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163화 (163/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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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천주는 손을 뻗었다. 악수를 청하는 듯한 행동에 단태는 문양이 새겨진 손으로 유천주의 손을 맞잡았다. 곧 찌르는 듯한 고통에 단태는 인상을 찡그리며 손을 뗐다.

“지금부터 손바닥에 새겨진 그 마법진 ‘용문’은 네가 스스로 깨뜨릴 때까지 용으로서의 기운, 즉 용투기를 봉쇄할 것이다. 인간 중에는 용투기를 감지하는 놈도 있다. 용문은 그들로부터 널 지켜 줄 것이다. 비록 용문이 네 성장을 가로막는 장애물이지만, 용문을 스스로 뛰어넘는 순간 넌 나 이상의 용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말한 유천주는 몸을 일으켜 손을 뻗더니 단태를 저 멀리 던져 버렸다.

죽어 나자빠진 거미들 위로 떨어져 전혀 다치지 않은 단태는 인간이었던 유천주의 몸이 커지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삽시간에 집채만큼 커진 유천주는 귀족가의 저택보다도 큰 본체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물의 도시 유타루체의 시청을 무너뜨린 그 용이 대혈의 중앙에 자리 잡고 있었다.

유천주는 고개를 숙여 단태를 쳐다봤다. 커다란 눈은 아직 지혜를 품고 있었다.

“부디 저주를 풀어 위대한 종족의 명맥을 이어라.”

그 말을 마친 유천주의 눈에서…… 이성과 지혜의 기운이 사라지고, 광기와 흉포함만 남았다.

위대한 존재였다가 몸집만 큰 짐승이 된 유천주는 여전히 단태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더 이상 저 용은 유천주가 아니었다. 수도 용금탄으로 갈 때 타고 갔던 천마룡과 다를 바 없는 용이었다. 그 용을 쳐다보는데, 갑자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극심한 슬픔 때문이 아니었다.

저 위대한 종족조차 집어삼키는 저주에 대한 두려움 때문도 아니었다.

한참 만에 단태는 이 감정에 걸맞은 설명을 찾아냈다.

애잔함이었다.

아름다운 여인이 늙어서 추해지는 광경을 지켜보는 것처럼, 웅장해서 누구나 감탄하는 건축물이 시간이 흘러 퇴락해서 무너지는 것처럼, 결국 죽거나 없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에서 자유로운 존재는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기 때문에 찾아온 감정이었다.

거기에는 저 위대한 존재가 처음으로 ‘희생’을 했다는 사실에 대한 감격도 포함되어 있었다. 마지막 용을 위하여!

유천주는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냥꾼의 명령이 떨어지면 달려 나갈 준비가 된 사냥개처럼.

“……넌 지금부터 나의 무룡이다.”

도무지 저 용을 유천주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없는 단태는 다른 이름을 붙였다. ≪무무비경≫의 ‘무’를 따서 붙인 그 이름이 마음에 드는지 용은 고개를 들고 포효했다. 그 공간 전체가 흔들릴 만큼.

무룡은 노예처럼 머리를 바닥에 대어 단태가 정수리로 쉽게 오르도록 자세를 취했다.

단태는 잠시 무룡을 쳐다보았다.

그 자존심 센 유천주가 이런 선택을 하다니. 도시를 부수고, 사람은 물론 자신의 하족까지 장난감처럼 가지고 노는 유천주를 싫어했지만 유천주가 용족으로서 내린 마지막 결정 앞에서 이전의 기억은 녹아내렸다. 자존심 강한 인간에게도 힘겨운 선택이 아닌가.

또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유천주로 인해 눈물을 흘릴 줄은 상상도 못했다. 멈추려고 해도 멈출 수가 없었다.

정수리에 올라 뿔을 잡았는데, 무룡의 의지가 느껴졌다. 수틀리면 누구든 죽여 버리는 살벌한 용의 의지가 아니라, 사냥꾼이 데리고 다니는, 주인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해내고 말겠다는 사냥개의 의지였다! 단태는 그 의지를 무시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스스로 짐승이 되어서라도 용족의 미래를 염려한 유천주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밖으로.”

그 말에 무룡이 반응했다.

황금이 깔린 공간을 미끄러지듯 움직인 무룡은 용혈 밖으로 이어진 물웅덩이로 몸을 던졌다. 뿔을 꽉 잡은 단태는 무룡의 몸이 역동적으로 움직이며 물을 헤치고 나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무룡의 몸은 여전히 위력적이었다.

용혈과 호수 사이를 가로막은 용혈막을 너무나 쉽게 통과한 무룡.

단태는 3년 전 딱 한 번 보았던 호수의 바닥을 잊지 않았던 터라, 황폐해진 광경에 깜짝 놀랐다. 유천주에게 잡혀 용혈로 내려왔을 때, 호수의 바닥은 색색깔로 빛나는 해초로 숲을 이루고 있었다. 지상의 어떤 숲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수중 숲이었다.

그 숲은 어디로 가 버렸을까?

단태는 명령을 내려 위로 올라갔다.

