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168화 (168/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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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못과 숲 사이 곳곳에 웅장한 자태를 뽐내는 건물이 들어서 있었고, 하인과 하녀 들은 종종걸음을 치며 여기저기로 오가는 중이었다. 짐을 가득 실은 수레 수십 대가 창고 앞에서 짐을 부리고 있었다. 창고 앞에는 마법사와 수련사로 보이는 사람들이 바쁘게 짐을 살피고 있었다.

단태는 손을 올려 관자놀이를 긁으며 마법사, 수련사를 피해 창고 뒤쪽으로 돌아갔다. 마둔수탑의 종자장으로 있었기에 얼굴을 가린 것이다. 이목구비가 달라졌지만 혹시 몰라서였다.

오솔길로 접어들자 앞쪽에서 방망이로 빨랫감을 두드리는 소리와 조심스럽게, 그리고 유쾌하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소문 들었어?”

“무슨 소문?”

“암방거로, 차망로, 서천목로 그리고 화축용로에서 사람이 죽었다잖아.”

“아, 저도 들었어요.”

“시체를 본 사람까지 정신을 놓을 만큼 끔찍한 몰골인가 봐.”

“마법사의 소행이라는 이야기가 있던데요.”

“아마 맞을 거야. 아침에 멀쩡한 사람이 밤에 말라서 비틀어진 상태로 발견됐다니까.”

“그래도 다행이에요. 여긴 안전하니까요.”

“맞아. 여긴 상아별로니까.”

단태는 졸졸 흐르는 물소리, 젖은 옷감을 때리는 방망이 소리 그리고 여자들의 수다를 들으며 오솔길을 걸었고, 곧 빨래터가 나왔다.

단태가 오솔길을 빠져나오자 소리가 뚝 끊겼다. 놀라서 방망이를 놓친 하녀가 몸을 벌떡 일으키자, 나머지 하녀들도 일어섰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공자님?”

“…….”

공자님이라는 호칭에 단태는 당황했다. 사람을 판단하는 데 외모가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혹시 길을 잃으셨어요?”

“그게 아니라, 혹시 여기에 양지란이라는 노예가 있습니까?”

“양지란? 그런 노예는 없어요.”

“아!”

하녀 하나가 손뼉을 쳤다.

단태는 그 하녀 앞으로 다가섰다.

“여기, 있습니까?”

“이제 기억났어요. 지란 언니는 무척 착했어요. 하지만 3년 전 미친 수룡이 여기로 날아와 난동을 부렸을 때 언니는 죽었어요.”

앞이 캄캄해졌다.

“그때, 사람들이 많이 죽었잖아요. 그런데 무슨 일로 지란 언니를 찾아요?”

“……실례하겠습니다.”

단태는 몸을 돌려 오솔길로 달렸다. 그늘진 곳에 이른 후에야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3년 전에, 유천주와 천마룡의 싸움 당시에 엄마가 죽었다니!

오솔길을 벗어나 숲 깊은 곳으로 들어간 단태는 무릎을 꿇고 주먹을 쥔 채 울음을 터트렸다. 마둔수탑에 노예로 팔려갔을 때도, 유천주에게 잡혀 용혈에 끌려갔을 때도 엄마를 만날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아니, 그 희망으로 버텨 낼 수 있었다. 그랬기에 빨래터에서 진실을 듣기 전까지 엄마의 죽음은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엄마가 죽었다니.

엄마가…….

한참 만에 몸을 일으킨 단태는 무덤이라도 찾아가기 위해 다시 빨래터로 향했지만, 하녀들은 빨래를 마치고 돌아간 후였다.

팔뚝이 터졌다. 피부가 찢어지며 바람이 피와 함께 흘러나와 소용돌이쳤다.

단태는 반질반질한 빨래터의 화강암에 앉아 그 붉은 소용돌이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조여드는 고통은 무시했다. 점점 커지는 회오리를 보며 단태는 몸의 피가 다 빨려 나와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상실감은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깊었다.

몽롱한 기분 때문에 시간의 흐름조차 잊었다.

고통스럽지 않아서 의외였다.

이런 식으로 죽음이 찾아오나 싶었다.

그때, 맑은 소리가 위쪽에서 들렸다.

“단태! 단태!”

귀에 익은 목소리.

반사적으로 고개를 든 단태는 순간이나마 슬픔을 잊었다.

은색의 머리, 붉은 몸통 그리고 새하얀 날개.

바로 란조였다.

