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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이번 기회에 수룡 유천주를 없애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물의 도시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 테고, 이전 지배자인 반명과 그 가문은 도시에서 쫓겨나지는 않더라도 그 지위를 잃어버리고 말 터였다.
“정말 변화의 시기야.”
갑자기 술 생각이 간절해졌다. 혼자 술을 마시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다.
그래야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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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에게도 ‘성격’이 있었다.
다 큰 남녀가 맞선 자리에서 만나면 어색해서 무뚝뚝한 대화가 오가지만 시간이 흐르면 분위기가 좋아지듯 취풍장령도 마찬가지였다. 미묘한 속내의 변화를 알려 주는 건 바람이었다. 단태는 그 바람을 민감하게 느낄 수 있었고, 바람의 세기로 정령의 기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면 미풍이 불었다. 분노를 일으키는 이야기에는 사나운 돌풍으로 반응했다. 비꼬는 말에는 회오리바람으로 기분을 드러냈다.
그런 정령의 방식을 단태도 흉내 내기 시작했다. 일종의 바람의 언어였다. 말 한마디 없이 바람으로만 주고받는 대화는 기이하지만 오히려 더 풍성한 의미가 담겼고, 단태는 더 깊이 바람의 정령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바람은 그냥 바람이었다. 바람을 뜻하는 단어도 몇 개밖에 몰랐다. 미풍, 강풍, 돌풍, 태풍 등이었다. 그러나 취풍장령을 소환하여 독특한 대화를 나누면서 단태는 바람으로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바람은 하나의 깊고 넓은 세계였다.
단태는 다음 단계로 접어들었다.
취풍장령을 소환한 상태에서 비천단령을 불러낸 것이다. 계급이 낮은 비천단령은 취풍장령의 눈치를 보느라 단태 곁으로 접근하지도 않았다. 단태는 두 정령의 태도를 통하여 적지 않은 지식을 배울 수 있었다.
그다음은 물의 정령 차례였다.
수탄왕령과 계약을 맺은 단태는 어렵지 않게 물의 정령 중 세 번째 계급인 세산장령을 소환할 수 있었다. 취풍장령이 공중에 떠 있는 반투명한 여인이라면 세산장령은 뚝뚝 물방울이 떨어지는 건장한 남자의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단태의 예상대로, 두 정령은 서로를 의식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상대를 모른 척했다. 오직 소환자만 쳐다봤는데, 단태는 짓궂은 장난을 쳐서 두 정령을 자극했다. 취풍장령에게는 세산장령을 바람으로 날려 버리라고 요구했고, 세산장령에게는 물로 벽을 만들어 취풍장령을 가두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무시할 수 없는 마력 소모로 인한 고통을 참으면서 단태는 두 정령의 다툼을 관찰했다. 한 가지는 확실했다. 물의 정령과 바람의 정령은 완전히 다른 세계에 속한 존재였다. 바람의 정령이 있는 세계에 물의 정령이 존재하지 않았고, 반대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얼마나 많은 세계가 존재한다는 뜻일까?
얌전한 태도를 벗어던지고 본격적으로 싸우는 정령들을 겨우 뜯어 말려 각자의 세계로 돌려보낸 단태는 정령과 계약을 맺을 때 사용하는 마법진을 들여다보았다. 마간에 쌓인 마법서를 통하여 얻은 지식을 그 마법진에 적용하니, 계약의 작동방식 중 일부를 이해할 수 있었다.
특정한 형태의 마력은 ‘진실’에 반응하고 ‘정신’에 영향을 미친다.
놀라운 발견이었다. 단태는 대마법사 아레마고가 쓴 ≪지완수≫라는 두툼한 책에서 읽은 내용을 떠올렸다.
[편지]정신이 형성되는 시기에 해당하는 아이는 어른, 특히 엄마의 말을 깊이 받아들인다. 어린 아이에게 퍼붓는 비난은 단순한 비난이 아니라, 아이의 운명을 결정하는 저주다. 쓸모없는 놈이라는 말을 어린 시절에 들은 사람은 평생 그 말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 그 비난이 정당하든, 아니든 머릿속에, 정신 깊숙이 박혀 아무리 훌륭한 어른이 된다고 해도 마음 깊은 곳에서 울리는 그 비난의 목소리가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문제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로 평생 고통으로 신음한다.
이 독특한 마법, 위대한 존재들이 ‘언마’라고 이름 붙인 특별한 마법은 그보다 더 강력한 각인 효과를 보장한다. 단순한 각인이 아니라, 존재 자체를 바꿀 수도 있다.
정령과의 계약에 필요한 소환마법진은 언마에 필요한 마력을 형성할 뿐, 계약 자체와는 관련이 없다. 계약은 정령과 인간 사이의 대화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계약을 맺겠다는 인간의 대답이 두 존재 깊숙이 새겨지는 동시에, 두 존재를 본질적으로 연결시킨다. 계약 과정에서 말은 더 이상 단순한 목소리가 아니다.
말이 곧 마법이다.
