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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오른쪽 손바닥이 찢어졌고, 거기서 피가 섞인 붉은 바람이 흘러나왔다. 손을 쥐고 주저앉은 단태는 거미들을 볼 여유조차 없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다행히 거미들도 단태 곁으로 접근하지 않았다. 그 붉은 바람 때문이었다.
숨을 헐떡이며 겨우 손바닥을 움켜쥐어 강제로 흘러나오는 바람을 막은 단태는 조금씩 다가오는 거미들을 노려보았다. 오른팔을 쓸 수가 없는 상태에서 저놈들을 해치우고 예간까지 갈 수 있을까? 싸우다가 왼팔마저 이런 식으로 피부가 찢어지고 바람과 피가 흘러나오면 어떻게 될까?
‘아! 결존계로 인한 부작용 때문이야. 어쩌면 풍혈지체 때문일 수도 있고.’
단태는 통로를 채운 거미들을 보며 이렇게 많은 수의 거미가 용혈에 있었는데 왜 몰랐을까 생각했다. 아마도 의도적으로 숨겼으리라. 이런 때를 위해서. 저주로 나날이 약해지는 유천주의 상태를 누구보다 잘 아는 놈들이 아닌가?
다른 방법은 없다.
싸워서 길을 뚫는 수밖에.
단태는 입으로 옷을 뜯어 만든 붕대로 오른쪽 손바닥을 칭칭 감았다. 그래, 한번 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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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반명은 교묘한 화법으로 이번 용마렵을 실질적으로 이끈 사람은 용천마 륜사라는 점을 강조했다.
비난을 잠재울 만큼 설득력 있는 언변에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11인위원회에 속한 사람들은 이번 용마렵을 위해 륜사가 얼마나 열심히 뛰어다녔는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유천주의 습격으로 입은 피해는 마둔수탑이 담당해야겠습니다.”
3년 전 륜사를 견제하기 위해 시장의 지시를 받아 단태를 고문했던 백율운현이 입을 뗐다.
“지극히 옳은 말씀입니다.”
이번에는 당가를 이끄는 당현추가 말했다. 그가 자세를 살짝 바꾸자 수수한 옷으로도 감출 수 없는 근육질 몸매가 드러났다. 조각처럼 잘생긴 얼굴 덕분에 그는 시장 반명만큼이나 인기가 높은 사람이었다.
“허나, 용천마 륜사가 초청한 천마들이 없었다면 오히려 물의 도시가 낭패를 보고 말았을 겁니다. 이 점을 잊어선 곤란합니다.”
윤가학관의 관장이자 대대로 대학사를 배출한 윤가의 가주 윤형관이 나섰다.
“맞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조금이라도 다치셨다면 물의 도시는 칠성시의 다른 도시들로부터 비난을 받을 뿐 아니라, 실질적으로 엄청난 피해를 봤을지도 모릅니다.”
정가의 가주 정이도였다. 정이도는 당현추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인물로 기회만 생기면 당연추의 반대편에 서는 사람이었다.
회의는 길어졌고, 거기 참석한 사람들의 입장은 분명해졌다. 윤가와 정가 등이 륜사 책임론에 회의를 제기했지만, 11인위원회는 특정한 사안에만 만장일치를 적용할 뿐, 대부분의 안건은 다수결로 결론을 내렸기 때문에 륜사에게 이번 사건의 책임이 있다는 내용이 공식적으로 채택되었다.
시장 반명은 빙긋 웃었다.
그 회의 결과가 발표되자 물의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들끓었다. 이미 유천주를 직접 목격한 뱃사람들의 증언으로 3년 전의 재앙이 재현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공포로 인해 짐을 싸서 도시를 빠져나가려는 움직임까지 있었는데, 시민들은 그 부정적인 힘을 륜사와 마둔수탑을 향한 비난으로 바꾸었다.
평소 마둔수탑을 존경하진 않더라도 마법사가 두려워서 탑을 향해 손가락질도 못하던 사람들이 몰려와서 돌멩이를 던지는 등 사람들의 분노가 조금씩 겉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시장 반명은 소마선에 타고 마둔수탑 주변을 한 바퀴 돌면서 사람들의 반응을 살폈다. 과연 어리석기 그지없었다.
반명이 보기에 저 사람들은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그저 불안이 몰려오면 그 감정을 해소할 수 있는 분풀이 대상을 원할 뿐이었다. 그 대상에게 폭력을 가하는 게 정당한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욕망을 푸는 것, 불안을 해소하는 것이 중요했던 것이다. 그들이 11인위원회에 참석했다면, 아니, 그 회의의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경험했다면 저런 짓은 하지 못할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륜사의 혜안 덕분에 물의 도시는 3년 전의 그 재앙에서 벗어난 셈이었다. 륜사가 초청한 천마들이 함께 용마렵게 참석하지 않았다면 그 거대한 수룡의 난동에 황제마저 호수에서 죽고 말았을 것이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당연히 역적이니 떠드는 자들이 생길 테고, 물의 도시는 쑥대밭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륜사, 자네 덕분이야.”
