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166화 (166/293)

<-- 166 회: 5-1 -->

*죽음의 마법사

단태는 난간에 서서 운하를 내려다봤다.

오리 몇 마리가 일렁이는 수면에 둥실 떠 있었다. 사람을 무서워하기는커녕 오히려 다가와 던져 주는 과자 부스러기를 기대하는 놈들은 평소와 달리 단태를 피해 잿빛 깃털 달린 날개를 활짝 펴더니 후다닥 날아가 버렸다. 물의 도시의 명성에 이끌려 이곳으로 온 부잣집 꼬마는 울상을 지었고, 곁에 선 가정교사는 서둘러 학생을 볼거리가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단태는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운하의 수면을 반짝이며 저물어 가는 햇살도, 한낮의 더위에서 풀려 나 시원해진 바람도, 오가는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소음도, 운하가 풍기는 악취도, 옆을 스치듯 지나가는 제비 한 마리도 단태를 방해할 수 없었다.

“저…….”

바로 옆에서 들린 목소리에 단태는 정신을 차렸다.

몸을 돌린 단태는 수줍어하는 여자를 발견했다. 운미와 나이가 비슷한 여자에게서 풀잎 향이 강하게 흘러나왔다.

챙이 긴 연두색 모자를 쓴 여자가 단태에게 계곡 사이로 떨어지는 폭포수가 수놓인 손수건을 건넸다.

“이게 뭐죠?”

단태는 수건을 받지 않은 채 여자를 쳐다봤다.

그때, 선착장 쪽에서 웃음이 터졌다. 까르르 여자들 특유의 웃음이었다. 소마선 위에 몇 명의 여자들이 서 있었는데, 다들 단태 앞에 선 여자처럼 화려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재수 없어!”

여자는 단태에게 수건을 던졌다.

단태는 재빨리 피해 버렸고, 수건은 운하로 떨어졌다.

다시 한 번, 소마선에 탄 여자들이 웃어 댔다.

얼굴이 붉게 물든 여자는 몸을 돌려 선착장으로 걸어갔다. 점점 걸음이 빨라졌고, 잠시 후 그 여자는 친구들이 기다리는 소마선에 올라탔다. 단태의 귀로 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 남자 누군지 알아?”

“네가 어떻게 해 보려고 손수건을 주려다가 딱지를 맞은 잘생긴 남자지.”

친구가 낄낄거리며 답했다.

“딱지를 맞아? 내가? 웃기지 마. 저 남자…… 윤가의 소가주야. 얼마 전에 약혼한 윤가의 계승자에 대한 이야기는 너희도 잘 알잖아.”

윤가는 11인위원회에 속한 가문 중 하나로 유타루체 최고의 교육기관 윤가학관을 운영하는 가문이다.

“정말?”

또 다른 친구의 반응.

“손수건을 내민 후에야 얼굴을 자세히 보고 그 남자라는 사실을 알았어. 그래서 그 부분을 지적했지. 약혼자가 있는데도 손수건을 받으려는 행동이 잘못이라고. 그랬더니 자기는 윤가학관 근처는 가 본 적도 없대. 우물거리는데 어찌나 웃기는지.”

“거짓말.”

딱지맞은 거라고 말했던 친구가 한 말이었다.

“진짜라니까!”

흥분한 여자.

그 왁자지껄한 대화는 소마선과 함께 멀어졌다.

졸지에 윤가의 소가주이자 윤가학관의 계승자가 된 단태는 쿡쿡 웃었다. 그제야 여자가 먼저 손수건을 내미는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았다. 마음에 드는 상대를 향한 몸짓이었다. 상류층에서나 통용되는 행동으로 단태는 떠도는 소문이나 이야기를 통하여 접했을 뿐이었다.

살아오면서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마음에 드는 여자에게 다가선 적도 없었다. 그럴 형편이 아니라고, 그럴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잘 생겼다?

내가?

고개를 흔든 단태는 몸을 돌려 ‘문가막’으로 걸어갔다.

문가막은 도시의 동쪽 성문과 연결된 광장의 이름이다. 문가막 곳곳에는 다른 도시, 마을에서 도착한 상인, 여행객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숙박시설, 계좌에 돈을 넣거나 뺄 수 있는 금융조합, 가져온 물품을 맡길 수 있는 공동창고, 금을 포함한 보석을 다루는 귀금속 상점, 의류점, 무기점, 각종 도구를 판매하고 또 고치기도 하는 대장간, 온갖 물품을 다루는 잡화점 등이 자리 잡고 있다.

대상인이나 귀족은 문가막에 머물지 않는다. 운하를 통해 이동하여 북서쪽의 상아별로에 우뚝 솟은 고급 객관을 선호한다. 수만 마전 이상의 거액이 오가는 거래는 대부분 상아별로에서 이루어지고, 문가막에서는 비교적 규모가 작은 물품이 오고 간다.

단태는 간판에 금색으로 ‘범중–금 전문’이라고 적힌 귀금속점 앞에 섰다.

