무너진다면…… 이 서쪽 구획에 사는 하층민은 늑대에게 노출된 양 떼의 신세나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바로 그 순진한 이들 때문에 철무는 도시를 떠날 수가 없었다.
두툼한 보고서를 다 읽은 철무는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골치가 아팠던 것이다. 믿었던 녀석마저 적지 않은 돈을 횡령했다는 내용 때문이었다. 윤강을 따랐던 추관구가 따로 챙긴 돈은 무려 2천 마전이었다.
평범한 사람은 평생 만져 볼 수 없는 거액의 돈을 도박장에서 탕진한 추관구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윤강을 생각하면 극형은 피하고 싶지만, 그렇다고 형평성을 깨뜨릴 수는 없었다.
답답해서 밖으로 나온 철무는 방책으로 올라갔다. 여기 서쪽 방책에서 근무하는 경비대원들은 대부분 추명의 조직원이었다. 수룡의 난입 이후로 이곳에서의 경계 근무를 기피하는 경비대원들이 늘어나자, 이곳에 자원하여 남은 사람들이 얼마 없었던 것이다.
달이 호수의 표면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어둠에 깔린 호수.
철무는 바람을 맞으며 그날의 광경을 떠올렸다. 수룡의 앞발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던 그 녀석. 3년 동안 그 녀석에 대한 조사 끝에 기가 막힌 진실을 알아냈다. 단태는 노예였던 것이다. 엄포윤이 구입한 노예였다가 명국영에게 팔렸는데, 명국영이 자유인으로 풀어 준 내용이 노예등록소의 장부에 나와 있었다.
그러나 왜 수룡 유천주가 단태를 데려갔는지에 대한 부분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평생 철무가 만났던 사람들 중에 단태만큼 수수께끼를 품고 있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십중팔구, 아니 그 이상의 확률로 죽었다고 판단해야 정상인 상황인데도 철무는 왠지 그 녀석이 어딘가에 살아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근거는 없었다. 그저 직감이었다. 노예 주제에 용마 륜사의 종자도 모자라 마둔수탑의 종자장 자리까지 올라간 녀석이라면 수룡 유천주에게 잡혀간 상황에서도 버텨 낼 수 있으리라 판단한 것이다.
“그 녀석에겐 기적 같은 일이 자주 일어났어.”
철무가 중얼거렸다.
요즘보다 기적을 바란 적은 과거 아내와 딸이 죽었던 고통의 시절뿐이었다. 그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추명에겐 희망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아무리 애를 쓴다고 해도 그저 붕괴의 속도를 줄일 뿐이었다.
추명이 무너질지 모른다고 몇 번이나 경고했는데도 칠하는 물론 말단 조직원들까지 철무가 과민반응을 보인다고 투덜거렸다. 할 수만 있다면 그들의 눈꺼풀을 까뒤집어 진실을, 곧 다가올 미래를 강제로 보여 주고 싶지만,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은 이미 비참한 과거를 잊어버렸다.
지금의 번영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거라고 믿고 있었다.
몸을 돌린 철무는 불야성을 이루는 서쪽 구획을 바라보았다.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한 빛을 내뿜고 있지만, 그는 이곳을 덮칠 위기를 생생하게 보고 있었다.
“이곳이 내 무덤이 되겠군.”
철무는 기꺼이 여기서 죽을 생각이었다. 아내와 딸의 뼈를 뿌린 이 도시에 뼈를 묻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그때, 방책으로 서둘러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린 철무는 어엿한 청년으로 성장한 창수를 발견했다.
“무슨 일이냐?”
“……또 죽었습니다.”
“이번에도…… 그러냐?”
“네.”
“어디냐?”
“차망로의 취영루예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철무는 달리기 시작했다. 창수가 쫓아왔지만 금세 뒤처지고 말았다.
벌써 다섯이나 죽었다.
처음 발견된 희생자는 열다섯 살 소녀였다. 매춘으로 살아가는 여자의 딸로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던 터라 실종된 지 사흘이 지났는데도 누구 하나 걱정하지 않고 있었다.
바싹 말라 버린 시체의 옷에서 낡은 목제 장식물이 나오지 않았다면 그 소녀의 시체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상황이었다. 사흘 만에 혈액은 물론 체액의 대부분이 말라 버려 쭈글쭈글해진 시체를 직접 본 철무조차 그 소녀라고 믿기 어려웠다.
철무는 간단한 조사로 마법사의 소행임을 알아냈다.
미치광이 마법사가 등장한 것이다.
조치를 취하기도 전에 두 번째 시체가 발견되었다.
아이가 둘인 삼십 대 여자로 얼굴이 함몰되어 신원 파악이 힘들었지만, 아내를 찾아 헤매던 남편이 그 시체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본 순간 진실이 드러났다. 남편은 핏발 선 눈으로 철무를 찾아와 누가 이런 짓을 했는지 찾아내라고 난동을 부렸다.
이후, 이틀 간격으로 세 번째, 네 번째 그리고 다섯 번째 시체가 도시의 서쪽 구획 곳곳에서 발견되었지만 철무는 마법사의 소행이라는 것 외에는 딱히 알아낸 사실이 없었다. 마법은 그가 자신 있게 다룰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