수면을 뚫고 하늘로 날아오른 순간, 노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유천주로 인해 흘렸던 눈물, 그래서 오늘 하루 흘릴 눈물은 다 흘렸다고 생각했던 그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이 평범하면서도 아름다운 노을을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지 이제야 깨달았던 것이다.

상공으로 날아오른 무룡의 정수리에서 내려다본 호수는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용마렵을 위해 도시 밖으로 나왔다가 호되게 당한 배들은 모조리 물의 도시 서쪽 방책 안쪽으로 들어가 버렸고, 수만 마리씩 떼를 지어 몰려다니는 물새들이 무룡을 보고 깜짝 놀라 호수의 북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저 멀리 노을에 반사되어 주홍색으로 빛나는 구름을 쳐다본 단태는 당장 물의 도시로 날아가고픈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 충동에 몸을 맡기지 않았다.

엄마와 여동생을 찾고픈 강렬한 열망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륜사와 명국영 그리고 여화를 만나고 싶은 마음도 가라앉혔다.

“다시 용혈로 내려가자.”

단태는 노을에 빛을 발하는 물의 도시 유타루체를 바라보며 명령을 내렸다.

*지완수

운미는 죽어 있었다.

용혈을 샅샅이 뒤진 끝에 갈라진 바닥 아래에서 발견된 운미는 목이 부러졌는데, 단태는 유천주가 죽였다고 확신했다. 단태조차 유천주가 부르기 전에는 들어갈 수 없는 서재의 갈라진 틈에서 운미가 발견된 것이다. 한동안 운미를 내려다본 단태는 직접 땅을 파서 운미를 묻었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다음은 설고였다.

몸이 하얀 설고를 찾아내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배를 보이고 누워 있는 설고를 옮겨 운미 옆에 묻은 단태는 잠시 옆에 앉아 길게 숨을 내쉬며 시간을 보냈다. 설고가 다른 선택, 종족 대신 그녀 자신의 삶을 추구했다면 어땠을까? 이렇게나 많은 동족의 몰살을 목격한다면 설고는 더 이상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지 못했으리라.

설고는 야성과 이성 사이에 끼여 불운한 시간을 보낸 기이한 존재였다. 누구도 설고를 비난할 수 없다고 단태는 생각했다. 심지어 그 자신도 비난할 생각이 없었다. 설고가 이대로 잊히는 게 싫었던 단태는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설고에 대한 이야기를 책으로 쓰리라 마음먹었다.

용혈에서는 그나마 고향처럼 푸근한 느낌을 자아내는 용옥간으로 돌아온 단태는 벽에 기대고 앉아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 빛나는 용옥을 쳐다봤다. 저 용옥을 남긴 용은 모조리 죽었다.

유천주까지도.

유천주의 몸은 살아 있지만 그 실체, 즉 정신은 소멸되어 찾을 수가 없었다.

단태는 혼자 있기 싫어서 대혈로 향했다. 무룡의 몸에 기대니 마음의 떨림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유천주는 감당하기 힘든 짐을 남기고 가버렸다. 그는 진실을 몰랐을까? 아무리 숨겨도 진실을 간파해내는 유천주라면 처음부터 단태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았을지도 몰랐다.

그러면 왜 그따위 유언을 남겼을까?

“대체 왜 그랬습니까?”

그 소리에 무룡이 그 거대한 눈으로 단태를 쳐다봤지만 지혜로운 눈빛은 아니었다.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몸은 자유로운데 마음은 도저히 풀 수 없는 사슬로 묶인 느낌이랄까?

앞으로 어떻게 할까?

규칙적으로 부풀어 올랐다가 줄어드는 무룡의 배에 기댄 채, 단태는 생각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명국영식 생각’이 그리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명국영이 가르친 생각은 주위 환경, 주어진 조건 등을 분석하는데 유익한 사고의 틀이었다. 지금 단태에게 필요한 건, 면밀한 이성적 접근이 아니라 명쾌한 의지였다.

유언, 유산 따위 무시하고 살 수 있다면 거미들이 죽어 나자빠져 공동묘지 같은 곳에서 한숨이나 쉴 이유는 없다. 그러나 단태는 유천주가 남긴 마지막 말을 망각의 강으로 떠내려 보낼 수가 없었다. 유언은 결존계보다 더 강력한 마법이었다.

‘결국 말이 곧 마법이었어…….’

단태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때, 오른쪽 팔뚝이 따끔거리더니 피부가 찢어지며 바람이 흘러나왔다. 핏방울이 섞인 바람은 조그만 회오리가 되어 윙윙 소리를 내며 불었다. 아랫입술을 깨문 단태는 옷을 찢어 상처를 감쌌다. 곧 바람은 사라지고 피가 바닥에 흩어졌다.

당장 해야 할 일이 생각났다.

단태는 즉시 마간으로 향했다.

한참을 뒤진 끝에 아레마고의 ≪지완수≫를 찾아냈다. 사실, 뒤질 필요는 없었다. ≪지완수≫는 암기를 했기에 머릿속에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직접 책을 만지고 싶었다.

단태는 ≪지완수≫의 첫 부분이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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