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143화 (143/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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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을 신성시하는 마법사들은 이런 표현을 질색하지만 단태가 보기에 소에 쟁기를 달아 밭을 가는 것과 마법은 근본적으로 같은 영역의 지식이었다. 그저 소로 밭가는 일은 평범한 농부가 쉽게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마법은 타고난 재능과 유리한 환경 없이는 배우기가 어려운 기술이라는 점만 달랐다.

유능한 농부는 좀 더 효율적인 쟁기를 제작하고 좀 더 힘센 소를 고른다. 마찬가지로 유능한 마법사는 마력을 효율적으로 다루고 좀 더 효과 있는 마법 재료를 골라서 사용한다. 국가적으로, 사회적으로 마법사가 농부보다 존경을 받는 이유는 누구나 농부가 될 수는 있지만 아무나 마법사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작하족은 자연의 상태를 바꾸는 기술이라기보다는 법이나 규율처럼 일종의 계약이었다. 영주와 백성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는 법률 조항과 흡사한데, 다만 마법으로 그 관계가 깨지지 않도록 만드는 점이 달랐다.

깊이 파고들수록 작하족은 흥미로운 마법이었다.

“현룡 무한주가 언급한 그 내용, 사실일까요?”

말린 수초를 모아서 붙인 불 옆에 앉은 단태는 맞은편에 자리 잡은 유천주에게 물었다. 용혈에서 가장 큰 공간인 대혈이어서 조그만 목소리도 넓게 퍼져 나갔다.

“사실이야. 인정하긴 싫지만.”

단태 또래의 남자 모습을 취한 유천주는 손을 뻗어 영롱하게 빛나는 구슬 하나를 집어 입에 넣고 퍽 터트렸다. 운미가 정성껏 작업해서 가져온 금룡어 눈알이었다.

“……그러면 당신도 하족에게서 영향을 받았나요?”

“너와 이런 이야기를 하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 처음엔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거라고 자신했지. 한데, 하족의 수가 늘어나자 내게도 변화가 생겼지.”

“어떤 변화예요?”

단태는 자신도 모르게 재촉했다. 그동안 용이 하족에게 일방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한다고만 생각했었다.

“독액.”

“네?”

“넌 경험했을 텐데. 저 위쪽 도시에서.”

“아!”

단태는 탄성을 터트렸다.

시청의 첨탑 꼭대기에 갇혀 있다가 사태가 심상치 앉자 당시 단태는 문을 부수고 나선형 계단을 타고 내려왔었다. 그러다가 두 마리 용, 유천주와 천마룡의 거친 몸싸움으로 탑이 무너졌고, 무엇보다 유천주가 내뱉은 기이한 액체에 불쌍한 쥐는 물론 벽과 땅까지 녹았다. 그 액체가 하족으로 인해 생긴 변화였다니!

“무한주는 무조건 인간을 하족으로 삼으면 안 된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저 인간을 하족으로 삼았을 때 생길 수 있는 변화를 예상할 수 없기 때문에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했지.”

유천주는 또 하나의 눈알을 입에 넣고 빨았다. 달콤한 과자에 꽂힌 아이 같은 표정이었다.

“인간을 하족으로 삼으면 어떤 변화가 생길까요?”

“그건 네 몫이잖아.”

흔들리는 불빛 때문에 농담을 던진 유천주의 얼굴은 무시무시한 악마처럼 보였다.

단태는 금룡어 기름을 발라서 말린 수초가 타면서 풍기는 향을 맡으며 은은한 불을 쳐다보았다. 기분이 묘했다. 유천주에게 잡혀 여기로 끌려올 때는 이런 분위기를 상상도 못 했다. 그저 생존이 목표였다. 사악한 수룡과 친구처럼 불을 가운데 두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눌 거라고 감히 생각이나 할 수 있었을까?

갑자기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다.

“왠지 작하족은 정령과의 계약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오호, 제법인걸.”

유천주의 눈이 반짝거렸다.

“맞나요?”

“존재와 존재를 연결한다는 점에서 작하족과 정령 계약은 상당히 비슷하다. 무한주뿐 아니라 다수의 용이 정령 계약을 깊이 탐구한 것도 같은 이유고.”

평소 무뚝뚝하고 제멋대로인 유천주가 고분고분 생각을 들려주자 단태는 이 기회를 최대한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옛날부터 궁금한 건데, 정령은 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이 세계엔 없어.”

“……무슨 뜻이에요?”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거지.”

유천주는 목소리를 낮추어 긴장감 어린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

단태는 아직 무슨 말인지 몰라서 가만히 기다렸다.

