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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희를 되찾은 후에 저 매매소들, 절대 가만두지 않으리라.
단태는 뱃머리를 돌렸다.
목적지가 떠올랐다.
엄마를 만난 후에 가려고 했던 곳, 마둔수탑이었다. 비록 드러내 놓고 탑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지만, 마둔수탑에는 반가운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결존계를 통하여 마음을 읽었던 명국영을 본다면 위안이 될까? 스승님이라면 붙잡을 수 있는 무언가를 손에 쥐여 줄 것만 같았다.
한참 만에 도착한 마둔수탑은 여전한 위용을 과시하고 있었다.
배를 선착장에 묶고 광장으로 올라선 단태는 마둔수탑을 올려다보며 분수대로 걸어갔다. 분수대의 물은 그때처럼 졸졸 흐르고 있었다. 탑으로 가서 륜사와 명국영을 만날지, 아니면 여관으로 돌아갈지 고민하느라 단태는 선착장으로 접근하는 중마선을 보지 못했다.
중마선에서 내린 륜사는 거머리처럼 달라붙은 백율운현을 무시하며 앞서 걸었다.
“시장님께서는 이번 원정대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부탑주께서도 그 사실은 알고 있지 않습니까?”
“잘 압니다.”
대답도 건성이었다.
“해서 도시의 안전을 책임지는 방단도 원정대에 참가하려는 겁니다.”
“그건 안 됩니다.”
륜사는 백율운현을 노려보지 않기 위해 점점 커지는 마둔수탑을 쳐다봤다. 백율운현의 뻔뻔한 얼굴을 보면 자신도 모르게 뺨을 후려칠 것만 같았다.
“반대하는 이유가 혹시 그 일 때문입니까?”
“…….”
륜사는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려 백율운현을 찍어 누르듯 노려보았다.
“단태는 도시의 적인 추명의 끄나풀이었습니다. 추명이 희생을 감수하고 단태를 구하려고 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 이야기는 그만합시다.”
능구렁이 같은 시장, 성벽처럼 꽉 막힌 시청 관리들을 상대하느라 녹초가 된 륜사는 이 독사 같은 여자와는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무슨 일인가?”
어둠을 뚫고 나타난 사람은 륜사가 껄끄러워하는 후령사탑의 지존 사령마 만표였다.
만표를 본 백율운현은 재빨리 예를 갖추었다.
물의 도시를 운영하는 11개의 가문 중 하나인 백율가는 후령사탑 마법사를 두 명이나 배출했다는 이유로 이번에 도시를 방문한 사령마와 후령사탑의 마법사들이 머물 숙소를 제공하고 있었다. 인적이 드문 별장이라 사령마는 무척 마음에 들어 했고, 그 덕분에 백율운현은 사령마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백율운현이 선수를 쳤다.
“어르신, 도시의 안전을 책임지는 방단의 단장으로 이번 원정대에 참여하기를 바라는데 용천마께서 한사코 반대하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감히 추측을 하자면 3년 전 제가 도시를 위하여 반역 조직의 첩자를 색출했는데, 그게 용천마와 관계가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저를 개인적으로 반대하는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들은 사령마는 륜사를 쳐다보며 물었다.
“사실인가?”
“몇 마디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자네 의외로 옹졸하군.”
“네?”
“아무리 자네 사람이라고 해도 첩자는 첩자야. 대의를 논하면서 사적인 감정에 휘둘리다니. 그러고도 자네가 천마의 이름에 합당하다고 생각하나?”
사령마가 백율운현 편을 들자, 륜사는 더 이상 참지 않았다. 귀찮더라도 할 말은 해야 한다.
“제가 방단의 참가를 반대하는 건 과거 때문이 아닙니다. 저도 그 아이가 추명의 첩자라는 사실을 잘 압니다. 문제는 유천주의 용혈에 대한 소유권입니다. 방단이 참가하게 되면 시장은 자연스럽게 용혈의 소유권 중 일부를 원할 겁니다. 그럴 경우 제국의 주인이라 불리는 황제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음…….”
사령마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륜사가 핵심을 찌르자 백율운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무리 포장을 해도 진실은 달라지지 않을 터였다.
