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150화 (150/293)

<-- 150 회: 4-27 -->

“아, 알았다!”

피부가 유난히 까무잡잡한 여자가 손뼉을 치자, 다른 사람들이 그 여자를 주목했다. 그 시선을 즐긴 후에 여자가 말했다.

“유천주는 저주에 걸린 거야. 저주에 걸리면 지적 능력이 떨어진다면서? 말 못 하는 짐승처럼 행동할 수도 있다잖아? 그러니 우리가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야 돼. 얼마나 힘들겠어? 부족한 머리로 그 어려운 마법을 익히려니 말이야. 어쩌면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빠르게 마법을 익히고 있는지도 몰라. 안 그래? 원래는 천 년이나 걸릴 걸, 백 년으로 줄였는지 누가 알 수 있겠어?”

그 말에 이전보다 훨씬 큰 웃음이 그곳을 채웠다.

화가 난 유천주가 큼지막한 발을 들어 그 말을 한 여자를 짓밟으려 했는데, 옆에 있던 남자가 손을 흔들며 뭐라고 속삭이자 유천주는 기이한 힘에 휘말려 허공으로 떠올랐다가 쿵 소리를 내며 뒤집힌 채 나뒹굴었다. 몇 번이나 공중으로 들어 올려졌다가 바닥으로 추락하기를 반복하자, 그 커다란 파란색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흘렀다.

그때, 늠름한 중년 사내가 공동으로 들어섰다.

“뭐 하는 거지?”

“…….”

유천주를 놀리던 사람들, 아니 용들은 마치 노련한 지휘관 앞에 선 병사들처럼 몸을 곧추세웠다. 그 바람에 유천주는 그 힘에서 해방되어 바닥에 쿵 떨어졌다.

철썩.

사내가 유천주를 비웃던 남자, 여자 들의 뺨을 때렸다. 잔상조차 남기지 않을 만큼 빠른 사내의 손에 그들 중 누구도 피하지 못했다.

“저주로 분위기가 뒤숭숭한 이때에 동족을 괴롭히다니. 난 유천주의 명룡으로서 너희들 전부를 죽일 권한이 있다. 또한 그럴 능력도 있고. 한 번만 더 이런 광경을 내가 본다면 용오군의 분노를 받는 한이 있더라도 너희들의 심장을 꺼내어 터트릴 것이다.”

“……죄송합니다.”

“썩 꺼져라!”

그 말에 이제 갓 잠룡에서 초룡의 단계로 올라선 젊은 용들은 순식간에 공동을 빠져나갔다.

공동에는 암탄주와 유천주만 남아 있었다.

“……죄송해요.”

유천주가 고개를 숙였다.

그때, 암탄주가 공중으로 몸을 날리더니 유천주의 가슴에 손을 찔러 넣었다.

“아악!”

고통으로 비명을 내지르는 유천주는 자신의 명룡인 암탄주의 손이 심장에 닿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조금만 힘을 준다면…… 심장이 터지고, 자신은 죽고 말 것이다.

“넌 오늘 내 손에 죽었다. 이제 넌 나의 잠룡이 아니다. 난 네 명룡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게 말한 암탄주는 심장을 놓아주고 뒤로 훌쩍 뛰어내렸다.

유천주는 가슴이 꿰뚫린 고통보다 암탄주에게 버림을 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더 아팠다. 명룡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면 초룡이 될 수 없다! 초룡이 되지 못하면 영영 용으로 인정받을 방법이 없다! 암탄주의 저 선언은…… 자신을 더 이상 동족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한 번만 다시…….

“난 결정을 내렸다.”

냉정한 암탄주.

“……알겠습니다. 하지만 언젠가 후회하실 겁니다.”

“그렇게 만들어 다오.”

암탄주는 돌아서서 공동을 나갔고, 홀로 남은 유천주는 숨을 헐떡이며 눈물을 흘렸다.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현실로 돌아온 단태는 숨을 헐떡거렸다. 용옥의 특성상 마치 자신이 유천주가 되어 그런 경험을 한 셈이어서 가슴 언저리가 아팠던 것이다. 고통이 가라앉자 또 다른 의미의 충격에 휩싸였다.

고룡 암탄주가 유천주의 명룡이었다니!

게다가 버림을 받았다니!

가끔 유천주에게서 느낀 뒤틀린 광기의 원인이 바로 이 용옥 안에 담긴 기억이라고 단태는 확신했다. 약한 존재를 감싸주기는커녕 오히려 힐난하고 독설을 퍼붓기 좋아한다는 점에서 용도 인간과 다를 바가 없었다. 모든 용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다수의 용은 인간처럼 약자를 비웃는 데 익숙했던 것이다.

