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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 그만해.”
황제는 눈치가 빨랐다.
“더 이상 미룰 수 없사옵니다. 태자는 제국의 기둥이옵니다. 하루라도 빨리 황비 마마를 맞아들여 황위를 이을 태자를 낳으셔야 합니다.”
“나도 그게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는 바는 아니야. 문제는 후보랍시고 올라오는 여자들이 모조리 나를 이 자리에서 끌어내리려는 작자들의 여식이라는 점이잖아. 내가 그런 여자를 어떻게 믿어?”
“믿을 필요는 없사옵니다.”
“믿지 말고 이용하라?”
황제는 비아냥거렸다. 워낙 자주 들어서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렇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진지한 석장명.
“황마사가 떠나면 이 넓은 궁에서 내가 믿고 의지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 환관들은 내 눈과 귀를 속이겠지. 대사마는 군권을 좌지우지할 테고, 승상은 인사권을 휘둘러 돈을 받고 관직을 팔겠지. 어사대부는 대사마, 승상, 환관장과 작당을 하여 아무 문제가 없다고 내게 보고할 테지. 그러면 제국은 어떻게 될까?”
“……폐하.”
곧 성인이 되는 황제를 아직 어린 손자처럼 쳐다보는 노마법사.
“난 내 편이 필요해.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내 편.”
“이미 생겼고, 더 많이 생길 것이옵니다.”
석장명은 부드럽고 따뜻하게 말했다.
“명국영이라는 그 친구? 정말 믿어도 될까? 원래 똑똑한 자들이 배신하면 더 피해가 큰 법인데.”
“명국영은 정도를 걷는 사람입니다. 폐하께서 정도를 걸어가신다면 목숨을 다하여 폐하를 도울 것이옵니다.”
“만약 내가 정도에서 벗어난다면?”
“그 사람은 폐하께 두려움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난 내 편이 필요해. 스승이 아니라.”
답답한 황제는 석장명은 물론 환관까지 물리치고 정원으로 나갔다. 곳곳에 황제를 보호하기 위해 배치된 호위병이 있지만 황제는 모른 척하고 꽃잎 사이를 날아다니는 나비를 쳐다봤다.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머무는 나비. 황궁의 벽마저 쉽게 넘나드는 나비의 자유가 부러웠던 황제는 한참이나 그 나비를 따라다녔다.
그때, 하얗고 기다란 손이 그 나비를 덮었다.
흰색과 검은색이 섞인 궁녀 복장의 소녀는 두 손 사이의 틈으로 나비를 들여다보더니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황제가 다가서자, 호위병들이 나타나 그 궁녀의 목에 칼을 들이댔다. 일곱 개의 칼이 목을 겨누자 놀란 궁녀는 손을 들었고, 자유를 되찾은 나비는 너풀너풀 공중으로 날아가 벽 너머로 사라졌다. 그 나비를 쳐다보던 황제가 궁녀 앞으로 걸어가자 호위병들은 좌우로 비껴 섰다. 궁녀의 신분이 확인된 후였다.
“이름이 무엇이냐?”
“……설희라고 하옵니다, 폐하.”
“나비를 왜 잡았지?”
“죽을 죄를 지었사옵니다.”
“이유부터 말하고 죽어도 늦지 않아.”
황제는 자신도 모르게 농담을 걸었다. 소녀의 태도는 신선했다. 판에 박힌 황궁 예절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떻게든 황제의 눈에 들어 출세해 보려는 여자들과는 달랐다.
“……네?”
눈을 동그랗게 뜬 궁녀의 표정에 황제는 웃음을 터트렸다.
“농담이야. 이유나 말해 봐.”
“열흘 전에 둥지에서 떨어진 새끼 새를 주웠는데, 둥지는 비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데려다가 키웠…….
“먹이로 주려고 나비를 잡았다?”
“그렇사옵니다, 폐하.”
“그러면 그 새끼 새를 한번 보자. 안내하거라.”
“……네?”
궁녀는 놀라서 주위를 살폈다.
어느새 다가온 환관이 고개를 끄덕이자, 궁녀는 황제를 자기 방으로 안내했다. 비단 보자기로 둥지를 흉내 내어 만든 곳에 조그만 새 한 마리가 입을 잔뜩 벌리며 소리를 내고 있었다. 배가 고프다 먹을 걸 달라는 뜻이었다.
환관에게 지렁이를 잡아 오라고 명령한 황제는 그 조그만 새를 손바닥 위에 올렸다. 있는 힘껏 부리를 벌리며 날카로운 소리를 내는 그 새를 들여다보니, 복잡한 문제로 얽혔던 머리가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그 새끼 새는 황제보다는 열흘이나 자신을 돌봐 준 궁녀에게로 가려고 했다. 황제는 궁녀에게 새끼를 돌려주었다.
