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 회: 4-29 -->
그 순간, 앞에서 햇볕에 바싹 마른 천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다음에는 건물 외벽 갈라지는 소리였다. 옆에서도, 뒤에서도, 위에서도 그리고 아래에서도 들렸다.
어둠이 갈라지며 환한 빛이 하늘을 수놓는 번개의 형상처럼 안쪽으로 비쳐들었다. 그때서야 단태는 자신이 허연 액체에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때는 안쪽을 가득 채웠을 그 액체는 말라가고 있었고, 갈라진 틈으로 들어온 신선한 공기 때문에 그 속도는 더 빨라졌다.
곧 액체는 말라붙었다.
단태는 몸을 움직이고 싶은, 여기서 나가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갈증으로 몸이 물을 원하는 것과 같았다. 그 충동 자체가 이유였던 것이다.
힘겨웠다.
약간만 움직여도 온종일 허리를 숙이고 낫으로 밀을 벤 것처럼 힘들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포기할 수 없었다. 충동이 그를 내몰고 있었다. 그는 채찍이 궁둥짝을 후려치는 바람에 비명을 지르면 질주하는 말을 떠올렸다. 자기 신세가 그와 같다는 생각에 웃음을 터트렸는데, 실제로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가 없지만, 어림짐작으로 족히 열흘 이상 몸부림을 친 것만 같았다. 어릴 때 갇혔던 그 함정에서 하루 만에 빠져나올 때도 눈물 나게 기뻤는데, 열흘이나 이 좁은 곳에 갇혀 있다가 밖으로 나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몸부림을 칠수록 틈은 커졌다.
틈이 커지면 바깥에서 밀려들어 오는 공기에 밴 향긋한 냄새도 더 강렬해졌다. 바깥 어딘가에 꽃밭이 있는 모양이었다.
틈이 커지면서 벽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자,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빛이 몰려와 안쪽을 밝혔다. 그제야 단태는 자신을 볼 수가 있었다.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니, 그는 비명을 지르고 있는데……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언젠가 자고 일어났더니 직접 키우던 개로 변해 버린 남자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평소 개를 볼 때마다 발로 차고, 몽둥이로 때리던 남자는 결국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아내에 의해 쫓겨났고, 눈에 띄기만 하면 달려들어 주먹을 휘둘렀던 비쩍 마른 거지에게 먹혔다. 배가 고픈 거지는 개도 사양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이야기에 겁을 잔뜩 집어먹는 바람에 한동안 잠을 설쳤다. 혹시 자고 일어났는데 개가 되지는 않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엄마가 며칠이나 그런 일은 없다고 웃으면서 말해 줬는데도 여전히 침대에서의 잠은 그리 편하지 않았었다.
이 순간, 단태는 개가 된 남자가 부럽기까지 했다.
이건…… 벌레였다.
끔찍하게 생긴 벌레.
‘침착하자. 이건…… 그러니까…… 꿈과 같은 거야. 난 결존계에 묶여 있어. 난 지금 마법진이 실행되는 동안에 꿈을 꾸는 거야.’
그런 생각도 그리 위로가 되진 않았다.
주름진 배, 각진 여섯 개의 다리, 기이할 정도로 많은 것이 보이는 시야, 그리고 무너진 벽 너머로 보이는 세상.
녹색으로 물든 지평선이 눈에 들어왔다. 끝없이 펼쳐진 들판을 보자 저기에 밀을 키우면 엄청난 부자가 될 것 같았다. 지대가 높은지 굽이굽이 흐르는 강물이 보였는데, 물이 부족하지 않으니 농사에는 이보다 더 좋은 땅이 없으리라.
지평선은 시야의 오른쪽을 차지하고 있었다. 왼쪽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장면이었다.
일단 거대한 나무가 보였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면서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나무였다. 잎 하나가…… 집 한 채보다 컸고, 나뭇가지는…… 물의 도시에서 본 마법의 탑처럼 굵게 뻗어 있었다. 게다가 나뭇가지 곳곳에는…… 큼지막한 자루 같은 게 붙어 있었다. 그 자루는 셀 수도 없이 많았다. 언뜻 봐도 수천 개, 어쩌면 수만 개가 될지도 몰랐다.
어릴 때 자주 건드리고 다녔던 번데기를 닮은 그 자루에서 날개가 하얀 나비가 빠져나와 날개를 천천히 움직였는데, 은근히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 커다란 나비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여력은 없었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깨달았던 것이다.
‘……설마?’
여섯 개의 다리, 주름진 검은 배, 그리고 떨어져나간 벽.
단태는 눈을 감았다. 아니, 감으려 했지만 감을 수가 없었다. 이 빌어먹을 나비는 눈을 감을 수도 없는 모양이었다!
이제까지 갇혀 있던 그 어둠은…… 번데기 안이었다.
충동적으로 몸부림을 쳐서 밖으로 나가려 했던 자신은…… 한 마리 나비였다.
