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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태는 유천주를 노려봤다.
교묘한 함정이었다.
일부러 문을 열어서 끌어들이다니! 더 놀라운 건, 자신의 치부라 할 수 있는 과거의 기억까지 보여 주면서 이런 함정을 준비했다는 사실이었다. 누구든 쓰라린 과거는 감추고 싶어 하는 게 정상이다.
“넌 용족 역사상 최초로 인간을 하족으로 삼는 용이야. 너로 인하여 용족의 미래가 달라지겠지.”
유천주는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위험을 파악할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흥, 내가 네 속셈을 모를 줄 알아? 넌 인간을 하족으로 삼을 생각이 없어. 그저 그 천박한 하얀 거미에게 자유를 찾아 주려는 거지.”
단태는 말문이 막혔다. 저 용은 다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가만히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대체 왜 인간을 하족으로 삼으려는 겁니까? 위험하다고 말했잖습니까? 설마, 그 기억 때문입니까? 동족에게 비웃음을 당하고, 명룡에게 버림을 받아서 그런 겁니까?”
“아니라고 할 수는 없어.”
유천주는 순순히 인정했는데, 단태는 그게 더 무서웠다. 날뛰는 미치광이는 상대하기 쉽다. 차분하게 행동하는 광인이야말로 조심해야 할 대상이었다.
“용족의 부활을 위해서라도 이런 행동은 해선 안 됩니다.”
“바로 용족의 부활을 위해서 이런 행동을 하는 거다.”
“……무슨 뜻입니까?”
“네 평소 생각에도 일리가 있어. 인정해. 인간은 과거의 실수, 잘못을 반성하면서 역사를 바로세우고, 그 과정을 통하여 미래를 창조해 나가잖아. 용족과는 다른 방식이지. 용족에겐 그 방식이 필요해. 당장. 그만큼 상황이 좋지 않으니까. 그러니 그런 능력을 가진 인간을 하족으로 삼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야. 안 그래?”
“…….”
논리적인 결론이라서 순간 반박할 수가 없었다.
“결존계가 이루어지면 인간들이 네게로 몰려들 거야. 넌 하족의 주인으로 그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지. 넌 그저 그들로 하여금 저주의 원인과 해결책을 찾아내라고 지시를 내리면 돼. 그러면 하족이 된 인간들은 모든 것을 쏟아부어 그 지시를 이행할 거야. 상상해 봐. 수백, 수천 명의 인간들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맹렬히 돌아다니는 광경을. 인간 중에는 똑똑한 놈들도 제법 많으니, 의외로 문제가 빨리 해결될지도 몰라.”
그 말을 듣자, 단태는 용족의 고질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용은 타고난 힘과 지혜를 갖춘 위대한 종족이지만, 실제적인 문제를 직접 해결할 생각 자체가 없는 기괴한 종족이기도 했다. 용족의 생존이 달린 이 중요한 문제마저 다른 종족에게 맡기려 한다는 사고방식 자체를 단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용족은…… 오랫동안 이런 식으로 살아왔어. 생각하는 방식을 바꾸기엔 늦은 거야.’
“제가 저주를 풀 테니, 결존계를 멈춰 주십시오.”
“내 힘으로도 어쩔 수 없어. 이미 발동되었으니까. 앞으로 열흘이야. 열흘 후면 넌 최초로 인간을 하족으로 삼은 용이 되는 거야.”
그 말을 들은 단태는 유천주에게 달려들었지만, 이미 준비를 한 유천주에게 명치를 맞아 쓰러져 마법진을 이루는 틈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란조가 달려들어 눈을 쪼았지만 유천주가 뻗은 손에 잡혔다.
단번에.
유천주가 위에서 틈에 처박힌 단태를 내려다보았다.
“넌 현룡 무한주 이후 최고로 위대한 용이 될 거야. 바로 내가 널 그런 용으로 만들 테니까. 기대해.”
신음을 흘리며 몸을 일으키던 단태는 어느새 바닥과 벽에서 덩굴 같은 것이 튀어나와 몸을 옥죄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화융과 흡사한 검붉은 덩굴이었다. 결존계 마법진이 그를 붙잡은 것이다.
심장에 깃든 마력을 한꺼번에 끌어내어 돌풍을 일으켜 덩굴은 물론 이곳의 마법진까지 날려 버리려 했던 단태는 심장 밖으로 쏟아져 나온 마력이 그 덩굴을 통해 마법진으로 흘러가버리자 깜짝 놀랐다. 그 마력 때문인지 마력진이 웅웅 진동하기 시작했다.
‘……결존계 발동이 빨라졌어.’