반명은 마둔수탑을 올려다보며 툭 내뱉었다. 그러다가 옆에 서 있던 딸을 쳐다봤다.
“어떠냐?”
“……뭐가요?”
반극권의 한 부분을 생각하느라 질문을 놓친 반우현이 되물었다.
“요즘 너 좀 이상하구나.”
“제가요?”
반우현은 시치미를 잡아뗐지만 아버지는 워낙 눈치가 빨라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내가 지켜보고 있다는 점을 잊지 마라.”
“알았어요.”
“저 탑 꼭대기에 앉아 있는 자는 제국에서도 여덟밖에 안 되는 마법사 중 하나인데, 왜 저런 일이 벌어지는지 너는 아느냐?”
반명은 손가락으로 탑의 입구까지 몰려와서 항의하는 사람들을 막느라 애를 먹는 수련사들을 가리켰다.
“……아버지처럼 노련하지 않으니까요.”
“후후, 칭찬으로 듣겠다. 네 말이 옳다. 륜사는 노련하지 못해. 애송이처럼 행동하니 말이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제대로 깨우치지 못했으니 저 높은 자리에 있어도 소용이 없지. 잘 들어라. 세상에는 이용하는 자와 이용당하는 자가 있다. 저기서 분통을 터트리는 놈들은 모두 이용당하는 자들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이용당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른다는 사실이지. 다음 날 잡아먹힐 돼지가 눈앞에 놓인 먹을 것 앞에서 행복한 것처럼 말이다. 넌 왜 저들이 이용당한다고 생각하느냐?”
“……힘이 없으니까요.”
반우현은 이런 대화가 달갑지 않았다. 도시의 계승자를 동생에게 넘기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힘? 아니다. 저놈들은 생각할 줄을 몰라. 그저 외부에서 가한 자극에 반응할 뿐이지. 난 저놈들이 어떻게 행동할지 예상할 수 있다. 저것들은 사람이 아니야.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스스로 판단해서 생각하고 그 생각을 바탕으로 결정해서 움직이는 법이지.”
“아버지가 하층민으로 태어나도 지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요?”
반우현이 물었다.
“하층민? 후후, 재미있는 질문이구나. 사람은 환경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그걸 부정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지. 부잣집, 귀족가에서 태어난 사람에겐 기회가 많다. 적어도 돈이나 힘이 없어서 못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하나, 어디에나 경쟁이 존재한다. 누군가를 깔아뭉개지 않으면 자기가 그런 꼴을 당하는 게 세상의 이치란다. 누군가를 이용하지 않으면 자기가 이용당하고 마는 게 이 세상의 진실이다. 알겠느냐?”
“네, 아버지.”
그때, 사람들이 웅성웅성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시청으로 돌아가려던 반명은 눈살을 찌푸린 채 탑 입구에 모인 사람들을 쳐다봤다.
분노로 눈까지 벌겋게 충혈된 수백 명의 사람들 앞으로 마둔수탑의 부탑주이자 제국의 여덟 번째 천마인 륜사가 걸어 나왔다. 분을 풀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은 일제히 침묵에 빠져들었다. 륜사가 직접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
반명은 자신을 향하는 시선을 발견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그는 그 시선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장의 허락을 받은 그 사람은 손에 쥔 돌멩이를 륜사에게 던지며 소리쳤다.
“도시를 망친 장본인은 물러가라!”
돌멩이가 륜사의 이마를 때렸다.
군중은 선동에 약하다.
사람들은 일제히 가지고 온 돌을 륜사에게 던졌다. 상대가 어마어마한 능력의 소유자라는 사실도 잊고. 그저 불안과 염려, 공포를 여기서 풀어 버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아니, 그들은 자기가 어떤 상태인지도 몰랐다. 그저 바람에 휩쓸리는 갈대처럼 이리저리 몰려다닐 뿐이었다.
륜사는 가만히 눈을 감고 돌멩이 세례를 고스란히 맞았다.
“아버지의 일 처리가 놀랍네요.”
반우현은 자신도 모르게 비아냥거렸다.
“너도 이 길을 걷게 될 게다.”
진지한 반명의 말에 반우현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가지고 온 돌멩이가 다 떨어지자 군중은 무엇을 할지 몰라 가만히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