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155화 (155/293)

<-- 155 회: 4-32 -->

갑자기 꿈이 바뀌었다.

한 권의 책을 읽다가 그 책을 던져 버리고 다른 책을 펼친 것처럼.

깜깜했다.

답답하지는 않지만.

곧 볼 수 없는데도 보였다!

분명히 소리를 들었을 뿐인데 보였다.

푸른 불꽃이 터지는 대형 마법진 위로 몸을 날리는 거미는 ‘퍽’, 너무나 쉽게 터졌다. 윤기 흐르는 내장은 뜨거운 마법진에 떨어져 쉭쉭 소리를 내며 타 버렸고, 이리저리 꺾인 다리는 마법진 밖으로 튕겨 나와 수북이 쌓였다. 그 모든 것을 소리로 볼 수 있었다.

마치 청각과 시각이 하나로 묶인 것처럼.

단태는 진실을 깨달았지만 처음과 달리 그리 큰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 나비였던 그가 이제는 거미가 되었던 것이다. 평범한 거미는 아니었다. 설고가 바로 그였다. 아니, 그는 설고 안에 있었다.

공포와 분노에 휩싸인 설고의 생각을 읽은 단태는 유천주가 흑마고에게 내린 명령에 아연실색했다. 폭발 직전의 마법진을 안전화시키지 않는다면 거미 종족 전체를 죽이겠다니. 저 거미들은 스스로 몸을 던진 흑마고의 뒤를 잇고 있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설고의 마음은…… 복잡했다. 동족이 설고를 위하여, 설고를 대신하여 몸을 던지고 있었다. 동족을 버리더라도 진정한 자유를 얻고자 애를 썼던 설고의 의지는 동족의 희생적인 행동 앞에 토대까지 흔들렸다.

또다시 모든 것이 돌변했다.

이번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어느 정도 예상했기에 조금도 놀라지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유천주가 잡아와 마법진에 가둔 사람들 중 하나가 되어 있었다!

죽어 가는 인간이었다.

힘겹게 호흡하는 인간이었다.

이름은 문종후, 물려받은 유산을 도박으로 날린 후에 어부가 된 남자는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죽음을 앞둔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생각은…… 여전히 도박이었다. 그는 후회하고 있었다. 그날, 주사위를 제대로 굴렸더라면 이런 곳으로 잡혀와 죽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게다가 가족을, 친구들을 저주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 믿고 밑천을 대주었다면 이런 신세가 되지는 않았을 텐데.

단태는 그 작자를 떠올렸다. 구제불능의 인간. 가족을 팔아먹어서라도 돈을 챙기려 했던 그 사내 같은 인간이 바로 문종후였다. 짐승 같은, 아니 벌레만도 못한 인간은 죽음 앞에서도 고귀해지기는커녕 악한 면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문득 그가 불쌍했다.

저러고도 아버지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대체 왜 저렇게 살까?

문종후는 이제 세상을, 신을 원망했다. 왜 자신에게 가혹한 운명을 허락했냐고 울부짖었다.

단태는 문종후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내면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진실인지, 거짓인지 단태는 분간할 수 있었다. 문종후는 진심으로 가족 때문에, 세상 때문에, 어딘가에 있을지 모르는 신 때문에 억울한 삶을 살아왔다고 믿고 있었다. 그는 자기의 잘못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진심으로 분통을 터트렸다.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단태는 마법진 중앙에 잡힌 다른 사람의 의식으로 풍덩 빠졌다.

결존계 때문이었다.

전문적으로 도망친 노예를 잡아다가 비싼 값에 팔아 버리는 노예사냥꾼,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남루한 옷차림의 소녀를 납치해서 기루에 팔아넘기는 중년 뚜쟁이, 당용파라는 배경을 믿고 암방거로의 상인들에게서 돈을 뜯어 낼 뿐 아니라 저항하는 늙은 상인을 죽여서 호수로 던져 버린 용병의 마음을 읽은 단태는…… 욕지기를 느꼈다. 누구도 자기 삶을 후회하거나 뉘우치지 않았다. 오히려 운이 나빠서, 세상이 악랄해서 이런 취급을 받는다고 원망했다.

왜 자기가 한 짓은 생각하지 않을까?

단태는 이미 알고 있었다.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리고 기억해 냈다. 결존계가 어떤 마법진인가를.

단태는 결존계를 통해 어디엔가 있을 나비와 연결되었다. 꿈이라고 생각했던 그 경험은…… 현실이었다. 설고의 눈으로 섬광이 튀는 마법진을 보았고, 죽어 가는 인간이 되어 그 비참함을 느꼈다.

그때, 단태의 의식은 다른 곳으로 도약했다.

