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165화 (165/293)

<-- 165 회: 4-42 -->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고통스러운 시절을 통해 지혜를 배운 아레마고는 자신을 박대하고 협박한 사람들을 찾아가 복수하는 대신, 커다란 호숫가에 자리를 잡았다. 거기서 문을 만들며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마법의 비밀을 가르쳤다. 자연스럽게 아레마고를 찾아온 사람들이 머무는 평지는 마을로 성장했고, 곧 도시가 되었다.

그 도시가 바로 물의 도시 유타루체였다!

단태는 책을 덮었다. 책 곳곳에 자리 잡은 전문적인 마법 이론이 담긴 내용은 건너뛴 덕에 단번에 읽을 수 있었지만, 그래도 아쉬웠다. 아레마고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었던 것이다.

이번에는 왼쪽 팔에 경련이 일었다. 팔꿈치와 손목 사이의 피부가 터져 피가 흘러나왔고, 곧 붉은 소용돌이가 윙윙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잠시 후, 경련은 멈췄다.

“휴우.”

단태는 용족 특유의 치료 마법인 ‘용경체’를 펼치려 했지만 손바닥에 새겨진 용문이 마력의 흐름을 막아 버렸다.

결국 그는 용혈을 뒤져 약효가 있는 수초와 깨끗한 헝겊을 찾아서 상처를 치료했다.

시간이 흐르며 갈라진 피부가 서서히 붙으며 아물기 시작했지만, 가끔 찾아오는 발작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그럴 때마다 시야가 흐려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극심한 현기증이었다.

인간이든, 용이든 상관없이 해야 할 일이 생겼다.

한시라도 빨리 풍혈지체의 부작용에서 벗어나야 한다!

단태는 ≪지완수≫를 다시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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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령마 만표는 위를 올려다봤다.

1온(대략 20미터) 높이의 기둥이 무지개 형태로 이어져 파란 하늘을 둘로 쪼개고 있었다. 대마법사 아레마고를 상징하는 구름 문양이 새겨진 기둥은 대리석 특유의 매끈한 윤기를 드러내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나무 재질 같은 온기도 발산하고 있었다.

사령마는 손을 들어 아레마고의 문을 만졌다.

첫 느낌은 차돌 같은 단단함이었다. 그 어떤 무기로도, 심지어 마법을 동원해도 무너뜨릴 수 없는 견고함이 손바닥을 통해 전해졌다.

그런데 그 딱딱함 속에 부드러운 감촉이 숨어 있었다. 물컹거리는 느낌이 들 만큼 기이했다.

한참 후에야 사령마는 아레마고의 문에 대해 전문적으로 연구한 엄포윤이라는 작자의 주장에 일리가 있음을 인정했다. 이 문, 어쩌면 신비의 나무 절고굉목처럼 살아 있는 건축물일지도 몰랐다.

본능적인 거부감이 일었다.

수백 년, 아니 천 년 이상을 같은 자리에서 버티고 서 있는 건축물을 무너뜨리고 싶은 충동이 사로잡히고 말았다. 후령사탑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부패의 과정을 거친다는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죽음은 변화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닌가.

만표는 투형망을 펼쳤다. 손바닥을 통해 패혈력이 아레마고의 문기둥으로 파고들었다.

“윽.”

튕겨 나온 패혈력이 가한 충격에 뒤로 두 걸음이나 물러선 만표의 입가로 피가 흘러내렸다. 천마의 경지에 다다른 마법사의 공격마저 간단히 튕겨 내다니.

“자네다운 행동이구먼.”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만표는 눈살을 찌푸렸다. 저 작자와는 말을 섞고 싶지 않았지만, 피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건 후령사탑의 명예와 직결되는 문제였다.

재빨리 입가의 핏자국을 소매로 닦아낸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려 항상 웃는 표정의 백휘섬선 광오선을 쳐다봤다.

“고고한 척하더니 당신도 결국 아레마고의 ≪지완수≫ 때문에 여기로 찾아온 게 아닌가?”

“난 고고한 척한 적 없는데.”

“…….”

