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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륜사는 입을 쩍 벌린 채 다시 창가로 가서 도시를 내려다보는 명국영을 쳐다봤다.
세상에!
그 무시무시한 천마들도 저 친구에겐 사냥감을 쫓기 위해 동원한 사냥개에 불과했다. 코를 킁킁거리며 사냥감에게 접근하는 사냥개를 천천히 뒤따르기만 하면 된다는 게 명국영의 생각이었다. 아마도 계승자가 정해졌으니 천마들은 아레마고의 흔적을 찾아 헤매다가 결국 남 좋은 일만 하고 말 것이다.
순간, 륜사는 명국영이 자신의 친구라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저 친구가 시장 반명의 측근이라면……? 그보다 더 큰 재앙은 상상도 할 수 없으리라.
“그 제안은 생각해 봤나?”
명국영이 고개만 돌려서 물었다.
“제안이라니?”
“황마사.”
“아…….”
“나는 자네가 그 제안을 받아들였으면 하네.”
“이유는?”
륜사는 자유를 포기하고 명성을 택하고 싶지는 않았다. 황제를 졸졸 따라다니는 역할은 그에게 맞지 않았던 것이다. 다만, 명국영이 이토록 확고하게 말한다면 그에 걸맞은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거대한 태풍이 다가오고 있네. 어디서 어떻게 시작될지는 모르겠지만, 태풍이 오고 있어. 난 자네가 제국 전체를 휩쓸 그 태풍의 중심부에 서기를 원하네. 안전 때문이 아니야. 어쩌면 남자로서, 한 사람으로서 해 볼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네.”
“가장 위대한 일? 그게 뭔가?”
“세상을 바꾸는 것.”
명국영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는데, 그 눈이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자네, 무서운 사람이구먼.”
“자네도 마찬가지 아닌가?”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웃었다.
소리 내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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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와 거미의 체액이 뒤덮여 진흙탕에 빠졌다가 밖으로 나온 듯한 단태는 겨우 예간 안으로 들어오는데 성공했다. 거미들은 의외로 강한 단태로 인해 동족이 많이 죽자 지쳐서 쓰러지게 만들 생각으로 포위했는데, 갑자기 예간의 문을 열고 안으로 뛰어들자 깜짝 놀라 석벽을 두드렸으나 이미 늦었다.
머리와 몸통만 있는 대리석 조각상, 창문 밖을 바라보는 착각마저 불러일으키게 하는 풍경화, 기이한 분위기를 풍기는 황금가면, 스스로 연주하는 두 쌍의 피리, 오래된 악보 등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는 예간 안으로 들어선 단태가 중앙에 서자, 어두컴컴한 바닥에서 빛이 나뭇가지 형태로 뻗어 나가더니 바닥은 물론 벽과 천장을 수놓았다. 느리게 치는 번개처럼 빛이 번져 나가자, 예간 전체가 환해졌다.
단태는 여전히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누워서 미친 듯이 자고 싶었다. 얼마나 죽였는지 몰랐다. 반사적으로, 때로는 기계적으로 칼을 휘두르고 발로 걷어찼다.
바닥과 천장, 벽을 가득 채운 마른 나뭇가지 같은 빛은 이제 방을 채운 예술품의 표면으로 번져 나갔다. 여인의 나체 조각상, 거대한 주먹을 형상화한 바위 조각, 위에서 내려다본 풍강산맥 전체를 옮겨 놓은 듯한 형상 등 다양한 조각상 위로 빛의 선이 나타났다.
그때, 귓가에 속삭이는 소리가 있었다.
“……무사히 도착했군.”
유천주였다.
화들짝 놀라서 두리번거리는 단태.
“여기는 대혈이다. 못된 놈들이 내가 죽기를 기다리는데 아직은 내가 두려운지 다가오지는 못하고 있지. 거기 도착했으니, 어서 천살제주를 발동시켜라. 방법은 간단하다. 거대한 주먹 조각상의 엄지에 손을 올리기만 하면 된다.”
힘이 빠져 목소리는 같아도 뒷방 늙은이 같은 목소리로 유천주가 말했다.
단태는 그 주먹 형태의 조각상 앞에 선 후에야 이 방을 채운 빛의 나뭇가지들이 기이한 형태의 마법진이며, 그 마법진의 중심에 저 조각상이 놓여 있음을 알아차렸다. 용족답게 조각상을 마법진에 이용한 것이다.
단태는 숨을 가라앉히며 그 엄지에 손을 올렸다. 기이한 진동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자, 빛의 나뭇가지는 흐릿해졌다.
잠시 후, 단태는 예간 밖으로 나왔다.
통로는…… 거미들의 무덤이었다.
몸을 뒤집은 채 다리를 위로 들어 올린 자세로 죽어 있는 거미들을 밟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그 어떤 융단이나 깔개보다 푹신한 그 몸통을 밟으며 꼭 이런 결과여야 했는지 생각했다.
아직도 죽이려고 달려드는 거미들의 그 살벌한 몸짓을 잊을 수 없지만, 마법진의 발동으로 몰살당한 거미들을 밟고 대혈로 가려니 약육강식이라는 자연의 규칙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거미들과 자신의 차이는 단 하나뿐이었다. 천살제주라는 마법진이 없었다면 처지는 정반대였을지도 몰랐다.
마침내 대혈에 도착했다.