언어가 곧 마법이다.[편지]
마지막 문장을 기억해 낸 단태는 주먹을 꽉 쥐었다. 왜 언어가 마법인지 알 수는 없지만, 작하족의 과정에 숨겨진 비밀은 알아낸 셈이다. 이제 작하족에 사용되는 마법진을 뜯어보고 분석하여 그 기능을 확인하기만 하면, 어떤 식으로 용과 하족이 연결되는지 알 수 있고, 그 과정을 통하여 설고를 도와줄 수도 있을 것이다.
단태는 벌떡 일어나 용옥간 밖으로 나갔다. 유천주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마음이 급해서 점점 달리는 속도가 빨라졌다. 거미 한 마리를 본 단태는 벽을 타고 올라가 그 굼뜬 거미를 뛰어넘었다.
“어?”
주혈의 문이 열려 있고,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유천주는 자기만의 영역을 대단히 중시하는 용이었다. 그런 점에서 가짜 할아버지였던 엄포윤과 흡사했다. 무언가 정신을 빼앗을 만한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이런 식으로 문을 열어놓고 나갔을 리가 없다.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단태는 수업이라는 명목하에 고문을 당하기 위해 주혈에 자주 들락거렸지만 자유롭게 돌아다닐 권리는 없었다. 그래서 평소 유천주가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지 몹시 궁금했다.
세련된 조각품이 벽 곳곳에 자리 잡은 통로를 걸어가자, 꽤 큰 공간이 나왔고, 거기 벽에는 문이 일곱 개나 달려 있었다. 저 문 너머에 유천주의 비밀이 숨어 있다고 생각하자 단태는 호기심을 참을 수가 없었다.
첫 번째 문을 열었다.
수십 종류의 설명 불가능한 냄새가 한꺼번에 코를 자극하자 단태는 시야 확보가 어려운 곳으로 선뜻 들어갈 수 없었다. 서서히 눈이 어둠에 적응하자 그 방의 규모가 눈에 들어왔다.
마법으로 공간 자체를 확장시킨 느낌이 들 정도로 거대한 방에는 크고 작은, 뼈 재질의 우리로 가득 차 있었다. 심지어 계단을 통하여 구분된 층이…… 하나, 둘, 셋…… 일곱 개나 있었다. 족히 수백 개의 우리가 층을 따라 놓여 있었다.
단태는 유천주에게 잡혀 와서 한동안 갇혀 있었던 뼈 우리를 떠올렸다. 같은 재질의 우리였다.
“아!”
그리 멀지 않은 우리 너머에 있는 동물이 무엇인지 머릿속에 빼곡히 들어찬 지식을 통하여 찾아냈다.
열각수였다.
붉은 털로 뒤덮인 몸, 나선형으로 꼬인 뿔도 피처럼 빨간 색이었지만 열각수의 진홍색 눈이야말로 한 번 보면 고개를 돌릴 수 없게 만드는 원인이었다.
몸집 큰 사슴을 닮은 열각수는 단태를 보더니 냅다 돌진해서 우리의 창살을 뼈로 박았다. 뼈 재질의 창살에서 타는 냄새가 났고, 그 붉은 뼈에서는 연기가 피어올랐다.
단태는 깜짝 놀라 한 걸음 물러섰다.
전설의 동물로 알려진 열각수가 왜 여기 있을까? 유천주가 예간에 잔뜩 쌓인 예술품처럼 수집한 것일까?
열각수 옆에는 염묘족이 갇혀 있었다. 노란색이 섞인 붉은 눈을 가진 조그만 고양이를 본 순간, 단태는 눈이 뜨거워져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그제야 염묘족이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 깨닫고 고개를 돌리려 했으나 목은 뻣뻣하게 굳어 있었고, 눈꺼풀은 내려올 생각이 없었다. 염묘족은 시선을 통하여 열기를 전달하여 상대를 죽일 수 있었다.
단태는 물로 반투명한 방패를 만든 후에야 그 강렬한 눈빛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마터면 두 눈을 잃을 뻔했다.
염묘족을 쳐다보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1층에 있는 우리 속 동물을 살폈는데, 전체적으로 붉은 색깔을 띠고 있었고 몸 전체 혹은 일부에서 열을 발산하고 있었다. 어떤 녀석은 숨을 내쉴 때마다 조그만 불꽃이 콧구멍을 통하여 터져 나오기도 했다.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가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저건 천강백우잖아.”
몸집이 큰 흰 소는 커다란 우리 중앙에 서서 무언가를 씹고 있었다. 하얀 뿔에는 고드름이 맺혀 있었고, 아래에서 올라오는 열기 때문인지 그 고드름에서 물방울이 똑똑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있었다. 천강백우는 뿔에 닿는 것은 무엇이든 즉시 얼릴 수 있었다.
근처에는 얼굴은 검지만 몸은 은색인 짐승이 단태를 보자 깜짝 놀랄 만큼 크게 포효했다. 공간 전체가 울리자, 수백 마리의 동물이 저마다 다른 소리로 울어 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