만표는 언제나 능글능글 웃는 광오선이 싫었다. 그에게 패한 이후로 볶수의 순간을 손꼽아 기다려 왔지만 아직은 부족했다. ≪지완수≫를 얻으려고 이곳까지 찾아온 것도 따지고 보면 눈앞의 늙은이 때문이었다.

“자네, 유천주를 사령으로 삼을 생각이었나?”

“……말도 안 되는 소리.”

“다른 사람들은 다 속여도 날 속일 수는 없네. 자네의 사사로운 생각 때문에 대어를 놓쳤네. 뭐, 자네 입장을 고려한다면 비난할 수는 없지. 거기서 유천주를 죽여 봐야 이익은 물의 도시와 황제에게 돌아갈 테니 말이야. 아닌가?”

광오선은 실없이 잘 웃는 할아버지의 표정을 하고 있지만 번득이는 눈 너머에는 진실을 꿰뚫는 지혜가 숨어 있었다.

“헛소리에 신경 쓸 여유는 없으니, 꺼져.”

“사람은 논리에서 막히면 항상 그런 반응을 보이는 법이지. 화내지 말게. 난 싸우려고 자넬 찾아온 게 아니니까. 아레마고의 문을 어루만지는 모습을 보니, ≪지완수≫를 포기할 수는 없는 모양이지?”

“그쪽도 마찬가지 아닌가?”

“오금반서관에서 재미있는 기록을 발견했네. 자네도 눈독들일 만한 기록이네. 무현 대제국 말기에 작성된 그 기록에 따르면, 저 물의 도시 지하에는 미로처럼 복잡한 통로가 있는데, 그 통로의 기원이 호수의 주인 만운주라더군.”

“만운주? 수룡들의 우두머리 말인가?”

“맞네. 그 까다로운 용이 호수의 밑바닥에 용혈을 만든 모양인데, 지금은 흑야궁이라 불리는 그 미로 어딘가에 용의 보금자리인 용혈로 통하는 길이 있을 걸세. 어떤가? 나와 함께 유천주의 용혈로 내려가 볼 생각, 없는가?”

“미쳤군.”

만표는 용혈로 몰려갔다가 몰살당한 마법사들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유천주는 저주에 걸렸네.”

“…….”

“저주에 걸려 약해지지 않았다면 용마렵에서 자네와 나, 그리고 천마들과 일부 마법사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조리 죽었겠지. 내 평생 그렇게 약한 용은 처음이었네. 내가 기록을 통해 접한 그 유천주라면 천마 중 절반은 죽었을 걸세.”

만표는 그 지적이 옳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사유위룡을 펼쳤을 때 느껴진 용투기도 그리 강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저 늙은이의 말은 구미가 당기는, 거절하기 어려운 제안이리라.

“아마도 그 용혈에 ≪지완수≫가 있을 것 같네. 그리고 자네가 거절한다고 해도 난 내려갈 생각이네. 암혼빙마와 광마가 함께 하기로 했으니까. 아, 그렇지. 용천마도 동행하기로 결정했네. 자네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

“천마들이 한꺼번에 움직인다면 내가 빠질 수는 없지.”

≪지완수≫에 눈독을 들이는 만표는 광오선이 암묵적으로 이끄는 무리에 참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광오선이 ≪지완수≫를 얻도록 내버려둘 마음이 전혀 없었다.

“잘 생각했네. 사흘 후에 출발하니 그때 보세.”

광오선을 반가운 친구와 헤어지는 게 아쉬운 사람처럼 손을 흔들며 물의 도시로 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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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룡어는 발작에도 효과가 있었다. 금룡어 눈알을 집중적으로 먹었더니, 발작의 횟수가 확연히 줄어들었다.