심호흡으로 마음을 추슬렀지만, 호수를 빠져나와 도시로 들어오기 위해 성문 앞에 줄을 섰을 때부터 가슴을, 몸을 가득 채웠던 흥분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사방에서 몰려오는 자극 때문이었다.

한 사람의 손님이라도 끌어들이기 위해 화려한 색깔을 자랑하는 간판과 오가는 사람들의 옷차림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용혈에서 3년이나 지낸 단태에게 문가막은 어디에 시선을 둬야 할지 알 수 없을 만큼 화려한 공간이었다.

귀는 눈보다 더 혼란스러웠다.

한꺼번에 수십 명이 서로 다른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약초를 두고 흥정하는 노인, 피 묻은 칼을 보여 주며 곰을 만나 죽을 뻔했던 며칠 전 경험을 설명하는 용병, 겨우 시간을 내어 왔다면서 약속에 늦은 이유를 알리는 마탑의 수련사, 벌써 술에 취해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주정뱅이 등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강화된 단태의 귀로 파고들었다.

코도 바빴다.

성문 앞에 줄을 설 때부터 악취로 인해 두통이 고개를 들었다. 성문을 무사히 통과할 방법을 고민하느라 잠시 잊었던 그 두통은 본격적으로 단태를 괴롭혔다. 수십 종류의 약초 더미가 뿜어내는 냄새, 여관의 창을 통해 솔솔 풍기는 음식 냄새, 지나가는 사람들, 특히 여자들이 몸에 뿌린 향수 냄새 따위가 뒤섞여 끔찍한 악취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결국 단태는 좁은 골목길로 달아났다.

벽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으니 좀 살 것 같았다. 당장 용혈로 돌아갈까 생각했던 그는 도시로 올라온 이유를 떠올렸다.

“이봐, 괜찮아?”

눈을 뜬 단태는 놀라지 않고 뺨에 칼자국이 난 남자를 쳐다봤다. 훅 다가온 냄새로 남자의 접근을 알았던 것이다.

납작한 모자를 쓴 남자는 30대 중반, 혹은 후반으로 보였다. 단단한 인상의 소유자인 그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군살 박힌 손바닥에는 붉은 알약이 놓여 있었다.

“어지럽지? 이거 먹으면 좋아질 거야. 사양 말고 먹어. 나도 처음 여기로 왔을 때는 현기증으로 혼났거든. 평생 좁은 마을에서 살다가 이런 도시로 오면 그럴 수밖에 없어.”

“…….”

단태는 말없이 사내의 눈을 응시했다.

“왜? 아, 낯선 사람이 약을 건네서 의심스러워? 좋아. 그럼 내가 먼저 먹지 뭐.”

사내는 알약을 입에 털어 넣는 척했지만, 단태의 예리한 눈은 그 빨간 알약이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여 있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았다.

“자, 네 차례야.”

사내는 바로 그 알약을 단태에게 내밀었다.

단태는 알약을 집어 들었지만 삼킬 생각은 없었다. 알약이 풍기는 냄새 때문이었다.

마둔수탑의 종자라면 누구나 기본적인 약초 판별법을 배운다. 마법사가 필요한 재료 중 하나인 약초를 약제실로 직접 가서 타 오는 역할을 맡기 때문에 종자는 눈으로, 코로, 입으로 그리고 손으로 어떤 약초인지 파악하는 법에 익숙해야만 한다.

‘취풍초잖아.’

취풍초는 셀 수도 없이 많은 마법 재료 중 기본에 속한다. 마비를 일으키기 때문에 의사가 치료를 위해 사용하기도 하는데, 마법사도 마법을 펼치는 과정에 찾아오는 고통을 억누르기 위해 소량의 취풍초 가루를 다른 재료와 섞기도 한다.

“젠장. 가진 거 다 내놔.”

인내심이 약한 사내는 예리한 단검을 들어 올렸다.

단태는 상대가 반응하기도 전에 앞으로 다가가 단검을 빼앗고, 벌어진 입에 붉은 알약을 넣은 후, 뒤통수를 가볍게 때렸다.

알약을 삼킨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무, 무슨 짓을 한 거야?”

“먼저 먹는다면서?”

“이 새끼가…….”

남자는 그대로 쓰러졌고, 개똥에 입을 박고 정신을 잃었다.

단태는 어이가 없었다. 밀려드는 자극에 잠시 쉬려고 골목으로 들어왔을 뿐인데, 이런 알약을 갖고 접근하는 놈이 있다니. 그래도 놈 덕분에 흥분이 가라앉았다.

“고마워.”

그냥 골목 밖으로 나가려던 단태는 생각을 바꾸어 사내의 몸을 뒤졌다. 독을 바른 단검과 해독제, 묵직한 지갑, 허름한 반지 몇 개, 특이한 밧줄, 그리고 ‘목증’이 나왔다. 목증은 도시의 시장이 발급한, 얇고 단단한 나무로 된 증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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