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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 그 과정을 반복한 후에야 단태는 현실과 꿈 사이를 오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꿈이 좋았다. 적어도 그 세계에서는 고통스럽지 않기 때문에. 그러나 그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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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어떤 모습일까?’
금룡어 눈알이 쏟아지지 않도록 신경 쓰며 유천주의 방으로 들어선 운미는 기다란 돌 탁자에 쟁반을 내려놓았다. 그냥 나가도 되지만 금룡어의 눈알을 그 어떤 것보다 좋아하는 유천주가 즉시 나오지 않자 어딘지 모르게 이상하다는 생각에 주위를 둘러봤다.
“용주 님?”
어느새 운미는 하족인 거미처럼 유천주를 용주라고 부르고 있었다. 유천주가 좋아했기 때문이다.
대답이 없었다.
운미는 커다란 돌 탁자들 사이로 걸어가며 벽에 쌓인 섬세한 조각품, 거대한 액자, 벽화 등을 살폈다. 탄성을 자아내는 여인의 조각상 앞에 한참 서 있었던 운미는 위엄을 갖춘 군주의 초상화로 눈길을 옮겼다. 잘 다듬은 수염에 제복을 입은 사람의 얼굴은 사나운 곰 같았다.
그러다가 탁자와 책 더미 사이에 쓰러져 있는 유천주를 발견했다.
오늘은 열 살 남짓한 소녀의 몸이었다.
“……용주 님?”
소녀는 몸을 웅크린 채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어디가 아플까?
순간, 운미는 유천주가 아니라 저 바깥에서 유천주가 데려온 인간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그럴 리가 없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 방에는 하족의 우두머리 흑마고조차 마음대로 들어오지 못한다. 허락 없이 들어왔다가는 죽음을 면치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저 소녀는…… 유천주가 분명했다.
운미의 가슴이 쿵쿵 뛰었다.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앞으로도 오지 않으리라.
주위를 살핀 운미는 탁자 한쪽에 놓인 단검을 가져왔다. 이 모든 게 덫, 함정이 아닐까 싶었지만 자존심 강한 유천주에게 어울리는 행동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그래, 지금이야.’
운미는 지난 3년 동안 금룡어의 눈알을 도려낸 그 솜씨를 발휘하여 소녀의 가슴에 단검을 찔러 넣었다.
단번에.
깊숙이.
소녀의 눈꺼풀이 밀려 올라가자 푸른 눈이 드러났다.
운미는 단검을 놓고 뒤로 물러섰다.
웅크린 자세로 가끔 경련을 일으키던 소녀의 몸이 축 늘어졌지만 그 눈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곧 소녀가 몸을 일으켰다. 가슴에 단검이 꽂힌 채로.
겁을 먹어 뒤로 물러서던 운미가 쟁반을 건드리자, 금룡어의 눈알들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퍽퍽, 터졌다. 상한 포도송이처럼.
소녀는 그 눈알을 바라보다 마치 이제야 생각이 났는지 손을 뻗어 단검을 뽑았다. 가슴에서 푸르스름한 피가 흘러나왔는데, 이내 멈췄다. 소녀는 아픈 표정도 짓지 않고 운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 눌린 운미는 벌벌 떨다가 주저앉고 말았다.
“그대의 행동이 나를 살렸지만, 전혀 기쁘지 않군.”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녀가 다가와 운미의 목을 꽉 잡았다. 그 끈기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만, 인간의 의도를 알기에 죽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 주제에 감히 위대한 존재를 건드리다니. 뭐, 그 덕분에 저주로 인한 마비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다음에 태어난다면 용으로 태어나도록.”
유천주는 가볍게 목을 꺾었다.
운미가 죽은 순간, 바닥이 흔들렸다. 벽과 천장은 물론 용혈 전체가 진동에 휩싸이자, 벽을 기대어 쌓아 놓았던 조각상들이 우수수 떨어졌고, 액자가 추락하여 박살이 났으며, 부서진 돌 탁자가 갈라진 바닥의 틈으로 사라졌다.
운미를 내던진 유천주는 몇 번의 도약으로 방을 벗어나 지하로 향했다. 이 요동의 진원지를 알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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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마성 율암은 호수 쪽을 바라보았다.
‘기이한 진동이야…….’
날이 아직 서늘한데도 부채를 손에 든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대륙을 돌아다니며 다양한 형태의 지진을 경험했기에 이 진동이 자연적 현상과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았다. 마법과 관련이 깊은 진동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저 호수 어딘가에 대마법사가 존재한다는 뜻인데.
