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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마지막 순간을 감지한 유천주는 뛰기 시작했다.
자신이 죽더라도 료마주가 훌륭히 성장한다면, 용족은 다시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료마주를 반드시 살려야 한다! 료마주는 용족의 희망인 동시에 곧 죽을 유천주의 희망이기도 했다. 그 녀석에게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고 해도 지금은 그런 점을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마법진이 설치된 지하 공간은…… 엉망진창이었다.
수천 개의 다리들이 마법진 주위에 흩어져 있었다. 마법진의 붕괴를 막기 위해 하족인 거미들이 몸을 던진 결과였다. 유천주는 몇 마리 남지 않은 거미들은 쳐다보지도 않고 결존계로 진입했다.
단태를 뒤덮은 덩굴의 잎은…… 시들고 있었다. 그 잎이 다 시들면 단태도 죽고 말 것이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결존계가 단태를 죽일 것이다. 풍혈지체를 가진 단태의 몸이 결존계의 압력을 버텨 내지 못할 테니까.
그러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결존계를 멈춰야 한다!
“……그 방법뿐인가?”
이미 마음을 다잡은 유천주가 반사적으로 흑마고를 불렀는데, 흑마고 대신 몸이 하얀 설고가 다가왔다.
“흑마고는…… 죽었습니다.”
“그런가? 너는 내 방으로 가서 사용하지 않은 용옥을 가져오너라.”
“네, 용주 님.”
설고는 천장으로 기어올라 거미들만 사용하는 통로로 사라졌다.
설고가 용옥을 가져오는 동안, 단태 옆에 주저앉은 유천주는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야 아직 잠룡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한 료마주가 안전할까? 어떻게 해야 이곳으로 들어와 게걸스럽게 보물을 훔칠 저 인간들로부터 잠룡에 불과한 료마주를 지킬 수 있을까? 호수의 수면 위를 자유롭게 돌아다니던 그 마법사들이라면 료마주는 열이면 열 패하고 말 텐데.
기가 막히면서도 슬픈, 그러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경건하기까지 한 계획 하나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알에서 깬 이후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용에게 어울리지 않는 생각이었으나, 오히려 그 때문에 유천주는 그 생각이 마음에 들었다. 용으로 살아왔지만 용 이상의 존재가 유천주에게는 꿈이었던 것이다.
*무룡
단태는 눈을 떴다.
익숙해서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천장이 보였다. 경사의 차이로 인해 미묘하게 다른 어둠의 농도, 시꺼먼 거미들이 오가는 통로의 입구, 별처럼 박혀 있는 돌까지.
긴 악몽에 시달리다 지쳐서 깬 것처럼 그는 몸을 쉽게 일으키지 못했다. 그 악몽의 내용을 떠올리기 위해 잠시 누워서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갑자기 몸을 일으킨 단태는 어깨와 옆구리, 복부에서 밀고 올라오는 통증에 신음을 흘렸다.
“윽!”
그는 누워서 천천히 숨을 골랐다.
고통은 서서히 빠져나갔다. 어디에 있는지 깨달은 단태는 상체를 일으킨 후에야 새하얀 거미를 발견했다. 보통 사람의 눈에는 기괴해서 공포를 자아낼 만한 특이한 거미는 두 개의 발로 쥐고 있던 용옥을 내밀었다.
용혈 전체를 흔들던 진동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설고는 말없이 용옥을 단태 앞에 내려놓고 뒤로 물러섰다. 어둠이 서서히 백색의 거미를 삼켰다.
유난히 커진 심장의 고동소리를 들으며, 단태는 용옥을 집어 들었다. 용옥은 그 크기보다 훨씬 더 무겁게 느껴졌다. 하마터면 떨어뜨릴 뻔했을 만큼.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단태는 왜 자신이 용옥간에서 깨어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불안을 느끼면서 조심스럽게 마력을 용옥에 집어넣었다. 용옥에서 푸르스름한 안개가 흘러나와 그를 감쌌다.
단태는 결존계 바로 옆에 서 있었다.
유천주의 거주 공간 ‘주혈’ 바로 아래 공간에 건설된 결존계는 대형 마법진으로 직경이 무려 15절(대략 30미터)에 달했다. 거미들이 유천주의 지시에 따라 만든 결존계 곳곳에서 푸른 불꽃이 팍팍 소리를 내며 터지고 있었다.
붕괴 직전의 결존계를 본 단태는 지끈거리는 두통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거대한 나무에 수천수만 개의 번데기가 매달린 광경이 갑자기 떠올랐다. 낡은 가죽 물통이 갑자기 찢어져 담아 놓은 물이 쏟아져 나오듯이 악몽 같은 기억이 그를 덮쳤다.
꿈이 아니라, 결존계로 인해 그의 정신이…… 이제 막 번데기 밖으로 나오는 나비의 내면으로, 유천주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거미의 내면으로, 심지어 인간의 내면으로 옮겨 다녔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주저앉고 말았다.