포근하고 안락한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단태는 그 존재의 눈을 통하여 거대한 배 갑판에 놓인 원형의 탁자를 볼 수 있었고, 그 탁자에 둘러앉은 사람들 중에 몇 명의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체구가 커진 데다 입고 있는 옷이 달랐지만 가운데 앉아서 여유로운 미소를 입가에 띄운 사람은…… 황제였다. 그 옆에는 볼 살이 빠져 퀭한 느낌을 주는 황명거사 석장명이었고, 맞은편에는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사부 륜사가 앉아 있었다. 륜사 옆에는 어딘지 불편해 보이는 시장 반명이 입술을 꼭 깨물고 있었다.

‘지금의 륜사라면 황마사의 자리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겠지. 그래도 난 그가 한 번은 거절했으면 좋겠는데.’

단태는 즉시 자기가 누구 안에 있는지 알아차렸다. 바로 명국영이었다. 있는 힘껏 소리쳤다. 명국영에게 자신의 처지를 알리기 위해서. 그러나 명국영은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그저 황제와 석장명, 륜사를 번갈아 바라보며 앞으로의 일을 생각할 뿐이었다.

단태는 흥분을 가라앉혔다.

결존계는 단태로 하여금 다른 존재의 의식을 일방적으로 경험하게 할 뿐이었다. 감정을 억누른 그는 명국영의 생각에 귀를 기울였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싶어서였다.

그때, 느릿느릿하면서도 느닷없이 핵심을 찌르는 명국영 특유의 목소리가 들렸다.

‘단태가 여기서 나와 함께 황제 폐하와 천마들이 함께 모인 자리를 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단태는 감격했다.

스승은 자신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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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와 일곱 명의 천마가 둘러앉은 타원형의 탁자에는 산해진미가 가득 놓여 있었다.

유타루체가 자랑하는 금룡어 요리는 물론 방염루체의 불도마뱀 요리, 파림루체의 칠과팔육 등 진귀한 음식도 빠짐없이 올라 있었다. 작년 용금탄대연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유랑극단 예극성의 공연이 앞쪽에 마련된 작은 무대에서 진행되는 가운데, 황제는 제국이 자랑하는 일곱 명의 천마의 면면을 살폈다.

마법사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백휘섬선 광오선은 항상 웃는 얼굴이었다. 조그만 체구에 웃는 모습 그대로 주름이 잡혀 손자의 재롱을 지켜보는 할아버지 같은 광오선은 황제를 보더니 활짝 웃었다.

광오선 맞은편에 자리 잡은 사령마 만표는 표정이 딱딱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음의 왕이라 불릴 만큼 잔혹한 어둠의 마법사 같은 분위기를 노골적으로 풍기지는 않았다. 그저 말수가 적은 노인에 불과했다. 황제는 가끔 사령마가 광오선을 쳐다볼 때의 그 예리한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소문에 의하면, 사령마는 평생 대륙을 활보하면서 딱 한 번 패배를 당했는데, 그 모욕을 준 사람이 바로 광오선이었다.

건원빙탑이 자랑하는 암혼빙마 백탁은 머리카락과 눈썹이 모두 은색이었다. 탄력 있는 피부 때문에 백탁은 나이를 가늠하기가 쉽지 않았다. 70세가 넘었다는 사람도 있고, 40대 중반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백탁은 황제의 시선을 알고도 무시했다.

평환탑이 자랑하는 광마 종만추는 볼 때마다 다른 모습이었다. 처음 봤을 때는 우아한 귀부인이었는데, 지금은 건장한 체격을 자랑하는 용병 같았다. 종만추의 능력은 스스로 몸을 바꾸는 데 있지 않았다. 종만추는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의 시선을 왜곡시켰다. 종만추는 평범한 노인이었지만 그를 보는 사람마다 제각기 다른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음마성 율암은 학자 같았다. 천천히 부채를 흔들며 그윽한 시선으로 호수를 쳐다보는 늙은 마법사를 쳐다보니, 청량하면서도 힘이 느껴지는 용태학 특유의 분위기가 떠올랐다.

언제나 곁에 있어서 그림자처럼 느껴지는 황명거사 석장명. 황제의 시선을 감지하자마자 살짝 고개를 숙이는 그의 모습에 황제는 뭉클 감동을 느꼈다. 저 마법사가 곁에 없었다면 벌써 오래 전에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제국을 통째로 넘긴다고 해도 저 마법사에게 진 빚을 갚을 수 없다고 황제는 생각했다.

마지막이자 최근에 천마가 된 륜사는 확실히 다른 천마들에 비해 젊었다. 천재라고 알려질 만했다. 황제는 륜사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대마법사 하랑 이후, 그대만큼 젊은 나이에 천마의 자리에 오른 이가 없다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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