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144화 (144/293)

<-- 144 회: 4-21 -->

말린 수초를 불에 던져 넣은 단태는 ‘존재’에 대하여 의문을 가졌다. 어려운 질문이며, 만족스러운 답을 찾기 어렵다는 점을 잘 알았지만, 그 의문을 피할 수는 없었다. 피하고 싶지 않았다. 설고를 위해서,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

시야가 확장되어 머릿속이 시원해진 느낌이 지속되고 있었다. 처음으로 지평선을 본, 그리고 그 지평선 너머에 또 다른 세계, 한 번도 보지 못한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아 흥분한 아이 같은 기분이었다.

크게 한 걸음 내디뎠지만, 만족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떻게 해야 더 깊이 파고들 수 있을까?

단태는 충동적으로 취풍장령을 불렀다.

바람이 불며 아름다운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가 이 세상에 있기 위해서 지속적인 마력 소모는 불가피했고, 단태는 자신에게서 빠져나가는 마력을 느낄 수 있었다.

“부르셨나요?”

“당신과의 계약을 깨뜨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

취풍장령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던 모양이다. 그 태도를 통하여 단태는 정령과의 계약을 무효화하는 방법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만약 내 질문에 답을 하지 않으면 계약을 파기하겠어. 소환 전에 당신이 있던 세계에 대해 말해 봐.”

바람의 정령은 잠시 허공에 뜬 채로 단태를 쳐다봤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단태는 조바심을 가라앉히느라 애를 먹었다.

곧 여인은 입을 열어 기이한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바람의 세계였다.

성질이 제각기 다른 바람이 휘몰아치는 그 세계에서 땅은 황무지였고, 바다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하늘은 잿빛이었다. 과연 유천주의 추측대로 정령은 자신을 정령이라 부르지 않았다. ‘우리’가 취풍장령이 사용하는 호칭이었다. ‘우리’는 그 세계의 주인이자, 유일한 존재였다.

그 설명을 충분히 들은 단태는 상상도 못 한 독특한 세계에 감탄하면서도 다음 질문을 잊지 않았다.

“당신과 계약을 맺은 후, 난 바람의 친화력이 높아졌어. 당신에게는 어떤 변화가 있었지?”

“대답할 수 없습…….

“계약을 파기한다고 해도?”

단태는 협박에 능숙한 자신의 모습에 놀랐다.

“…….”

정령은 감정을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누군가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 대상과 상의를 하는 것 같았다.

단태는 잠자코 기다렸다.

곧 정령이 입을 열었다.

“다양성을 느낄 수 있었어요.”

“뭐?”

예상 밖의 대답이었다.

정령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그쳐서 더 많은 내용을 알아낼 수도 있지만, 단태는 그러지 않았다.

정령을 돌려보낸 단태는 주혈을 벗어나 용옥간으로 향했다. 운미는 거기 없었다. 요즘 통 볼 수가 없어서 마음이 쓰였지만 지금은 굳이 찾고 싶지 않았다.

구석에 누워 팔베개를 한 채 천장을 올려다본 그는 정령의 대답을 곱씹었다. 인간은 꿈도 꾸기 힘든 능력을 가진 정령이 인간과 계약을 맺는 이유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인데, 그게 다양성이라니.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왜 그런 대답을 했을까?

혹시 취풍장령이 거짓을 말했을까?

세차게 고개를 흔들어 그런 고민을 머리에서 쫓아냈다. 거기에 필요 이상으로 집중하면 현실을 잊을 것 같아서였다. 목표는 하나, 설고를 족쇄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갑자기 몰려드는 그리움에 단태는 엄마와 설희가 어떻게 지낼까 궁금했다. 이곳에서 버틸 수 있게 도와준 설고 때문에 가족의 어려움을 못 본 척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단태는 엄마와 설희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그 조건에 짓눌리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물론 그런 확신이 애잔한 기분을 녹이지는 못했다.

피곤으로 몸이 무거웠다. 굳이 따지자면 피곤은 몸이 아니라, 마음을 무겁게 했다.

늘어지게 하품을 한 단태는 눈을 감았다. 꿈에 작하족의 비밀을 알아내어 단번에 목적을 이룰 수 있기를 빌면서.

@

뿔에서부터 피부와 날개, 그리고 발톱까지 온통 금색인 그 용은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고 있었다.

