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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라면 패환, 동예, 좌영윤 그리고 평용구 따위를 무시할 수 있을 거야.”
“폐하는 저를 믿으십니까? 어떻게 저를 신뢰하실 수 있습니까?”
“난 그 사람의 현재를 믿지 않아. 난 그 사람의 과거, 그 사람의 역사를 신뢰한다네.”
“…….”
우문에 현답이었다. 역사의 가치는 바로 어떤 인물, 혹은 조직을 판단하는 데 있다. 지금을 속일 순 있어도 과거는 속일 수 없다.
“자넨 이미 내가 왜 자넬 찾아왔는지 예상했을 거야. 자넨 그런 사람이니까. 맞아. 암살 미수 사건 때문이야. 그리고 맹진국의 왕 판금우가 벌이는 위험천만한 도박 때문에 골치도 아파. 지금 사방에서 나를, 제국을 흔들고 있는데 이러다가는 오래 가지 못해. 폭삭 주저앉으면 안 그래도 속으로 칼을 갈던 칠성시가 본색을 드러내겠지. 그러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나? 이 땅에서 한동안 자취를 감추었던 전쟁이 제국을 갈가리 찢을 거야. 그 가혹한 내전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건 물론 백성이야. 하지만 난 그 백성만을 위한다는 고고한 사람은 아니야. 난 내가 중요하거든. 다만, 나 자신을…… 제국의 안위를…… 황실을 지켜야 백성을 전쟁의 고통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난 더 쓰러질 수 없네. 그게 내가 황실의 일원으로 태어나서 지금 이 자리에 앉은 이유가 아니겠나?”
“……폐하.”
“도와주게.”
황제는 솔직했다.
고개를 든 명국영은 만인지상이자 하늘의 아들이라고 불리는 이 황제가 아직 어리다는 사실과 나이에 비해 대단히 지혜롭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왠지 모르게 이 젊은 황제를 보니…… 꿈에서도 잊을 수 없는 그 녀석이 떠올랐다.
단태가 황실에서 태어났다면 바로 저런 모습의 황제가 되어 있을 것 같았다.
명국영은 단태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 시체를 직접 보지 않는 이상, 포기할 수 없었다.
‘단태가 돌아올 때까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뭐든 해야겠지. 그 녀석을 가르치는 스승으로서 부끄럽지 않으려면 말이야.’
“미천한 몸, 제국와 황제 폐하를 위해 바치겠습니다.”
“고맙네, 황정어사.”
황제는 손을 뻗어 명국영을 일으켜 세웠다. 황정어사는 황제 앞에서 부복하지 않아도 되는 직책이었다.
“황송하옵니다, 폐하.”
“두 가지 부탁이 있네.”
황제의 부탁은 곧 황명이었다. 명국영은 정신을 바짝 차렸다.
“하명하십시오, 폐하.”
“난 다음 대의 황마사로 용천마를 생각하고 있네.”
“……네?”
명국영은 황실 예법을 잊을 만큼 깜짝 놀랐다. 황명거사 석장명이 저기 서 있는데, 다음 대의 황마사라니. 그 순간, 명국영은 석장명의 안색이 이전보다 검게 변했다는 점을 깨달았다.
‘아, 석장명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그래서 륜사를 황마사로 생각하는 중이야.’
“맞아. 날 지켜 주던 저분의 삶은 곧 끝나네. 그래서 말인데, 자네가 그 친구를 설득해 주지 않겠나? 실은 3년 전쯤에 황명거사의 경험과 마법서를 미끼로 륜사를 낚으려 했는데, 공교롭게도 륜사가 먼저 여덟 번째 천마가 되어 버렸거든. 그래서 실패하고 말았지. 이번엔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아서 말이야.”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명국영은 강직해서 주위의 분위기에 휘둘리지 않는 륜사라면 황마사의 자리에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또 하나는 이번에 꼭 수룡 유천주를 잡고 싶네.”
“…….”
전혀 예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내겐 우방이 필요해. 칠성시 중 그나마 황실과 관계가 좋은 게 바로 유타루체라네. 내가 이곳에 직접 찾아온 이유는 곧 열릴 용마렵에 힘을 실어 도시의 골칫거리인 수룡을 없애 버려 이 도시가 전적으로 나를 지지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라네.”
황제는 대단히 직선적이었다.
몇 가지를 생각한 명국영이 황제를 쳐다보았다.
“지지한다는 그 말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난 자네가 물의 도시 유타루체의 시장이 되기를 바라네.”
“…….”
누군가와의 대화에서 이처럼 속수무책으로 놀라기만 하다니. 이런 경우는 실로 오랜만이었다. 그만큼 젊은 황제의 심계가 놀랍도록 깊고 예리했던 것이다.