꿈은 아무리 생생해도 깨는 순간부터 잊혀진다. 그래서 비행이나 추락처럼 잊기 어려운 꿈도 침대를 벗어나면 흐릿해져 어느새 그런 꿈을 꾸었는지조차 확실치 않게 되는데, 안타깝게도 단태는 꿈이 아니라 직접 경험한 것이어서 시간이 흐를수록 그 세부적인 기억은 점점 더 강렬해지고 있었다.
용옥을 쥔 손을 떨면서 유천주가 말했다.
“이런 식으로 빨리 너와 헤어질 줄은 몰랐다. 보통 잠룡은 백 년은 배워야 어엿한 용족의 일원으로 대접받을 수 있는데, 넌 겨우 삼년이었다. 내가 보기에 너는 배움이 부족한 어리석은 잠룡에 불과하기 때문에 나 유천주는 명룡으로서 도저히 편하게 눈을 감을 수가 없구나. 진지하게 들어라.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그래, 유언이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네게 준다. 이 용혈, 여기 있는 보물까지 모두 네게 상속한다. 그리고 너는 반드시 내 뜻을 따라야 한다. 그게 명룡으로서의 마지막 명령이다.”
유언이라는 말에 단태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유천주는 용옥을 쥔 채 결존계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섰다. 조그만 번개 같은 섬광이 덩굴처럼 발을 타고 올라와 허리와 어깨 근처에서 퍽퍽 터졌는데, 유천주는 개의치 않았다. 대신 푸른 불꽃이 터질 때마다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유천주는 짙은 녹색이었다가 바싹 말라버려 황금색으로 변한 덩굴잎 더미 앞에 섰다.
“네가 온전한 용이었다면 이런 불상사는 생기지 않았을 텐데.”
한숨을 내쉰 유천주는 발로 덩굴 잎을 이리저리 찼다. 말라서 딱딱한 덩굴 잎은 바스러지며 사방으로 흩어졌고, 그 아래에 있던 단태가 드러났다. 덩굴 줄기에 묶인 채 정신을 잃고 악몽을 꾸는 단태의 얼굴 근육이 가끔씩 경련을 일으켰다.
용옥을 통하여 자신의 모습을 보는 단태는…… 기분이 묘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결존계는 성공했을까?
“네 몸이 풍혈지체라는 사실, 너도 알고 있겠지? 그 때문에 결존계가 네 몸을 공격할 뿐 아니라, 내가 아끼는 이곳, 나의 용혈을 뒤흔들고 있다. 모두 너 때문이다.”
유천주는 퍼렇게 빛나는 검을 만들어 덩굴 줄기를 잘라내면서 정확히 서 있는 단태를 쳐다보며 말했다.
“나 때문이다?”
단태는 유천주가 듣지도, 반응하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반문했다. 그만큼 기가 막혔던 것이다. 몰래 결존계를 준비하고 미끼를 던져서 이 꼴로 만든 게 누군데?
“그래, 너 때문이다.”
그런 단태를 쳐다보며 말하는 유천주.
“…….”
단태는 깜짝 놀랐다.
“놀랐지? 안심해라. 네가 보고 있는 나는 이미 용옥에 기록된 유천주에 불과하니까.”
유천주는 웃으며 덩굴 줄기를 잘랐지만, 단태의 몸을 뚫고 들어간 덩굴은 손대지 않았다. 아직 암녹색인 그 줄기에 손을 얹고 잠시 살피던 유천주가 고개를 들어 또 다른 단태, 용옥을 통해 이 광경을 지켜보는 단태를 쳐다보았다.
“난 처음으로 인간이 즐겨 사용하는 개념을 실행하려고 한다. 인간은 나약함을 이유로 서로에게 ‘희생’을 요구하더군. 자신의 허약함을 탓하는 대신, 타인에게서 도움이라는 명목으로 희생을 원하는데, 웃기는 건 희생하지 않는 지극히 정상적인 인간을 ‘냉혈한’이라고 부르며 무리에서 쫓아내기까지 하더군.
용족은 인간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점은 너도 알 테지. 용족에겐 인간이 가진 역사의 개념은 없다. 필요가 없으니까. 협동, 협력이라는 개념도 용족에겐 없지. 용은 그만큼 각자의 삶, 각자의 영역을 중시한다. 이렇게나 오만한 용조차 절대적으로 준수해야 하는 용률의 첫 번째 규율은 다른 용의 영역을 침범하지 말라는 거다.
만약 양해를 구하지 않고 침범하면 용족 전체가 나서서 그 용을 죽일 수도 있고,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진 적도 있다. 아무튼, 난 네게 지금 내가 하려는 것이 얼마나 용족으로서 불가능에 가까운 용기를 낸 것인지 네가 알아주기를 바란다.
서론이 길었다.
저주가 두 개의 용심 중 하나를 삼켰다. 맞다. 현재 내겐 너처럼 심장이 하나뿐이다. 너도 알겠지만 그동안 저주를 억누르기 위해 온갖 짓을 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