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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공간을 발견한 순간을 엄포윤은 잊을 수 없었다.
갑자기 나타난 검은 문.
문 너머로 보이는 끔찍한 광경.
하마터면 엄포윤은 비명을 지를 뻔했다.
공포가 가라앉자 엄포윤은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그는 반지가 만들어 낸 검은 문을 자세히 살폈다. 검은 문이 서로 다른 공간을 이어지는 통로라는 사실을 확인한 순간, 그는 활짝 웃었다. 수백 구의 시체를 앞에 두고도 웃을 수 있었다.
천마, 이제 막 천마의 경지에 오른 용천마 륜사 같은 마법사가 아니라, 천마 중에서도 능숙하게 공간이동 마법을 다룰 수 있는 대마법사의 솜씨를 알아본 엄포윤은 은밀히 반지의 내력을 알아봤고, 오래지 않아 망려환이라는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정신을 잃은 여자를 안은 채 검은 문을 통과한 엄포윤은 축 늘어진 여자를 빈 탁자에 내려놓았다. 여자의 가슴이 오르락내리락 뛰고 있었다. 생명이 거기 있었다. 젊음이, 힘이, 무엇보다도 거대한 마력이 거기 있었다.
엄포윤은 손을 뻗어 여자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대의 희생으로 패혈력을 얻을 수 있다면, 그대의 삶도 그리 허망하지는 않겠지.”
이제 막 작업을 시작하려는데, 망토 주머니에 넣어 둔 수정구가 바르르 떨었다.
눈살을 찌푸린 엄포윤은 검은 문 밖으로, 지하실로 와서 수정구를 만졌다.
“무슨 일이냐?”
“부탑주께서 약제실장님을 찾으십니다.”
빨간 목도리를 두른 남자가 수정구 안에 나타났다.
“……그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쯧쯧, 창수 넌 대체 아는 게 뭐냐? 잠시 밖에 나와 일을 보는 중이니, 곧장 탑으로 들어가마.”
연결을 끊은 엄포윤은 아쉬운 표정으로 검은 문 너머 탁자에 누워 있는 여자를 쳐다봤지만, 부탑주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망려환으로 검은 문을 없앤 그는 지하실을 둘러본 후에 밖으로 나갔다.
점등부 하나가 가로등에 기름을 넣고 불을 붙였다. 안개 낀 거리 곳곳을 밝히는 등불은 부드럽게 빛을 퍼트리고 있었다. 어둠에 잠긴 도시는 등불로 인해 아직 잠들지 않았고, 힘이 넘치는 젊은이들은 그 도시를 즐기고 있었다.
선착장에 묶어 놓은 소마선에 올라탄 엄포윤은 부탑주가 왜 자신을 불렀는지 궁금해하면서 배를 탑으로 몰았다. 소마선은 별빛 담은 운하의 수면을 빠르게 갈랐다.
혹시 망려환을 눈치챘을까?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런 시기에 들킨다면 망려환을 빼앗기는 것은 물론 탑에서 제명되어 쫓겨날 것이다. 아니, 결과는 더 처절해서 재판을 받고 교수형을 당하거나 평생 어둡고 더러운 지하 감옥에 갇혀야 할지도 몰랐다.
지금 달아나 버릴까?
망려환만 있다면 얼마든지 강해질 수 있다!
그러나 엄포윤은 소마선의 방향을 바꾸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것은 단순히 강한 힘이 아니었다. 주위 사람들, 특히 마법사들이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그런 삶이었다.
마둔수탑 안으로 들어온 엄포윤은 소마선을 관리자에게 맡기고 승강기 앞에 섰다.
“안녕하세요.”
몸을 돌린 엄포윤은 부탑주의 그림자라고 불리는 마법사 여화를 발견했다. 여화는 얼마 전에 승급한 타마였다.
“……부탑주께서 나를 찾으셨다던데, 그 이유를 알고 있나?”
“아, 그거요? 최근에 도시 서쪽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 때문이에요.”
“그래?”
눈에 띄게 안심하는 엄포윤.
승강기 문이 열리자 엄포윤은 여화가 먼저 타도록 양보했다. 여화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경비대에서 요청이 왔는데, 아무래도 경험이 풍부하고 각종 마법에 익숙한 진마님께 그 일을 맡기시려는 모양이에요.”
“그런 일이라면 마둔수탑이 아니라도 맡을 탑이 있을 텐데, 아닌가?”
“그게, 꽤 까다로운 사건인가 봐요.”
여화는 읽은 보고서를 요약해서 들려주었고, 엄포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사건의 윤곽을 파악하려 애를 썼다.
승강기는 부탑주실이 있는 20층에 도착했다.