대마선 두 척 사이에 공중다리를 붙여 하나로 만든 거대한 배에 오르는 다른 마법사들은 그 진동을 느끼지 못한 듯 평소처럼 속내를 감춘 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율암은 그들의 태도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미세한 진동까지도 예리하게 감지하는 자신의 능력이 정상 범주 바깥에 있기 때문이다.
“음마성 어르신, 배로 오르시지요.”
율암은 스스로 귀를 막아 버려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대신, 상대의 입술을 읽을 뿐 아니라 몸 전체로 미세한 진동까지 느낄 수 있기 때문에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대는 누군가?”
“마둔수탑의 부탑주 용천마 륜사의 책사 명국영입니다.”
“마법사의 책사라? 재미있군. 잠깐 실례하겠네.”
율암은 손을 뻗어 명국영의 목을 잡았다.
화들짝 놀랐지만 율암이 미치지 않는 이상, 황제와 천마들이 몰려와 있는 이곳에서 자신을 죽이지 않으리라 확신했기에 명국영은 은후성탑의 천마 음마성 율암을 쳐다보며 가만히 있었다.
“말해 보게.”
“저는 명국영입니다.”
“음, 듣기 좋은 목소리로군. 올라가지.”
율암은 귀를 막은 대신 몸으로, 특히 손으로 떨림을 통해 상대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단순히 목소리만 듣는 게 아니었다. 그 떨림에 녹아 있는 상대의 깊은 마음까지도 일부분 읽어 낼 수 있었다. 그가 보기에 명국영은 얄팍한 술수를 부릴 사람은 아니었다.
갑판 위로 올라간 율암은 따라온 명국영에게 물었다.
“마둔수탑의 책사라면 이 도시와 저 호수의 역사에 대해서도 잘 알겠구먼.”
“이곳 출신이 아니지만 나름대로 도시의 역사에 대해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혹시 저 호수 어딘가에 마법사가 있었다는 기록은 없나?”
“……그런 기록은 없습니다만.”
명국영은 긴장했다. 그가 며칠 동안 경험한 음마성 율암은 용태학의 수준 높은 교수처럼 잔잔한 분위기의 소유자였는데, 아무런 생각도 없이 헛소리를 지껄일 사람이 아니었다.
“알겠네.”
그 말에 명국영은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묻고 싶었지만, 예의에 어긋날 것 같아서 참았다. 대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계승자의 그릇이 참으로 대단하더군요.”
“성주명을 만났는가?”
호수를 바라보던 음마성이 명국영을 쳐다봤다. 성주명은 은후성탑의 차기 탑주가 될 사람이었다.
“계승자가 어젯밤 저를 찾아왔습니다. ≪제국의 빛과 그늘≫을 인상 깊게 읽었다고 해서 몇 마디 대화를 나누었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아무래도 은후성탑의 미래가 밝은 듯합니다.”
“설마, 자네가 그 책을 쓴 그 명국영인가?”
“……그렇습니다.”
명국영은 당황한 마음을 감추었지만 음마성까지 속이기는 힘들었다.
“하하, 귀를 막았더니…… 맑은 정신마저 탁해진 모양이야. 이런 귀인을 앞에 두고 알아보지 못하다니.”
“과찬입니다, 어르신.”
명국영은 고개를 숙여 그 칭찬에 답했다. 마법사도 사람인지라 성향이 제각기 달랐다. 기존의 체계와 전통을 고수하느라 ≪제국의 빛과 그늘≫ 같은 책은 싸그리 불태워야 한다고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마법사가 있는 한편, 성주명과 눈앞의 율암처럼 그 책의 진가를 인정하고 깊이 이해하는 마법사도 있었던 것이다.
“용천마가 인복이 있군. 헌데, 용천마가 과연 자네 같은 인물을 담을 그릇일지는 모르겠네.”
“…….”
명국영은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생각이 바뀐다면 언제든 찾아오게. 나 음마성 율암은 자네 같은 인재의 가치를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자부하니 말일세.”
“……말씀만 고맙게 받겠습니다.”
“그런가? 하는 수 없지.”
빙긋 웃은 음마성은 명국영의 어깨를 꽉 잡더니 평소 친한 백휘섬선 광오선 쪽으로 걸어갔다. 하회탈 같은 인상의 소유자 광오선은 음마성을 보자 웃음부터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