“변화의 시기가 코앞에 다가와 있네.”
“……저항이 만만치 않을 겁니다.”
명국영은 조심스러웠다.
“그럴 테지. 난 앞으로 십 년 후를 내다보고 있네. 황마사가 될 륜사 그 친구가 마둔수탑의 탑주가 된다면 자네가 유타루체의 시장이 되도록 전폭적으로 도와줄 수 있을 걸세. 그리고 이 도시를 지배하는 11인위원회도 정체된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면 새로운 시장을 환영할 걸세. 자네가 수룡 유천주를 없애는 데 공을 세운다면 말이야.”
황제의 지적은 날카로웠다.
현재 물의 도시 유타루체는 죽어 가고 있었다. 도시로 모여드는 사람들은 많은데, 성장이 멈춘 도시는 더 이상 부를 창조하지 못했다. 그 증거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노예 매매였다. 노예 매매는 결국 ‘제 살 깎아먹기’였다.
그게 서쪽 방책 때문이며, 호수 쪽으로 나가지 못하게 만드는 수룡 유천주 때문이었다. 유천주가 사라진다면 이 물의 도시는 마음껏 호수를 누빌 수 있을 테고, 그러면 비약적으로 성장할 터였다.
황제는 단순히 그 부분만 염두에 둔 게 아니었다. 오히려 륜사가 마둔수탑의 탑주가 된다는 내용이 충격적이었다. 어쩌면 황제는 마둔수탑의 계승자 누천파를 용의 상속자라는 이유로 황실에 잡아 두면서 마둔수탑을 팔마탑의 일원으로 용금탄에 끌어 올린 3년 전의 결정도 이런 계획의 일부로 실행했는지도 몰랐다.
‘보통 인물이 아니야.’
명국영은 속이 서늘해졌다.
“아, 그건 그렇고, 그 아이는 아직도 못 찾았나?”
“……그 아이라니요?”
“용의 유산을 거절한 그 종자 말이야.”
“아, 단태를 말씀하신다면…… 아직 흔적도 찾지 못했습니다.”
“자넨 아직 그 아이가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쉽게 죽을 아이가 아닙니다.”
명국영은 힘을 주어 말했다. 바로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자네 같은 사람에게 인정을 받았다면, 평범한 사람은 아니겠군. 나도 자네처럼 그 아이가 살아서 돌아오기를 빌겠네. 황실에서 태어나 숱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 녀석처럼 엉뚱한 사람은 아직까지 못 봤어. 요즘처럼 답답하고 속이 꽉 막힌 기분일 때, 그 녀석이 생각나. 자네, 기억하나? 그 녀석이 날 처음 보고 했던 말 말이야.”
“……성은이 망극하……셔야…… 할…… 겁니다.”
명국영은 당시 단태의 말투를 그대로 흉내 냈다. 단태는 당황한 나머지 황제에게 그런 말을 했던 것이다.
“크크, 맞아. 바로 그렇게 했어. 내가 사흘 동안 배를 잡고 웃었다니까. 황실에는 그런 녀석이 없어. 다들 틀에 박힌 말과 행동만 하거든. 아무튼, 자네에게 기대가 커. 부디 이번 일을 함께 성공시켜 보세.”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폐하.”
황제는 고개를 숙인 명국영의 어깨를 툭툭 만지고는 석장명과 함께 방책을 내려갔다.
혼자 남은 명국영은 다리에 힘이 빠져 방책을 기대고 주저앉았다. 보이지 않는 소용돌이의 굉음이 들리는 것 같았다. 권력의 암투가 벌어지는 욕망의 소용돌이였다.
이번 용마렵을 통하여 3년 전의 그 재앙을 잊고 다시 도시를 장악하려는 시장 반명의 계획을 다른 방식으로 이용하여 오히려 도시를 빼앗으려는 황제의 의도는 성공할 수 있을까?
11인위원회는 과연 황제의 편에 서서 반명을 버릴까?
륜사는 황제의 뜻을 따라서 황마사가 될까?
그런 후에 사형 누마탄을 쫓아내고 마둔수탑의 수장이 될 수 있을까?
내일 암혼빙마 백탁이 물의 도시에 도착한다. 수령사탑의 사령마 만표도 내일 저녁, 혹은 모레 새벽에 유타루체에 도착할 거라고 수정구로 연락을 보내왔다. 평환탑의 광마 종만추, 은후성탑의 음마성 율암, 천광탑의 백휘섬선 광오선까지. 패용녹탑의 은림자 차명을 제외한 천마들이 며칠 내에 이 도시로 몰려올 것이다.
무려 일곱 명의 천마들이 한자리에 모인 셈이다.
거기에 황제까지.
이번 용마렵은…… 그저 도시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벌이는 의식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