여화의 안내를 받아 부탑주실에 들어선 엄포윤은 자신도 모르게 왼손으로 오른손을 덮어 망려환을 가리며 륜사 앞으로 걸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륜사는 앉아서 고개만 살짝 숙였다.
옛날에는 즉시 일어나 다가왔을 텐데. 엄포윤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진리를 떠올렸다.
“보주관으로부터 대강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면 시간을 줄일 수 있겠군요. 제가 직접 나설 수도 있지만, 약제실장도 아시다시피 원정대 문제로 골치가 아파서요. 그러니 실장님께 부탁드리겠습니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이 친구가 옆에서 실장님을 도울 겁니다.”
륜사가 가리킨 곳에 앉아 있던 명국영이 몸을 일으켜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
엄포윤은 못마땅했지만 속내를 숨겼다.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그럼, 그 사건은 두 분께 맡깁니다.”
륜사는 무언의 압박을 가했고, 엄포윤과 명국영은 부탑주실 밖으로 나왔다.
아래로 내려가기 위해 승강기를 기다리던 엄포윤이 입을 열었다.
“원정대 준비로 바쁘지 않나?”
“제가 해야 할 일은 거의 없어서요. 아시다시피 실질적으로 원정대를 움직이는 건 백휘섬선 광오선의 천광탑이니까요.”
명국영은 쾌활했다.
그런 명랑함이 싫은 엄포윤은 헛기침을 했다.
두 사람은 승강기에 올라탔다.
이번에는 명국영이 어색한 침묵을 깨고 물었다.
“우선 시신부터 확인해야겠지요?”
“……아마도.”
엄포윤은 명국영이 불편해서 노골적으로 그 뜻을 전했지만, 명국영은 개의치 않았다. 그에게는 나름의 목적이 있었다.
수도를 떠나 물의 도시로 내려오다가 만난 그 사내를 틈틈이 시간이 나는 대로 찾기 위해 애를 썼는데, 의외로 꼭꼭 숨어 만나기 어려웠다. 기억을 더듬고, 수도에 있던 용태학의 지인들을 동원해서 겨우 그 사람의 이름은 알아낼 수 있었지만, 수도에 비하면 크지 않은 물의 도시에서 그 사람을 찾기가 결코 쉽지 않았다.
무언가 이상해서 사정을 알아봤더니, 철무는 평범한 인물이 아니었다. 믿을 만한 사람의 말에 따르면 철무는 추명이라는 조직의 지도자였다. 추명은 주로 도시 서쪽 지역에서 활동하는 비밀 결사로 하층민을 보호하는 조직이었다.
시장 직속기관이자 도시의 안전을 다루는 방단에서도 철무를 잡기 위해 3년째 애를 쓰고 있었다.
명국영이 이번 사건 조사에 자원한 이유는 바로 철무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하층민이 일곱이나 기이한 방법으로 살해된 사건이니 추명이 개입하지 않을 리 없고, 사건을 깊숙이 파헤치다 보면 철무와 만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명국영은 왜 철무를 만나려고 하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철무를 만나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할 뿐이었다.
*가해자 역할
주인이 바뀌었을 뿐, 집은 그대로였다.
기다란 건물, 여러 개의 낡은 문, 높은 담장까지.
빌린 배에 앉아 노를 저으면서 단태는 아무것도 모른 채 엄마, 설희와 함께 부푼 꿈을 안고 저 집에 도착했던 그날을 떠올렸다. 도양이라는 노예상인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설희와 달아나려 했으나 결국 붙잡혔다. 그 때문에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 아직까지 만나지 못했고, 엄마는…… 3년 전에 돌아가시고 말았다.
밤의 운하는 천천히 노를 저어 돌아다닐 만큼 운치가 있다. 가끔 출몰하는 몰상식한 소마선을 조심한다면, 운하 좌우로 빛을 던지는 가로등을 따라서 배를 몰면 도시의 또 다른 면을 감상할 수 있다. 찬란한 낮으로도 부족한 연인들은 단태처럼 돈을 주고 빌리는 배에 올라타 오붓한 시간을 즐기곤 한다.
단태는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어깨에 앉아 있는 란조가 아니었다면 삶 자체를 놓아 버렸을지도 몰랐다. 목적지도 없이 노를 저었다. 서쪽 방책이 한눈에 들어오는 암방거로에 다다르자 복수하고픈, 박살내고 싶은 충동이 가슴을 채웠다.
아직도 노예 매매소는 불을 밝히고 영업 중이었다.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줄잡아 스무 개 이상의 매매소 앞에 크고 작은 배들이 정박해 있었다. 매매가 이루어진 노예들이 쇠사슬에 묶인 채 커다란 배로 옮겨 타는 장면도 단태는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