3년 전에 죽은 천마룡을 비롯해서 크고 작은 용들이 도시 상공을 날아다니는 광경에 익숙했던 사람들도 그 거대한 금빛 용의 등장에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에겐 한 번도 보지 못한, 그저 소문으로만 들었던 용이었다.

“과연 물의 도시야.”

운하 위에 건설된 도시를 내려다보던 황제가 탄성을 터트렸다.

“……폐하, 꼭 이렇게까지 하셔야겠습니까?”

황명거사 석장명이었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잖아.”

“맹진국의 동태가 심상찮은 상황인데, 수도를 비운다는 게 솔직히 불안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 봐야 제후국이야.”

“옛날의 맹진국이 아니라는 것, 폐하도 아시잖습니까?”

“잘 알지.”

황제는 맹진국에 머무는 외교관이 은밀히 상단을 통해서 보낸 보고서를 떠올렸다. 왕위에 오른 판금우가 불순한 마음을 먹고 병력을 증강하고 있다는 내용인데, 특히 최근에 맹진국 북동쪽에서 발견된 대규모 마력석 광산으로 마법 관련 전력이 크게 좋아졌다는 부분은 결코 좌시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정예 군대를 보내어 맹진국을 쓸어버리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맹진국은 물론 당중, 초담, 비월, 봉만 등 인근의 나라들이 경각심을 갖고 동맹을 맺어 힘을 합칠 가능성이 쾌 컸다. 무력을 사용하기 전에 그 군소 국가들 사이의 관계를 끊어야 했다.

그게 순서였다.

순간, 이대로 극천황룡을 방향을 돌려 용금탄으로 가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말 한마디면 충분하리라.

‘그럴 순 없지. 내부 문제를 매듭지어야 외부에 썩은 부분을 손댈 수 있으니까.’

황제는 물의 도시 유타루체를 시작으로 칠성시를 전부 돌아볼 생각이었다. 그 계획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석장명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맹렬하게 반대할 게 분명했던 것이다. 얼마 전에 있었던 암살 미수 사건 때문에 석장명은 필요 이상으로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칠성시는 용령 제국의 건국 이전에 가파랑 연방을 이룬 일곱 국가의 수도였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기 때문에 각 도시마다 분위기가 달랐고, 그 도시를 지배하는 가문의 성격도 제각각이었다.

황제는 이번 순행을 통하여 칠성시의 내부 사정을 파악하고, 가능하다면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여 도시의 지지를 이끌어내고 싶었다. 그 부분이 성사된다면 황제는 제국의 통치권력을 반석 위에 오려놓을 수 있을 터였다.

“내려가지.”

“알겠습니다.”

석장명이 고개를 끄덕이자, 잔뜩 긴장한 용마사는 극천황룡을 움직여 도시 북서쪽에 자리 잡은 착륙장으로 내려갔다.

용이 내려앉는 순간, 황제는 폴짝폴짝 뛰어 땅에 내려섰다. 날갯짓에 피어오른 먼지가 가라앉자 관복을 갖추어 입은 시장과 도시의 관리들이 도열해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황제는 뒷짐을 진 채 그들 앞으로 걸어갔고, 석장명이 옆으로 따라붙었다.

“폐하께서 직접 왕림하시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도시의 영광이옵니다.”

시장 반명이 무릎을 꿇자, 관리들도 황제에 대한 예의를 다하며 무릎을 꿇고 이마로 땅바닥을 찧었다.

“진작 왔어야 했는데, 좀 늦었소.”

“아니옵니다, 폐하.”

“이번에 있을 용마렵이 볼만하다던데, 기대하겠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폐하.”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준비된 대마선에 올라탔다. 마법사 세 명이 달라붙어야 움직일 수 있는 그 배는 물의 도시에 단 두 척밖에 없었다. 황제를 위해 금색으로 치장된 배는 곧 상아별로 지역에 자리 잡은 고급 별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어나서 무릎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 낸 반명은 어젯밤에야 도시를 방문하겠고 연락한 황제의 의도를 생각하고 있었다.

의례적으로 곧 열릴 용마렵에 대한 초청장을 황실에도 보냈지만 한 번도 직접 황제가 저 유명한 용을 타고 이곳으로 올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다. 황제가 참가한다면 이번 용마렵은 그 어느 때보다 의미가 깊겠지만, 이로써 나머지 칠성시가 물의 도시를 주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고 만 셈이다.

“넌 아무것도 몰랐느냐?”

“……이미 말씀드렸잖아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