위를 쳐다봤다.
유천주는 이미 가 버리고 없었다.
‘큰일이야!’
단태는 점점 더 많은 덩굴이 몸을 덮자, ‘생각’에 집중하려 했으나…… 곧 정신마저 마법진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잠시 후, 푸르스름한 색으로 변한 덩굴에 둘러싸인 단태는 찬란한 날개를 펼칠 날을 기다리며 스스로 번데기가 된 애벌레처럼 꿈을 꾸고 있었다.
인간에게는 악몽인 꿈이었다.
*결존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시간의 흐름도 느낄 수 없었다.
나는 누구지?
여기는 어디지?
질문만 공허하게 메아리칠 뿐이었다.
이름 하나가 기적적으로 생각났다. ‘단태’라는 이름이었다. 왜 그런 이름일까? 멋진 이름도 많은데. 멋진 이름? 어떤 이름이 있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오직 단태라는 이름 하나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는 단태야.
그래, 단태.
평온함이 느껴졌다. 그 이름은 꼭 맞은 옷을 입은 것처럼 편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이름 외에는 막막했다.
좁은 방에 갇힌 느낌, 불길했다.
순간, 많은 것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아니, 거대한 폭포수처럼 기억의 파편들이 쏟아졌다.
어릴 때 숲을 돌아다니다가 사냥꾼의 함정에 빠졌던 기억.
왜 그 기억이 떠오를까?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단태는 이미 시간과 공간을 거슬러 거기에 가 있었다.
흙벽은 물기로 젖어 미끄러웠다. 기어오를 수 없는 흙벽 아래는 진흙탕이었고, 그 진흙탕에 젖은 바지는 무거웠다. 어린 단태는 바지를 벗어 한쪽으로 던졌다. 그런 후에 소리쳤다. 살려 달라고. 그러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구덩이 안으로 비치던 빛이 사그라지자 어둠이 몰려와 함정을 뒤덮었다.
처음으로 겪은 지옥 같은 시간.
단태는 어린 시절의 자신을 쳐다보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저렇게 생겼었나? 지쳐서 쓰러진 어린 단태, 그가 보기엔 멍청한 애송이였다. 조금만 정신을 차리면 흙벽 곳곳에 도드라진 나무뿌리를 단단히 잡고 함정 밖으로 기어 올라갈 수 있을 텐데.
그토록 무서웠던 곳이어서 거의 몇 년 동안 그 함정이 있던 곳으로는 접근하지 않았는데, 이제 보니 조그만 구덩이에 불과했다. 물론 키도 작고, 힘도 약한 아이에게는 치명적일 수도 있겠지만.
다음 날 오후 늦게 단태는 함정을 확인하러 온 사냥꾼에게 발견되어 구조되었는데, 한동안 아무런 말도 못 할 만큼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또 다른 기억이 떠올랐다.
돌담에 기어올라 놀다가 떨어져 다치는 바람에 울면서 집으로 돌아갔었다.
알록달록한 옷을 입고 자랑하는 친구 때문에 집으로 가서 똑같은 옷을 사 달라고 했다가 오랜만에 집에 들어와 있던 아버지에게 맞아서 정신을 잃은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번개가 친 것처럼 ‘최근의 기억’이 생각났다.
물의 도시 유타루체에 도착한 바로 그날, 아버지라는 호칭이 부끄러운 그 작자에게 속는 바람에 엄마는 물론 여동생과 자신마저 노예 신세가 되고 말았다. 늙은 마법사에게 팔려간 단태는 우여곡절 끝에 륜사라는 멋진 마법사의 종자가 되었고, 고룡 암탄주에게 선택된 세 명의 상속자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용의 유산을 거절해 버린 단태는 물의 도시로 내려와 종자장이 되었다.
그러다가 일이 벌어졌다.
륜사가 자리를 비운 틈을 노려 시장의 지시를 받은 방단이 움직여 단태를 데려다가 고문을 한 것이다. 진짜 일은…… 그 후에 터졌다. 유천주가 방책을 넘어 도시로 들어와 난동을 부렸는데, 그 때문에 시청이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도시를 파괴한 유천주는 용수에도 녹지 않는 단태를 데리고 호수 밑바닥의 용혈로 돌아왔는데, 단태는 인간이 아닌 용으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그래, 지금 난…… 결존계 속에 있어. 아무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 건 아마 결존계 때문이겠지.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유천주가 원하는 대로 그 마법진에 갇힌 인간들의 생명력을 빨아들일 뿐 아니라…… 인간을 하족으로 삼게 될 거야. 그건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