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161화 (161/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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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나서서 해야 할 일을 알려 주지 않으면 군중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바위와 같았다. 누군가 지렛대로 밀어야 바위가 굴러떨어져 산사태를 일으키는 것이다.

피투성이가 된 륜사가 눈을 떴다.

사람들은 이제야 륜사가 어떤 사람인지 기억해 내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혼란이 군중을 휘어 감았다. 또 다른 불안이 그들 내부로 파고들었다. 수룡 유천주가 주는 공포를 풀어버리자 눈앞의 마법사로 인한 불안이 스며든 것이다.

“여러분.”

힘 있는 목소리가 군중이 서 있는 광장으로 퍼져 나갔다.

“도시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해 여러분을 불안과 공포로 떨게 한 점, 사죄합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용천무 륜사가 군중 앞에서 무릎을 꿇은 것이다.

놀람과 경악이 군중을 훑고 지나갔다.

군중은 선동에 약한 만큼 외부 자극에도 즉시 반응한다.

마법사는커녕 수련사나 종자까지 목에 힘을 주고 다니는 물의 도시에서 륜사처럼 명성이 높은, 아니 도시의 자랑인 대마법사가 무릎까지 꿇자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륜사처럼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뒤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륜사를 향한 미안함과 자신의 잘못에 대한 자책이 가득 차 있었다.

“허나, 이것만은 알아주십시오. 시장님을 비롯하여 도시의 안전을 책임진 사람들은 바로 여러분을 위해서 용마렵을 열었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직접 내려오셨고, 그 유명한 천마들이 이곳으로 왔습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용마렵의 목적은 그 행사를 안전하게 치러 내는 데 있지 않습니다.

용마렵의 목적은 바로 여러분을 공포로 떨게 하는, 밤잠도 설치게 만드는 그 사악한 용을 죽이는 것입니다. 적과 맞붙지 않는다면 군대가 왜 필요하겠습니까? 부상과 죽음을 염려한다면 누가 적군과 싸워 나라를, 민족을, 가족을 지키겠습니까?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우리는 패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부상자와 사망자가 속출했지만, 수룡 유천주는 등을 돌리고 달아나 버렸습니다. 적이 도망친 것입니다.

물론 나는 이 결과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호수를 샅샅이 뒤져서라도 유천주를 없애고 이 도시에 영구적인 평화를 가져올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 저를, 이 탑을, 이 도시를 믿어 주십시오.”

잔잔하면서도 힘이 깃든 그 연설이 군중의 마음속으로 파고들었다.

명국영이 공을 들여 작성한 그 연설은 배우지 못해서 화려한 수사어에 익숙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 연설은 단숨에 군중에게서 ‘패배’라는 단어를 지워 버렸다.

오히려 적이 도망쳤으니 승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황제까지 무시할 수 없는 대마법사가 직접 무릎까지 꿇은 상태로 한 말이기에 군중의 마음 깊은 곳에 새겨졌다.

한쪽 다리를 저는 노인이 앞으로 나와 륜사 앞에 조아렸다. 쿵쿵 바닥을 이마로 찧으면서.

“이 늙은이를 용서하지 마십시오. 마법사님의 그 깊은 뜻도 몰라보고 이런 짓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기회를 주신다면 무엇이든 마법사님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군중이 노인이 한 말을 반복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가세하자 광장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들은 물의 도시 역사상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사건’의 일부라는 사실에 흥분했다. 특권을 누릴 뿐 의무는 내팽개치기 일쑤인 상류층에 익숙했기 때문에 륜사의 행동은 신선하다 못해 파격적이었다. 무릎 꿇은 대마법사라니.

배들도 몰려와 운하를 가득 메웠다.

도시 전체가 마둔수탑으로, 군중 앞에 무릎 꿇은 륜사를 보기 위해 모인 것 같았다.

반명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광대뼈 아래쪽이 경련으로 떨리기까지 했다.

“륜사도 만만치 않은데요.”

반우현이 속삭였다.

“륜사가 아니야. 그 녀석이야.”

반명은 최근 수도 용금탄에서 이곳 물의 도시로 내려온 명국영을 떠올렸다. 죽여야 한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륜사가 아무리 위대한 마법사가 된다고 해도 무섭지 않은데, 마법은 물론 권력도 없는 그 명국영을 생각하면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졌던 것이다.

그 노인이 내민 더러운 손수건을 륜사가 받아서 이마를 닦자 군중은 환호했다. 아니, 도시가 흥분해서 소리를 질렀다.