문제는 돌 항아리에 보관된 금룡어가 몇 마리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지금까지 금룡어를 잡아오는 일은 하족인 거미들의 몫이었다. 거미들이 모조리 죽어 버렸으니 그 일은 단태가 직접 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금룡어를 잡을까 생각하면서 단태는 죽은 거미의 몸을 치웠다. 거미가 썩어서 악취를 풍겼던 것이다. 한 번도 거미들이 어디에서 사는지 생각하지 않았던 단태는 두 손으로 축 늘어져 무거운 거미를 끌고 땀을 흘리면서 아래로, 아래로 내려간 후에야 그 공간을 발견했다. 축축하고 어두컴컴한 공간은…… 커다란 구덩이였다.

단태는 죽은 거미를 그 구덩이에 던져 넣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용과 하족의 관계가 항상 이런 식으로 끝날 수밖에 없을까? 유천주는 언제든 원할 때 하족을 죽일 수 있는 마법진을 만들어 뒀어.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었다는 뜻이지.’

강압에 의한 관계는 파탄에 이르기 십상이다.

용혈 곳곳에서 죽은 거미를 구덩이로 옮기는 데 족히 몇 년은 지난 것 같았다. 물론 기껏해야 사나흘이라는 사실을 단태는 알고 있었다. 그동안 거미들이 모아 둔 해초와 금룡어를 맛있게 먹어 치웠고, 곧 먹을거리는 바닥났다.

단태는 대혈에서 그리 멀지 않은 방 ‘어혈’ 앞에 섰다. 거미들만 출입하여 금룡어를 잡는 이 방에는 대혈처럼 호수의 물이 들어와 있었다.

보간을 뒤져서 찾아낸 황금 등잔에 기름을 채우고 불을 붙여 그 어두컴컴한 방으로 들어선 그는 가끔 수면 위로 솟구치는 금룡어를 볼 수 있었다. 이유는 몰라도 호수에 사는 금룡어가 어혈의 절반을 차지한 연못으로 들어온 모양이었다.

“어떻게 잡지?”

문제는 곧 해결되었다.

잠자코 기다리고 있다가 큼직한 금룡어가 물 위로 솟구치는 순간, 물로 기다란 창을 만들어 금룡어를 꿰어 연못 밖으로 끄집어 낸 것이다.

처음 몇 번은 실패했고, 그로 인해 연못에는 악어와 물뱀도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상처 난 금룡어를 향해 달려드는 악어, 물뱀 때문에 물거품이 일었던 것이다.

수초는 어혈 바로 옆에 있는 방 ‘초혈’에서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다. 그동안 수초와 물고기만 먹었기 때문에 당분간 식량 걱정은 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틈틈이 읽은 ≪지완수≫를 떠올리면서 단태는 용혈을 돌아다녔다.

유천주가 수집한 보물로 가득한 방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보간에 들어가서 예쁜 반지를 손바닥에 올려놓은 단태는 못 본 지 오래된 엄마를 떠올렸다. 엄마의 손가락에 끼우면 딱 좋을 반지였다. 여동생에게 어울리는 목걸이도 있었다.

손에 올려놓은 반지와 목걸이를 내려다보는데, 용솟음치는 그리움을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먼발치서라도 엄마가 무사한지 보고 싶었다.

단태는 용혈을 벗어나 물의 도시로 가 보기로 마음먹었다. 용혈을 버리고 떠날 생각은 없었다. 그저 잠시 바깥세상으로 나가고 싶을 뿐이었다.

살아 있는 금룡어의 눈알을 직접 도려내어 가죽 주머니에 넣은 단태는 대혈로 향했다. 단태를 본 무룡이 몸을 일으키더니 쿵쿵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무룡의 그림자가 단태를 덮었다.

“밖으로 가자.”

낮고 묵직하게 울음을 터트린 무룡의 정수리로 올라간 단태는 곧 용혈 밖으로 나왔다.

호수는 평온했다.

황혼이 내려앉은 수면 위로 물새들이 날아다닐 뿐 배는 한 척도 보이지 않았다. 단태는 무룡을 호수의 북쪽으로 움직였다. 뾰족한 뿔만 물 밖으로 내민 채 유유히 움직이는 무룡이 북쪽 기슭에 가까워지자 단태는 무룡의 뿔을 잡고 속삭였다.

“잠깐 갔다 올 테니까 깊은 곳으로 내려가서 기다려.”