환관이 잡아 온 지렁이를 본 황제는 항상 들고 다니는 피리의 끝부분으로 지렁이를 토막 낸 후에 새끼 새에게 먹였다. 더럽다면서 자기가 하겠다고 나서는 환관을 뿌리친 황제는 지렁이 다섯 마리를 새에게 먹인 후에야 일어섰다.
“설희라고 했지?”
“……그렇사옵니다, 폐하.”
“하루에 한 번 그 새를 데리고 나를 찾아오너라.”
“네? 네, 알겠사옵니다, 폐하.”
궁녀가 고개를 숙이자, 황제는 웃으면서 궁녀의 거처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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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실은 축축했다.
계단을 딛고 내려간 엄포윤은 기다란 철제 탁자에 누워 있는 여자 앞으로 걸어갔다.
팔다리가 묶여 천장만 올려다보며 가쁜 숨을 몰아쉬던 젊은 여자는 엄포윤을 보자마자 벌벌 떨기 시작했다.
“잘 지냈어?”
“……제발, 제발 살려 주세요.”
“그거야 너 하기에 달렸지. 착하게 굴면 빨리 이곳을 벗어날 수 있어. 알았지?”
“살려 주세요.”
“살려 줄 거라니까 그러네.”
손자에게나 보여 줄 법한 인자한 할아버지의 미소에 담긴 공포에 질린 여자는 발버둥을 쳤다. 살아서 이 어둡고 습한 지하실을 빠져나갈 수 없음을 직감한 것이다.
“어허.”
엄포윤은 여자의 가슴에 손을 올리고 마력을 뿜었다.
여자는 축 늘어졌다.
크고 작은 수백 개의 약병이 놓인 선반으로 다가선 엄포윤은 예리한 눈으로 필요한 약재를 골랐다. 머릿속에 앞으로의 실험 계획이 명료하게 떠올랐다. 만약 실험에 성공한다면 한꺼번에 사용 가능한 마력의 양이 두 배, 어쩌면 그 이상으로 늘어날 것이다.
“두 배면 강마, 네 배면…… 용마겠지.”
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살아생전에 닿지 못할 목표로만 여겨졌던 천마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느낌은 달콤하기까지 했다. 이 모든 게 2년 전쯤 골동품 상점에서 발견한 낡은 반지로 인해 시작되었다.
엄포윤은 오른손 중지에 낀 검은 반지를 어루만졌다. 반지의 중앙에 박힌 새까만 보석은 차갑게 반짝거렸다. 수백 개의 낡고 부서진 반지들이 담긴 통 안에서 이 반지를 발견한 순간, 엄포윤은 쿵쿵 뛰는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일생일대의 위대한 발견이라는 직감은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망려환.
후령사탑의 탑주였던 흑사마 고육이 남긴 반지였다!
100여 년 전에 활동했던 흑사마는 당시 세 명이었던 천마 중 하나로 어둠의 왕이라 불리는 위대한 흑마법사였으나 수수께끼처럼 하루아침에 사라진 인물이기도 했다. 후령사탑조차 흑사마의 유해와 유품을 찾으려고 애를 썼지만 실패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망려환은 단순한 반지가 아니었다. 흑사마가 평생 이뤄 낸 마법적 역량이 고스란히 담긴 물건이었다. 고심 끝에 반지의 문을 연 엄포윤은 주인을 기다리는 보물 앞에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마둔수탑의 마법사로서 평생 물의 마법만 익힌 그는 망설임 없이 죽음의 마법을 익히기로 마음을 먹었다. 더 높은, 더 강력한 마법사가 되기 위해서였다.
약병을 다 고른 엄포윤은 반지에 마력을 주입했다.
곧 지하실 한쪽에 검은 문이 생겼다. 으스스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나무문은 그 자체로 살기를 머금어 살아 있는 존재는 통과할 수 없는 지옥의 문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약병을 망토 주머니에 넣은 엄포윤은 탁자 옆으로 걸어갔다. 매듭을 풀고 탁자에 누워 있던 여자를 두 팔로 안은 그는 죽음의 문 앞에 섰다. 수백 번 드나든 문인데도, 두려움으로 가슴이 떨렸다.
망려환을 앞으로 내밀자 문이 저절로 열렸다. 따뜻하고 건조한 공기가 코를 자극하는 약초 특유의 냄새와 섞인 채 검은 문을 통과하여 지하실을 채웠다.
엄포윤은 문 너머의 공간을 볼 수 있었다.
벽과 천장에 박힌 야광석 덕분에 해질녘 같은 분위기의 방이 거기 있었지만, 방 안쪽의 광경은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크기가 다른 수십 개의 갈고리와 꼬챙이, 예리한 칼, 철제 쐐기, 톱 등이 벽에 종류별로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방에는 철제 탁자들이 무수히 놓여 있는데, 기다란 탁자마다 시체가 한 구씩 가슴 안쪽과 내장을 드러낸 채 누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