유천주는…… 명룡도 없이 혼자 잠룡의 단계를 벗어났으리라.

한계를 넘어서는 노력으로.

어쩌면 그런 비정상적인 과정을 힘겹게 걸어왔기 때문에 저주에 걸렸는데도 고룡 암탄주보다 오랫동안 살고 있는지도 몰랐다. 자기가 버린 잠룡이 이런 식으로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암탄주가 알았다면 십중팔구 후회했을 것이다.

다른 용옥들도 있었지만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하나 같이 유천주의 쓰라린 기억들이 담겨 있을 것 같았다. 그를 존중하고 싶었다. 역경을 극복해낸 유천주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한 것이다.

란조의 조그만 머리를 손가락으로 살짝 긁어 준 단태는 마지막 문 앞에 섰다. 유천주의 기억을 엿본 그는 저 문을 열지 않고 용옥간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호기심이 결국 자제력을 이겼다. 그는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었다.

“어?”

방이 아니라,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강화된 시력으로도 끝이 안 보이는 계단이었다.

‘어쩌지?’

망설임은 잠시뿐이었다.

호수 바닥 아래 유천주의 용혈로 끌려온 이후, 오늘처럼 유천주에 대하여 진실을 알아낸 적은 없었다. 이 기회를 놓친다면 언제 또 이런 순간이 찾아올지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운이 좋다면 용혈을 감싸는 그 기괴한 막을 통과하여 바깥으로, 도시로 돌아갈 수 있는 정보를 얻을지도 모른다. 그런 가능성은 포기할 수가 없었다.

단태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몇 번 방향이 꺾였는데, 의외로 그리 깊지는 않았다.

통로가 나타났고, 그 끝에 문이 있었다.

단태는 거기로 가서 섰다. 문을 열 것인가, 아니면 포기하고 올라갈 것인가. 이번에도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는 문을 열어젖혔다.

“…….”

예상을 뛰어넘는 광경이 펼쳐졌다.

수백 마리의 거미들이 희미한 빛이 내리비치는 공간에서 무언가 작업을 하고 있었다. 언뜻 보니 거미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복잡한 마법진의 형태를 만들고 있었다.

자세히 보기 위해 벽에 달린 계단으로 내려가니, 마법진은 생각보다 규모가 컸다. 시청을 몽땅 옮겨 놓아도 될 만큼 넓은 공간 전체가 마법진으로 덮여 있었던 것이다. 마법진을 이루는 선은 매우 깊어서 성인 남자가 빠지면 자기 힘으로는 올라올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틈을 뛰어넘어 마법진의 중심으로 다가가던 단태는 깜짝 놀라 멈춰 서고 말았다.

마법진 중앙에…… 사람들이 있었다.

열 명 남짓한 사람들이 밧줄에 묶여 있었다.

“어때?”

옆에서 들린 목소리.

이미 누가 와 있는지 알고 있었던 단태는 몸을 돌려 유천주를 노려봤다.

“……이게 뭡니까?”

“보다시피.”

젊은 여자의 모습을 한 유천주는 뿌듯한 표정으로 주위를 가리켰다.

“모르겠습니다만.”

“결존계야.”

유천주는 얄밉게 말했다.

결존계는 작하족에 이용되는 마법이었다. 용이 일생에 단 한 번 펼칠 수 있는 그 마법을 통하여 하족과의 계약이 성립되었다. 결존계에 대해서는 이미 몇 번이나 유천주에게서 들었고, 그 과정은 직접 용옥을 통해 본 적도 있었다.

결존계는 당하는 입장에서는 결코 환영할 만한 과정이 아니었다. 혈마주는 두더지를 하족으로 삼기 위해 무려 백 마리의 두더지를 희생시킨 후에야 결존계를 발동시켰고, 계약을 맺을 수 있었다. 결존계는 피의 마법이었던 것이다.

여기 있는 마법진이 발동된다면 저기 마법진 중앙에 있는 사람들은 모조리 마법진에 피와 살이 빨려 죽을 것이다.

“난 결존계를 실행할 생각이 없습니다.”

단태는 계약 당사자의 의지 없이는 결존계가 발동되지 않는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럴까?”

유천주는 자신만만했다.

“……설마?”

“맞아. 네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열어본 그 여섯 개의 문 안쪽에 각각 결존계에 필요한 마법진이 교묘하게 설치되어 있었어. 넌 스스로 결존계를 발동시킨 거야. 난 널 억지로 데려오지 않았어. 너 스스로 그 방을 다 둘러보고 이곳으로 내려온 거야. 안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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