용혈에 있는 방 중에서 가장 커서 본체로 돌아간 유천주가 열 마리나 더 있어도 수용이 가능한 그 대혈 중앙에 유천주가 누워 있었다. 아직은 인간의 모습이었다. 그 유천주를 향해 가는 동안 수백 마리의 거미들이 배를 보인 채 죽어 있었다.
유천주는 왜 용혈에 있는 하족 모두를 죽이는 마법진을 그 방에 설치했을까?
이런 날을 알고 있었을까?
단태는 유천주 앞에 앉았다. 서 있을 힘이 없었다.
유천주가 힘겹게 눈을 떴다.
“……드디어 왔군.”
“…….”
단태는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는데, 유천주 옆에 누워서 눈을 감고 자고픈 충동을 겨우 뿌리쳤다.
“이제 용혈은 너의 것이다.”
“……별로 안 기쁩니다. 그보다, 결존계가 그렇게 된 게 전부 저 때문이라구요?”
“그래, 너 때문이다.”
유천주는 희미하게 웃었다. 이런 대화가 즐거운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기침을 했다. 가슴까지 들썩일 만큼.
기침이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린 단태가 물었다.
“아까 그 말, 무슨 뜻입니까?”
“말 그대로다. 널 위해서 나를 희생하겠다는 뜻.”
“…….”
희생이라는 단어와 어울리지 않는 단 하나의 존재를 꼽으라면 저 유천주일 텐데. 단태는 유천주가 무엇을 하려는지 아직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지쳐서 쉬고 싶었다.
“난 이제 끝이다. 되돌릴 수도 없고, 이유는 모르지만 되돌리고 싶지도 않다. 세상 어딘가에 너처럼 운 좋게 살아남은 용족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보기에 넌 마지막 용이다. 세상에 단 하나 남은 위대한 존재인 것이다. 그러니 위대한 존재답게 생각하고, 행동해라.”
“……알았으니까, 일어나시죠.”
일부러 농담조로 말하는 단태.
“내가 귀찮은 게로구나? 하긴, 지쳐서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니 그럴 만도 하지. 허나, 내 이야기를 들으면 정신이 번쩍 들 것이다.
먼저, 네 몸에 대해 이야기하자. 넌 풍혈지체다. 그 빌어먹을 몸 때문에 내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결존계가 망가지고 말았다는 부분은 잠시 잊고, 그 풍혈지체의 부작용을 잡는 법을 알려 주마. 마간을 뒤지면 아레마고라는 멍청한 인간의 책이 있다. 이름이 뭐더라…… 그래, ≪지완수≫다. 그 책을 살펴보아라. 그러면 풍혈지체의 치명적인 부작용을 해결하는 방법을 찾을 수도 있겠지. 하나, 언젠가 너는 천린풍탑으로 가야 할 게다. 그래야 할 테니까.”
유천주는 손가락으로 단태의 오른손, 더러운 헝겊으로 칭칭 감아놓은 그 손바닥을 꾹 눌렀다. 그러자 시원한 느낌이 들면서 찢어진 피부가 깨끗하게 이어졌다. 헝겊을 푼 단태는 눈앞의 용이 진짜 죽어 가는 중일까 생각했다.
유천주가 말을 이었다.
“사실, 오랫동안 난 너를 의심했다. 네가 인간인지, 아니면 용인지를. 그러나 의심의 시기는 끝났다. 완전히. 네가 과거에 인간이든, 용이든 그건 중요치 않다. 지금 이 순간, 넌 용이며, 용이어야 한다. 고룡 암탄주가 너를 선택했고, 나 수룡 유천주가 널 선택했기 때문이다. 너도 알다시피 나 역시 저주에 걸리고 말았다. 내가 네 작하족 과정을 서두른 이유는…… 바로 그 저주 때문이었다. 저주로 인해 남은 날이 지나가 버리기 전에 널 어엿한 용으로 키워 내고 싶었다. 허나, 일이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구나. 그래도 아직 절망할 필요는 없다. 절망은 용족에게 어울리지 않으니까. 인간 따위에게나 어울리는 말이니까. 난 저주가 남은 심장 하나를 먹어 치우기 전에 나 스스로 내가 살아온 삶을 버리려 한다.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지혜를 숭상하는 진정한 용족의 삶 대신, 야만적이고 굴욕적인 삶을 선택하려는 것이다. 만약 네가 없었다면 난 마력을 쥐어짜내 이 용혈과 함께 최후를 맞이했을 것이다. 허나, 바로 네가 있기 때문에 난 포기할 수 없고, 포기하지도 않는 것이다. 잘 들어라. 나 유천주는 자존심을 꺾고 한낱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용이 되려 한다. 인간의 지시에 따라 가축처럼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그 버러지 같은 용이다. 넌 그런 용이 된 나의 주인이다. 오직 너만이 내게 지시를 내릴 수 있다. 저 밖에는 네가 감당하지 못하는 인간들이 존재한다. 저주에 걸리지 않았다면 휩쓸어 버릴 수 있는 하찮은 인간들이지만. 그러니 넌 최대한 네가 누구인지를 숨겨라. 용이라는 사실을 들키는 순간, 넌 너를 노리고 달려드는 사냥꾼들에게 쫓기게 될 것이다. 다행히 넌 인간으로 자라왔기 때문에 인간처럼 사는 게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내가 네게 가르친 용족의 자존심은 잠시 덮어 두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