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154화 (154/293)

<-- 154 회: 4-31 -->

명국영은 두 명의 천마가 죽마고우처럼 환하게 웃으며 대화하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았지만 속으로는 음마성이 농담을 하듯 흘린 말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3년이라는 시간이 륜사에게 끼친 영향은 예상보다 훨씬 컸다. 마법 그 자체를 위해서라면 조직은 무시해도 된다는 극단적 성향을 가지고 있던 륜사가 3년 만에 용마렵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부탑주의 위치를 고려하면 륜사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지만, 그래도 명국영은 씁쓸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자네가 명국영이지?”

“……그렇습니다만.”

몸을 돌린 명국영은 깡마른 체격의 노인을 보고는 헛바람을 삼킬 뻔했다.

“나를 따라가지 않겠나?”

“전 마법사가 아닙니다, 어르신.”

“자네 이야기를 용금탄에서 들은 적이 있지. 제법 유능하다고 소문이 났더군. 황제 폐하께서 관심을 가질 정도로 말이야.”

“과찬이십니다.”

“만약 내 제안을 거절한다는 이유로 이 자리에서 자넬 죽이려 한다면 자넨 어떻게 하겠나?”

노인은 웃는 얼굴로 살벌한 질문을 던졌다.

명국영은 노인의 말이 결코 농담이 아님을 잘 알았다. 저 노인이 바로 사령마 만표, 후령사탑의 지존이자 어둠의 마법사들조차 두려워하는 대마법사였기 때문이다. 대답 한번 잘못하면 이 자리에서 죽을 테고,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저 노인에겐 그런 능력이 있었다. 또한 죽은 후에도 이 몸은 죽음의 마법으로 되살아나 아주 오랫동안 시체로 세상을 돌아다닐지도 몰랐다.

결국 명국영은 말 대신 황정어패를 꺼내어 죽음의 천마에게 보여 주었다.

“허허, 한발 늦었구먼. 어쩔 수 없지.”

사령마는 표정을 바꾸어 웃으며 다른 천마들이 모인 곳으로 가 버렸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명국영은 이 자리로 천마들이 끌어들인 게 복이 될지, 화가 될지 알 수가 없었다. 저 천마들이 목숨을 걸고 싸운다면…… 유천주가 도시에 입혔던 피해 보다 더 큰 손해를 입힐지도 몰랐다. 물론 황제 앞에서 경거망동을 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겠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합리적으로 돌아가지만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다.

“수고했어.”

익숙한 목소리.

명국영은 옥색의 지팡이를 손에 들고 다가오는 륜사를 반갑게 맞이했다. 한껏 들뜬 륜사를 보자 그가 천마들의 모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 것 같았다.

“가 보게. 천마들이 자넬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럴까?”

“용천마 님, 어서 가시지요.”

명국영은 일부러 허리까지 숙여 륜사를 안내했다.

“고마워. 나중에 봐.”

륜사는 잔뜩 어깨에 힘이 들어간 채로 천마들이 모여 있는 뱃머리로 향했다.

황제를 호위하는 황위군이 일제히 배에 올랐고, 명성이 높은 마법사들이 그 뒤를 따랐으며, 유타루체는 물론 다른 도시에서 온 귀족들이 근엄한 자세로 점잔을 부리며 승선했다.

두 척의 대마선을 연결해서 하나로 만든 ‘황마선’이 선착장을 벗어나 서쪽 방책으로 접근하자, 사람들이 거대한 밧줄을 끌어당겨 묵직한 문을 양쪽으로 활짝 열었다. 황마선은 유유히 방책 너머로 나아갔고, 수십 척의 크고 작은 배들이 황마선을 따라 도시를 벗어나 호수로 접어들었다. 각 배에서 둥둥 북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본격적으로 용마렵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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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들여 만든 마법진 곳곳에 금이 가 있었다.

마른 논처럼 여기저기 쩍쩍 갈라진 틈으로 푸른 불꽃이 탁탁 튀었다. 마법진은 한껏 달구어져 폭발 직전인 거대한 화로 같았다. 마법진 내부의 흐름이 원활하지 못해 안쪽에서부터 압력이 커져 자칫 잘못하면 마법진이 스스로 폭발할지도 몰랐다.

유천주는 마법진을 유심히 살폈다.

어디서 문제가 생겼을까? 완벽에 가까운 기억력 덕분에 평범한 마법진은 대충 그려도 상관없지만, 저 마법진 결존계는 일단 발동되면 멈출 수도 없고, 과정을 바꿀 수도 없기 때문에 몇 번이나 신중하게 확인했었다.

자신의 마력을 주입하여 결존계 주위의 압력을 줄여서 진동을 가라앉힌 유천주는 한참 후에야 문제의 근원을 찾아냈다.

료마주 때문이었다!