물로 뛰어내린 단태는 헤엄을 쳐서 호수 밖으로 나왔다. 몸을 돌려 호수를 살폈는데, 고목의 가지처럼 생긴 무룡의 뿔이 서서히 아래로 사라지고 있었다.

파릇파릇 선명한 녹색의 풀을 밟는 느낌이 낯설었다. 발바닥에 와 닿는 풀잎 중에는 거친 것도 있었는데, 그제야 단태는 맨발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입고 있는 옷도 재질에 비해 엉망진창이었다.

이대로 가면 도시의 성문을 통과할 수 없을 것이다.

처음 엄마, 여동생과 함께 물의 도시로 들어섰던 기억을 떠올린 단태는 아무리 옷을 잘 입어도 신분을 알려 주는 증명서 없이 도시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차의 바퀴자국이 남아 있는 길가에 앉아 생각에 잠긴 단태는 벌떡 일어나 길을 따라서 걷기 시작했다.

날은 조금씩 어두워졌다.

조그만 마을을 발견한 그는 거기로 가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돌담을 넘었다. 뒤뜰에 걸려 있는 빨래 중에서 적당한 옷과 신을 슬쩍 가져왔는데, 잘 보이는 곳에 조그만 금 조각을 두고 왔다. 열 벌의 옷과 신을 사고도 남을 금이었다.

단태는 동쪽으로 걸었다. 오래지 않아 물의 도시 유타루체의 정문을 볼 수 있었다. 그가 처음 도착한 날처럼 지금도 짐마차와 수레,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성문을 지키는 관리, 병사들에게 들키지 않고 도시 안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생각하던 그를 커다란 그림자가 덮었다.

용이었다.

3년 전 유천주와 싸웠다가 죽은 천마룡을 닮았지만 그보다 체구가 작은 용이 커다란 날개를 활짝 펴고 성벽을 넘어 물의 도시로 날아갔다.

반사적으로 눈에 집중한 단태는 정수리에 서서 도시를 내려다보는 누천파를 볼 수 있었다. 손바닥에 새겨진 복잡한 마법진 용문은 단태가 용 특유의 마법을 펼치지 못하도록 막았지만, 시력을 강화하는 자연적인 능력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누천파를 본 순간, 가슴이 쿵쿵 뛰었다. 유천주의 용혈에서 3년이라는 시간을 보내느라 잊어버린 현실 감각이 되살아나 저 도시가 얼마나 위험한지 깨달았던 것이다. 한편으로 과거처럼 당하지는 않을 거라는 자신감에 마음이 설레기까지 했다.

저 성벽 너머에 잃어버린 삶이 있었다.

강제로 헤어진 가족도.

순간,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단태는 성문을 통과하기 위해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줄 끝으로 향했다. 사람들 사이에 있으니 흥분과 불안이 몸을 가득 채웠는데, 애써 그런 마음을 가라앉혔다. 사람들은 단태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서 이야기를 나누었고, 단태는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점점 짧아지는 줄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드디어 단태는 갑옷을 입고 창을 든 병사와 성문을 담당한 관리 앞에 섰다.

“통행증명서.”

관리는 어젯밤 과음으로 숙취에 시달린 탓인지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저 잃어버렸습니다. 한데, 주소는 기억합니다.”

단태는 용족의 기억력으로 과거에서 건져 낸 그 주소를 관리에게 불러 주었다. 단태가 엄마, 설희와 함께 꿈을 품고 도착했던 그 집 주소였다.

단태의 몸을 훑던 관리는 잠시 고민에 잠겼지만 결정은 빨랐다.

“그래? 좋아. 통과.”

성문 담당 관리는 그 주소만으로도 눈앞의 청년, 시골 출신의 청년의 앞날을 알아차린 것이다. 정기적으로 노예상인에게 상납을 받는 관리는 사소한 불법쯤은 얼마든지 눈감아 주고 있었다.

성문을 통과한 단태는 서서히 흐르는 운하 특유의 악취를 맡으며 가슴을 폈다.

‘드디어 돌아왔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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