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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에 유타루체로 돌아온 반우현의 대답은 심드렁했다.
“황제 폐하는 아직 어리지만 심계는 대단하시다. 결코 충동적으로 움직이실 분이 아니야.”
“그럴까요?”
반우현은 황제가 이곳에 온 이유 따위엔 별로 관심이 없었다.
“난 네가 황실에 머물면서 가능하면 황제 폐하의 마음을 사로잡기를 원했건만, 그건 힘든 모양이구나.”
“그 부분은 예전에 이야기가 끝났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래, 넌 여자가 아니라 계승자가 되기로 했었지. 허나, 너 정도의 미모라면 폐하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
반명은 아쉬움을 감추지 않았다.
“황제 폐하의 눈길 한번 받으려고 일 년 내내 피부를 관리하고, 화장을 배우며, 화려한 옷을 입는 여자들이 용금탄에 얼마나 많은지 아버지께서 아신다면 그런 말씀은 할 수 없을 거에요.”
“알겠다.”
반명은 더 이상 황제 곁에 선 딸에 대한 미련을 가지지 않기로 마음먹었지만, 쉽지 않을 터였다.
역사는 권력의 정점으로 올라가는 가장 빠른 길이 무엇인지 보여 주고 있었다. 그건 바로 황제의 최측근이 되는 방법인데, 똑똑하고 아름다운 반우현이 아직 비어 있는 황비의 자리에 오른다면 오랜 꿈은 현실로 바뀔 것이다.
기분이 상한 반우현은 소마선에 올라탔다. 평소보다 빨리 달리는 소마선에 놀란 배 두 척이 급히 방향을 틀자 연쇄적으로 따라오던 배들 사이에 가벼운 충돌이 생겼다.
반우현은 무시하고 운하를 질주했다.
그동안 ‘연금술’의 핵심을 터득해서 이 도시에 보탬이 되고 싶었지만, 용의 유산은 몇 년 만에 그 비밀을 보여 줄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지난달 손톱보다도 작은, 좁쌀만 한 돌멩이의 표면을 은회색의 재질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칼로 그 부분을 긁어 성분을 확인했더니, 분명히 마력석이었다! 평범한 돌의 일부를 마력석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이다.
문제는 온종일 집중해서 만든 마력석의 양이 너무 적다는 점이었다. 전혀 효율적이지 않았다.
기쁜 나머지 아버지 앞에서 연금술을 보여 준 반우현은 딸의 노력을 칭찬하기는커녕 그럴 바에는 차라리 물의 도시에 남아서 본격적인 계승자 수업을 받으라는 아버지의 충고를 들어야 했다.
‘연금술에 실망을 했기 때문에 나더러 미인계를 써서 황제의 마음이나 훔치라는 말을 한 거야.’
수치로 뺨이 뜨거워졌다.
기분 전환을 위해서 물의 도시를 한 바퀴 크게 돈 반우현의 눈에 마둔수탑이 들어왔다. 의식하지 않았는데도 륜사를 보고 싶었던 것이다.
반우현은 소마선을 맡기고 부탑주실로 올라갔다. 평소 마음에 들지 않던 그 수련사가 부탑주실 앞에 앉아 있었다.
‘저 여자가 보주관인가? 그렇다면 승급 시험에 합격한 모양이구나. 흥, 륜사 오라버니 덕분이겠지.’
“오랜만이야. 륜사 님 있어?”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십니다.”
여화는 이 불청객을 부드럽게 대할 생각이 없었다.
“내가 왔다고 전해 줘.”
“기다리세요.”
“내가 누군지 알 텐데?”
“그래도 기다리셔야 합니다.”
여화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런 여화를 노려보던 반우현이 한바탕 난리를 피우려던 찰나, 부탑주실 문이 열리며 륜사가 나왔다. 반우현이 건방진 보주관에 대해 말하려는데, 또 다른 사람이 륜사를 따라서 밖으로 걸어나왔다. 그 사람을 본 반우현은 말문이 막혔다.
천마 석장명이었다.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하겠네.”
“……생각해 보겠습니다.”
“부탁하네.”
석장명이 손을 내밀자, 륜사가 그 손을 맞잡았다.
두 사람 사이에 무언가 중요한 분위기가 형성되자 반우현은 무슨 일인지 궁금했다. 웬만한 일로는 황제 곁을 떠나지 않는 석장명이 륜사를 만나러 이곳으로 직접 찾아오다니.
석장명은 반우현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가 버렸다.
륜사가 집무실로 들어가자 반우현이 뒤따라 들어갔다. 이번에는 여화가 앞을 가로막지 않았다.
“황명거사께서 왜 오라버니를 찾아온 거야?”
“무슨 일로 온 거냐?”