그런 생각을 하는데도 충동은 자기 길을 걷고 있었다. 어느새 무너진 벽 쪽으로 이동한 단태는 그 굵고 큼직한 나뭇가지에 앉아 천천히 날개를 펼치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봤다.
나비들이 번데기에서 빠져나오느라 안간힘을 다 쓰고 있었다. 그 좁은 곳에 갇혀서 때를 기다린 나비가 힘겹게 번데기 밖으로 나온다는 사실은 이미 오래 전에 알았지만, 직접 경험하기 전에는 이토록 힘겨운 사투를 벌이는지 상상도 못 했다.
단태는 그저 꿈이라도, 꿈에 불과하다고 되뇌었다. 그러지 않으면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날개가 다 말랐다. 은색의 날개에는 주홍색 반점이 박혀 있었다. 얇은 날개를 움직이자 기이한 흐름이 느껴졌다. 실바람에도 결이 있었다. 날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지만 이번에는 그 충동을 억누르는 데 성공했다.
나비 한 마리가 너풀너풀 날아서 다가와 주변을 맴돌았다. 마치 나는 이렇게 잘 나는데, 넌 그게 뭐냐? 이런 식으로 놀리는 것만 같았다.
바로 그때, 나비 신세가 된 단태에게 유천주나 다를 바 없는 커다란 형체가 빠르게 다가오더니 그 나비를 물고 가 버렸다.
믿기 어렵지만 그 형체는 어릴 때 덫을 놓아 자주 잡아서 불에 구워 먹었던 평범한 산새였다. 먹잇감으로 이제 막 번데기에서 빠져나온 미숙한 나비를 골랐던 것이다. 그 산새의 등장에…… 난리가 났다. 모여 있었던 나비들이 사방으로 날아갔던 것이다.
단태는 자신도 모르게 나뭇가지에서 벗어나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너무도 가볍게.
충격은 사라졌다.
날고 있다는 사실이 주는 이 만족감은 처음 느끼는 쾌감이었다.
어릴 때, 하늘을 나는 꿈은 자주 꾸었다. 엄마는 물론 똑똑한 아저씨를 따라다니며 하늘을 날고 싶다고 조르기도 했었다. 그러나 지금 단태는 마치 그 꿈을 이룬 것만 같았다. 단순히 하늘을 날아서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이건…… 해방이었다.
무게로부터의 해방이었다.
족쇄로부터의 해방이었다.
완전함으로의 상승이었다!
급격한 공기의 흐름을 감지한 단태는 본능적으로 가라앉았는데, 뒤에서 다가온 산새는 단태 대신 다른 나비를 물고 사라졌다. 산새가 남긴 바람에 아래로 밀려 내려간 단태는 공포마저 짜릿한 쾌감으로 생각하려고 애를 썼다.
‘그래, 이건 꿈이니까.’
나무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들판 중앙에 우뚝 선 나무였다. 너울너울 나무를 한 바퀴 돌면서 단태는 나비의 눈으로 본 세상이 얼마나 눈부신지 놀라고 있었다. 더 광활하고, 더 아름답고, 더 무시무시하고, 더 새로웠다.
산새의 공격을 피하려고 울창한 나뭇가지 속으로 들어갔다. 복잡하게 뻗어 있는 나뭇가지와 초록색의 잎사귀들을 통과해서 넓은 잎 가장자리에 앉았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마치 나비의 삶을 즐기고 있는 것만 같았다.
대체 왜 이런 꿈을 꾸고 있을까?
결존계 때문일까?
그때, 섬광이 터졌다.
바로 머리 위에서 번개가 친 것처럼.
그 강렬한 빛이 사라지는 순간, 단태는 상상을 능가하는 거대한 나무와 잎사귀 대신 어두컴컴한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파란색의 짧고 강렬한 섬광이 번쩍이는 공간이었다. 끔찍한 고통이 몰려와 몸을 뒤흔들었고,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아아악!”
거인이 팔다리를 잡아당겨서 강제로 뜯어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다시 눈을 멀게 하는 섬광이 터졌다.
어둠은 사라지고, 눈부신 햇살에 서서히 흔들리는 나뭇가지가 느껴졌다. 커다란 잎사귀 아래의 공간에는 무수한 나비들이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있었다. 죽음보다 무서운 고통, 더 이상 느낄 수 없었다. 단태는 날개를 퍼덕여 허공으로 날아올라 나비들의 무리에 합류했다. 본능을 따라 움직인 것이다.
위로, 아래로, 좌로, 우로 날아다니는 나비 떼.
다시 세상을 가득 채우는 강렬한 빛이 터지자, 단태는 어두운 공간에서 눈을 떴다. 두려운 고통이 몰려왔다. 비명은 저절로 목구멍을 뚫고 나왔다.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다. 논과 밭은 물론 집까지 휩쓸고 떠내려가는 홍수 같은 흙탕물처럼 고통도 생각을 쓸어 갔다.
고통이 흐릿해진 순간, 그는 찬란한 햇살 속으로 날아다니는 한 마리 나비가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