굴욕을 참으며 무릎을 꿇고 감동적인 연설을 한 대가로 ‘도시’ 그 자체를 얻은 륜사는 고개를 돌려 뒤쪽에 서 있는 명국영을 쳐다봤다.

처음 명국영의 제안을 들었을 때는 피가 거꾸로 솟는 것만 같았다. 수룡으로부터 도시를 구한 영웅인데 왜 무릎을 꿇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명국영이 거듭 강조하며 반드시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반신반의하며 실행했는데, 이런 반응이라니.

명국영이 손가락으로 운하 쪽을 가리켰다. 그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륜사는 이쪽을 바라보는 시장 반명과 도시의 계승자 반우현을 발견했다. 일그러진 얼굴이 터지기 직전이었다. 륜사는 폭소를 터트릴 뻔했지만 겨우 참았다.

군중의 함성을 들으며 탑으로 돌아온 륜사는 명국영 앞으로 갔다.

“시장의 얼굴, 기가 막히더라.”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을 것 같아서 찾아봤는데, 거기 있을 줄은 몰랐네.”

명국영도 웃고 있었다.

“자네 덕분에 전화위복이 되었어. 11인위원회의 결정을 이런 식으로 뒤집을 줄은 몰랐어.”

“기뻐하긴 아직 일러. 더 심각한 문제가 남아 있으니까.”

“심각한 문제?”

륜사는 명국영의 얼굴에 깃든 수심의 구름을 볼 수 있었다. 그 교활한 반명의 수작을 격파한 명국영이 저렇게 걱정을 할 문제가 대체 무엇일까? 그런 질문을 던진 륜사도 곧 표정이 어두워졌다.

“올라가서 얘기하지.”

명국영의 말에 두 사람은 부탑주실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부탑주실의 창가에 서서 도시를 내려다보던 명국영이 몸을 돌려 친구를 바라봤다.

“맞네. 천마들이야. 백휘섬선 광오선 같은 분은 내색하지 않고 있지만.”

백휘섬선과 달리, 사령마 만표는 노골적으로 아레마고가 남긴 ≪지완수≫를 보고 싶다고 요구했던 것이다. 사령마는 만약 ≪지완수≫가 가짜라면 결코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의지를 온몸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음마성 율암, 광마 종만추, 암혼빙마 백탁은 가타부타 말이 없지만 기회가 주어진다면 결코 포기하지 않을 사람들이었다.

“……한 가지 묻고 싶네.”

륜사는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면서 말했다.

“말해 보게.”

륜사 쪽으로 다가온 명국영.

“자네, 이런 일이 벌어질지 몰랐나? 그러니까 천마들이 그 책 때문에 문제를 일으킬 거라는 점을 말이야.”

“아니, 예상하고 있었네.”

“…….”

륜사는 깜짝 놀랐다. 그는 용마렵에 천마들을 초청하고 싶을 뿐 그 이상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천마를 이곳으로 부를 수 있다는 말에 명국영의 제안을 덥석 받아들였는데, 이런 일이 터진 것이다.

“이게 무엇인지 아는가?”

륜사 맞은편에 앉은 명국영은 오른쪽 손바닥을 펼쳤다. 푸르스름한 형태의 구름이 손바닥 중앙에 새겨져 있었다.

“뭔가 대체?”

“아레마고의 문양이네.”

“……아레마고의 문양?”

의문을 표하는 륜사에게 명국영은 이곳으로 내려와 아레마고의 문을 지날 때 벌어진 현상을 알렸다.

륜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그게 정말인가?”

“내가 헛소리를 즐기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자넨 헛소리를 할 사람이 아니지. 그렇다면 자넨 아레마고의 계승자가 되었구먼.”

“맞네. 바로 그 때문에 천마들을 이곳으로 불러들인 거라네. 자네의 소원도 들어줄 겸.”

“하지만 ≪지완수≫는 없지 않나?”

“≪지완수≫가 존재하는지 그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천마들은 아레마고의 문이 깨어났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을 걸세. 유타호를 지배하던 거룡 만운주를 제압하고 물의 도시를 건설한 대마법사 아레마고의 유산을 포기할 리가 없으니까.”

“설마, 자네……?”

륜사의 목소리가 떨렸다.

“맞네. 그 어르신들에게는 죄송하지만 난 뒷짐 지고 느긋하게 천마들이 무엇을 하는지 지켜볼 생각이네. 그러면 이 손바닥에 새겨진 문양의 의미도 알 수 있겠지. 안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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