란조는 팔에 내려앉자마자 피의 회오리를 보더니 노래를 불렀다. 기이한 힘이 깃든 그 노래가 울려 퍼지자 팔뚝의 상처가 저절로 아물었다. 피를 머금고 회전하는 바람의 출구가 막히자, 공중에서 맴돌던 회오리는 힘을 잃었고, 핏방울은 비처럼 떨어져 빨래터를 흐르는 물과 함께 떠내려갔다.

노래를 마친 란조는 상처가 제대로 아물었는지 부리로 건드려서 확인까지 했다. 거기에 팔에 묻은 피를 란조는 자기 몸으로 비벼서 닦아 냈다. 피 묻은 날개를 접은 란조는 단태의 정면으로 날아올랐다.

“위대한 존재가 란조를 내보냈다. 란조는 기다렸다. 단태의 목소리가 들릴 때까지.”

딱딱한, 그래서 감정이 배제된 듯한 목소리에도 단태는 감격했고,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어깨가 들썩거렸다.

“단태, 슬프다. 단태, 슬프다. 하지만 내가 있다. 란조가 있다.”

“……그래.”

눈물, 콧물을 소매로 닦아 낸 단태는 일그러진 얼굴로 란조를 쳐다봤다. 새 한 마리가 이렇게 위로가 될 줄이야.

슬픔은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빨래터를 휘감고 흐르는 물처럼 평생 슬픔은 단태를 휘감고 흐를 것이다. 단태는 그 점을 알았고, 그 슬픔으로부터 벗어날 생각도 없었다. 다만, 슬픔에 짓눌려 해야 할 일을 내팽개치는 바보 같은 짓은 하기 싫었다. 엄마는…… 돌아가셨지만, 아직 할 일은 남아 있다.

설희를 찾아야 한다.

설희마저…… 잃어버린다면, 온몸이 터져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온다고 해도 단태는 내버려 둘 것이다.

단태는 손가락으로 란조의 부리를 긁었다.

“고맙다, 란조.”

“란조도 고맙다. 란조도 고맙다.”

단태는 빨래터를 벗어나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나뭇잎 사이로 파고드는 여름 햇살은 부드러웠다. 엄마가 묻힌 곳을 당장이라도 찾고 싶지만, 설희를 찾은 후에…… 설희와 함께…… 가리라 마음먹었다. 혼자 거기 가면 마음이 무너질지도 몰라서였다.

알은척하는 그 보초에게 일이 잘 마무리되었다고 얼버무린 후에 저택을 빠져나온 단태는 잠시 떨어졌던 란조와 만나 여관으로 향했다. 적어도 오늘 하루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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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을 입힌 거대한 탁자 위에는 황제가 직접 확인하고 결정을 내려야 할 안건만 수백 개나 쌓여 있었다.

“휴우…….”

황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특히 북쪽 맹진국에서 최근에 발견하여 채굴을 시작한 문토 마력석 광산의 규모가 예상외로 크다는 보고서 내용에 황제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문토 광산은 맹진국의 왕 판금우가 그토록 노골적으로 반기를 든 이유였다.

“골치 아프게 됐어.”

“그렇습니다, 폐하.”

석장명은 황제 옆에 서 있었다. 황제 곁을 떠나지 않는 석장명을 ‘늙은 그림자’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지금쯤 판금우는 노천 광산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닌 문토 광산에서 파내는 마력석으로 동맹을 맺고 있겠지?”

황제는 노마법사를 쳐다보았다.

“초담, 비혈, 봉만은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것이옵니다. 허나, 홍국, 허염, 율명, 당중은 판금우의 맹진과 동맹을 맺을 가능성이 높사옵니다.”

“당장은 군대를 움직이기가 어려워. 내부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 채 군대를 움직였다가는…… 오히려 화를 불러들일 수도 있으니까. 무엇보다 난 개구리 같은 군주는 아니야.”

황제는 도안집의 ≪역사≫에 등장하는 유명한 일화를 떠올렸다. 탕무 신국이 멸망한 이유는 전권을 맡아 정벌을 하던 대장군이 군대의 방향을 돌려 오히려 도시를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신국을 지배하던 신왕은 황급히 달아났고, 탕무 신국은 무너지고 말았다. 도안집은 ≪역사≫에서 사태를 파악하지 못해 신국의 마지막 왕이 된 신왕 단무를 ‘개구리’처럼 어리석다고 말했다.

“판금우가 물밑 작업은 진행할지라도 대외적으로, 공개적으로 폐하께 반역의 뜻을 드러낼 수는 없을 것이옵니다. 그러니 당분간은 기다리심이 나을 듯합니다. 그리고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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