“네가 경험한 세계가 유일한 세계는 아니야. 이 세계 너머 어딘가에 완전히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거지. 정령이 그 증거야. 사실, 정령이라는 단어는 적절치 않아. 정령이 자신을 정령이라 부를까? 난 아니라고 생각해. 정령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어. 사소한 지식만 알려져 있지. 그런데도 인간은 너무나 쉽게 정령과 계약을 맺어. 정령이 제공하는 힘을 얻기 위해서지.”

유천주는 인간을 비웃고 있었지만, 정당한 이유가 있기에 단태는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유천주의 지적은 합리적이었다. 정체도 모르는 정령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을까?

단태는 수탄왕령에 대한 이야기를 유천주에게 들려주었다. 수탄왕령과의 계약이 암탄주의 유산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래? 그 늙은이가 선물은 제대로 남겼군. 충고 하나 하자면, 조심해라. 정령이 어떤 존재인지 알려진 바는 없으니까.”

“알았어요.”

“넌 여기 더 있을 거지? 난 가서 쉬어야겠다.”

자존심 센 유천주는 단태가 그를 살린 이후, 스스럼없이 쉬어야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유천주가 떠나자 혼자 불 앞에 앉은 단태는 수탄왕령과의 관계를 깊이 생각했다. 그 계약으로 인해 물과의 친화력이 비약적으로 증가했고, 그 때문에 물을 쉽게 다룰 수 있었다.

그는 손을 뻗었고, 그릇에 담긴 물이 공중으로 올라와 엄마의 얼굴로 바뀌었다. 불빛을 받아 엄마는 무언가 속삭이는 것 같았다. 단태가 손짓을 하자 엄마는 천천히 동생으로 바뀌었고, 동생은 새치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계약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면 수탄왕령은 계약으로 무엇을 얻었을까?

순간, 단태는 한 가지 가능성을 발견했다. 정령과의 관계를 면밀히 살피면, 작하족 과정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심호흡을 한 그는 즉시 정령을 불러냈다.

“취풍장령.”

이름을 부르자마자 바람이 불어 모닥불이 흔들려 그림자가 춤을 추었다.

심장에서 마력이 빠져나가는 느낌과 함께 반투명한 여자가 허공에 나타났다. 바람의 정령 취풍장령이었다.

“부르셨나요?”

서늘한 휘파람 같은 목소리.

“물어볼 게 있어서.”

“말씀하세요.”

“넌 어디에 있었지?”

“지금, 여기 있습니다만.”

“아니, 내가 부르기 전에 말이야.”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닙니다.”

취풍장령의 얼굴에는 표정이랄 게 없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단태로서는 짐작조차 하기 어려웠다.

“대답할 수 없는 질문도 있어?”

“그렇습니다.”

“왜 대답할 수 없지?”

“그것도 대답할 수 없습니다.”

“할 수 없다는 거야? 하면 안 된다는 거야?”

그 질문에 취풍장령에게서 불어나오는 바람이 일순간 강해졌고, 모닥불은 거의 꺼질 뻔했다.

“……대답할 수 없습니다.”

단태는 진실을 깨달았다. 하면 안 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누군가 금지 명령을 내렸을 것이다. 누가 그랬을까? 즉시 그 위엄 있는 목소리가 떠올랐다. 수탄왕령이 물의 정령왕이듯 바람의 정령 중에도 그런 위치를 가진 존재가 있을 터였다.

그런데 왜 대답하지 못하도록 명령을 내렸을까?

취풍장령에게서 더 이상의 진실을 끌어낼 수는 없었다. 아름다운 바람의 정령을 돌려보낸 후, 단태는 복잡한 생각을 정리했다.

기존의 마법을 ‘물질마법’이라고 부른다면, 작하족과 정령 계약은 ‘존재마법’이라 할 만했다.

마력을 기반으로 관계를 구축하고, 그 관계를 지속하는 특별한 마법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 그 마법을 응용한다면 끊임없는 충돌을 근원적으로 제거할 수 있지는 않을까? 노예제도 자체를 없앨 수도 있으리라.

가슴이 두근거렸다.

한편으로는 그런 방식이 옳은지 의심스러웠다. 다투고 싸우는 선택의 여지를 없애버린다면 평온한 세상이 만들어지겠지만, 그런 세상에서 살고 싶을지는 단태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곧 그 답을 찾아냈다. 답은 멀리 있지 않았다.

이 방 바깥 공간을 돌아다니는 거미들이 그 답이었다. 유천주와의 계약으로 본능을 잃어버린 거미들 사이에 충돌은 존재하지 않았다. 관리하기 편할지는 몰라도 그런 거미들이 자연스럽게 보이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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