륜사는 책상 앞에 앉아 서류를 훑으며 물었다.
“오라버니 보러 온 거지.”
“지금은 바쁘니까 나중에 보자.”
“……많이 변했구나.”
반우현은 섭섭해서 눈물을 흘릴 뻔했다.
“내가? 하긴, 변할 만도 하지. 아무튼 지금은 시간을 낼 수 없다.”
륜사는 반우현이 집무실에 있는데도 서류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런 륜사의 모습에 익숙하지 않던 반우현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밖으로 나왔다. 륜사보다 무표정한 보주관 여화가 더 미웠다. 그래도 정보를 얻어 낼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다.
“혹시 뭐 좀 알아? 황명거사가 왜 륜사 오라버니를 찾아온 거야? 아는 게 있으면 좀 말해 봐.”
“안녕히 가십시오.”
여화는 몸을 돌려 집무실로 가 버렸고, 반우현 혼자 남았다.
따라가서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싶은 충동을 겨우 참아 낸 반우현은 고개를 흔들며 아래로 내려와 소마선에 올라탔다. 결국 갈 곳은 집뿐이었다. 누천파가 용금탄에 있는 지금, 그녀에겐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상대가 한 명도 없었다. 술 한잔 하고 싶어도 젊은 여자 혼자서 술을 마시기는 어려웠다.
집에 도착해서 배를 맡긴 반우현은 지하로 내려갔다. 이 저택을 지을 당시에 공간을 마련해서 시설을 갖춘 수련실 앞에 선 그녀는 심호흡으로 마음을 가다듬었다. 어릴 때부터 이곳에 들어서기 전에는 습관처럼 멈춰 서서 분위기를 바꾸었다. 반극권을 익힌 저 수련실로 잡다한 문제를 끌고 가지 말라는 아버지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문을 열고 들어선 반우현은 걸레로 넓은 수련실의 마룻바닥을 닦으며 뭐가 그리 즐거운지 흥얼대는 위연미를 발견했다. 하녀 주제에 언제 어디에 있든 당당한 분위기를 유지하는 위연미는 반우현과 함께 용금탄을 떠나 이곳 물의 도시로 내려왔었다.
반우현은 몰래 위연미 뒤로 다가갔다. 무슨 노래를 부르는지 알고 싶었다. 잠시 귀를 기울인 그녀는 깜짝 놀랐다. 도안집의 ≪역사≫에 선율을 붙여 통째로 외우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걸레를 반대쪽으로 접은 후에는 ≪무무비경≫을 술술 외우는 게 아닌가.
“그걸 언제 다 외웠지?”
“아, 공녀님?”
놀라는 눈치였지만 눈빛이 흔들리거나 뺨이 붉게 달아오르지는 않았다. 위연미는 어떤 조건, 어떤 상황에서도 평소의 분위기를 유지하는, 극소수의 하녀 중 하나였다.
“≪역사≫와 ≪무무비경≫, 심심풀이로 외운 건 아닐 텐데?”
반우현은 골칫거리인 남동생 반중치는 물론 자신까지 저 하녀처럼 쉽게 욀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딱히 할 일이 없어서요.”
“와타는 용금탄에 유행하는 노래를 죄다 알고 있던데?”
“그런 쪽은 제 취향이 아니라서요.”
위연미는 단호하면서도 듣는 사람이 기분 나쁘지 않게 말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너의 취향은 뭐지? 궁금해.”
“몇 번을 곱씹어도 지루하지 않는 거라면 뭐든 다 좋아하는 편이에요.”
그 말에 반우현은 속으로 크게 놀랐다.
용금탄의 저택에 방문하는 귀부인들이 자주 위연미를 가리키며 여동생이냐면서 묻곤 했는데, 하녀라는 사실을 알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귀족 특유의 기품이 흘러나온다면서 특이한 하녀라고 말을 했었다. 저 독특한 취향 때문에 그런 분위기가 느껴지는지도 몰랐다.
평소의 반우현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을 이 순간 선택했다. 대화 상대가 필요했던 것이다.
반우현은 얼음처럼 차가우면서도 노예 특유의 수동적인 면을 간직한 위연미에게 속내를 털어놓았다. 위연미로부터 위로를 받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속 시원히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좋아하시는 걸 하세요.”
한참 듣던 위연미가 말했다.
“뭐?”
반우현은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하녀의 조언은 핵심을 찔렀다! 반우현 본인조차도 우울감에 시달리면서도 이유를 몰라서 답답했던 부분인데.
“공녀님은 수련실에서 무척 밝게 웃으셔요. 미천한 제가 볼 때는 그래요. 공녀님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여자가 무술을 왜 익히냐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좋아하고 즐거운 것을 하는 게 가장 현명한 선택인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