인간들에게서 뽑아낸 생명력이 결존계를 통과하여 료마주의 몸에 주입되는 과정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유천주는 결존계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료마주 옆으로 다가갔다.

암녹색의 잎들이 달린 덩굴이 료마주를 덮고 있었다. 그 잎들 때문에 료마주가 입고 있던 옷까지 보이지 않았고, 눈과 코도 잎 사이로 겨우 드러나 있었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로 생각 같아서는 단숨에 죽이고 싶지만, 용족 전체의 운명이 달린 일이라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대신, 잠룡에 불과한 료마주가 어떻게 결존계의 힘을 거스를 수 있는지 살펴보았다.

“이런…….”

료마주 스스로 의지를 갖고 한 일이 아니었다.

저 녀석의 몸이 문제였다!

유천주는 단숨에 료마주의 몸이 풍혈지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풍혈지체는 대단히 희귀한 체질이었다.

‘왜 하필 풍혈지체의 몸을 가진 거지? 아! 그렇군. 너무나 오랫동안 인간의 몸으로 지낸 게 문제가 된 게야. 그 강력한 바람의 힘을 한낱 인간의 몸이 버텨 낼 수는 없지. 허, 이를 어쩐담? 저 녀석이 본체로 돌아갈 수 있다면 간단히 해결되겠지만, 결존계가 발동된 상황에서 저 녀석을 깨울 수도 없고.’

유천주는 결존계를 발동하기 전에 료마주의 몸을 살피지 않은 자신의 실수였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 유천주는 눈을 들어 천장을…… 그 너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호수 위를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배들이 보였다. 잔잔한 물살을 헤치며 호수 깊은 곳으로 나오는 배들을 감지한 순간, 유천주는 올해도 용마렵이라는 인간만의 행사가 시작되었음을 깨달았다.

평소라면 그 요란한 행사가 끝나도록 용혈 한쪽에 깊이 잠들어 있었을 유천주는 단태의 작하족 과정을 위해 쏟아지는 졸음도 참고 버티다가 저주로 인해 마비 상태에 이르렀고, 운미가 찌른 단검으로 인해 거기서 깨어났던 것이다.

유천주는 당장 도움이 필요한 료마주와 저 위에서 얼쩡거리는 인간들을 번갈아 살폈다.

“흑마고!”

“네, 용주 님.”

어둠을 뚫고 거대한 거미가 나타났다.

“마법진이 팽창하여 폭발하지 않도록 지켜라. 만약 마법진에 푸른 불꽃이 터지기 시작한다면, 넌 네 동족에게 명령하여 그 섬광을 막아야 한다. 간단하다. 그저 그 불꽃에 몸을 던지기만 하면 된다.”

“…….”

흑마고는 그 새까만 눈으로 유천주를 쳐다볼 뿐이었다.

“후후, 마음대로 해라. 내가 돌아왔을 때, 이 마법진이 붕괴되어 있다면 그 순간 너와 너의 동족 전체를 없애 버릴 테니까.”

그렇게 말한 유천주의 몸이 사라졌다. 용혈 바깥으로 단숨에 이동한 것이다.

거미는 서서히 흔들리는 마법진을 쳐다보았다.

유천주가 마력으로 억눌렀던 마법진 내부의 압력이 가중되자 곳곳에서 툭툭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고, 그 틈에서 흘러나온 마력이 부딪혀 번쩍번쩍 섬광이 터졌다. 가만히 내버려 두면 마법진은 붕괴되어 대폭발을 일으킬 테고, 그 폐허를 유천주가 본다면 이 지하에서 거미는 한 마리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흑마고는 동족만 알아듣도록 쉭쉭 명령을 내렸다. 뒤로 다가와서 대기하던 거미들은 자살 명령에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런 동족을 본 흑마고는 유독 몸이 하얀 거미를 응시했다. 잠깐 동안의 시선 교환이 이루어지자, 흑마고는 마법진을 에워싸며 터지는 섬광으로 달려가 몸을 날렸다.

섬광이 흑마고의 몸을 감싸자 퍽 소리가 나며 거대한 몸통이 터졌고, 곧 화르르 푸른 불꽃이 타올랐다. 압력이 낮아진 덕분에 마법진의 진동이 줄어들었지만 곧 그 진동이 재개되리라는 사실을 나머지 거미들은 잘 알고 있었다.

다시 마법진이 들썩거리자 설고가 앞으로 나와 섬광에 뛰어들 준비를 했다. 그러나 흑마고의 명령에도 움직이지 않았던 거미들이 설고를 가로막았다. 쉭쉭, 바람 새는 듯한 소리가 거미들 사이에 오갔다. 체구가 큰 거미들에게 밀려 뒤로 물러선 설고는 그들이 자신을 동족의 우두머리로 인정했음을 깨달았다.

섬광이 터지자 가까이 있던 거미가 탁탁 소리를 내며 달려가 마법진으로 몸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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