백율운현은 이미 마음이 기운 사령마를 설득하느라 애를 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사령마가 륜사와 함께 광장을 가로질러 마둔수탑으로 가 버리자 뒷모습을 한동안 노려볼 뿐이었다. 결심이 빠른 그녀는 몸을 돌려 시장이 내준 중마선 쪽으로 걸어갔다.
어떻게든 원정대에 참가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골똘한 나머지 백율운현은 인기척도 없이 쫓아오는 사람을 눈치채지 못했다. 목덜미를 가격당해 시야가 희미해지는 순간, 무척 잘생긴 남자의 흐릿한 얼굴을 봤을 뿐이다.
“너무 쉽잖아.”
단태는 쓰러진 백율운현을 내려다보았다.
이 여자에게 당한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렸다. 백중에게서 빼앗은 가볍고 질긴 줄로 손과 발을 묶은 단태는 기절한 백율운현을 어깨에 둘러메고 선착장으로 향했다. 중마선에 탄 방단의 단원들은 젊은 남자에게 잡혀 가는 단장을 상상도 못한 데다 안개로 사물을 분간하기 어려운 터라, 단태를 보고는 휘파람을 불었다.
노를 저어 마둔수탑이 보이지 않는 좁은 곳으로 간 단태는 백율운현의 상태를 살폈다. 호흡은 안정적이었다.
우연히 엿들은 대화를 통하여 단태는 두 가지 사실을 알아차렸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누구보다도 신뢰했던, 평생 사부님으로 모시리라 생각했던 륜사가 다른 사람도 아닌 백율운현 앞에서 그를 추명의 끄나풀이라고 단언하는 순간, 단태의 마음 한쪽이 무너져 내렸다. 귀를 의심하고 싶지만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도시로 들어선 이후 원정대에 대한 이야기는 질리도록 들었지만, 구체적인 내용을 몰랐던 단태에게 용혈의 소유권 관련 대화는 충격적이었다. 제국을 대표하는 마법사들이 모여서 유천주의 용혈로 원정을 떠난다니, 믿기 어려웠다.
착륙장 서쪽의 외진 곳으로 배를 몬 단태는 간척장 근처에 배를 멈췄다. 어둠이 깔린 간척장은 조용했다. 낮 동안 매질을 당하며 작업에 투입된 노예는 숙소로 돌아가고 간척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주위를 살핀 단태는 신음을 흘리는 백율운현을 업고 간척장 끝으로 향했다.
말뚝과 판자로 위태롭게 서 있는 작업장 끝에 도착한 단태는 단단한 울타리를 골라 백율운현을 거꾸로 매달았다. 피가 머리로 몰리자 백율운현이 정신을 차렸다.
방단의 수장답게 비명을 지르지는 않았다. 침묵 속에 위치를 가늠하는 것 같았다.
단태는 그늘에 서서 백율운현을 살피고 있었다.
“……당현추가 보냈나?”
백율운현이 물었다.
단태는 당현추가 누구인지 기억해 냈다. 당현추는 백율가보다 영향력이 강한 당가의 가주였다. 단태를 죽이려다 륜사에게 당할 뻔했던 당고의 오라버니가 바로 당현추였다.
단태는 바람처럼 다가가 백율운현의 목을 걷어찼다.
신음이 흘러나왔다.
“……죽여라.”
“원정대의 구성, 규모에 대해 말하라.”
“뭐?”
단태는 반대쪽 목을 찼다.
대롱대롱 매달려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돌던 백율운현은 자신을 납치하여 끌고 온 사람이 당가와는 관련이 없음을 확신했고, 그로 인해 더 두려웠다. 당가의 인물이라면 최악의 경우라고 해도 가문 사이의 전쟁을 일으킬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일단, 상대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마음먹은 백율운현은 최대한 천천히 원정대에 대한 정보를 설명했다.
한마디도 빠뜨리지 않고 머리에 새기던 단태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물의 도시로 찾아온 천마들 다수가 참가하는 원정대의 규모는 예상을 뛰어넘었다.
원정대가 도시 지하의 흑야궁을 통해 호수 밑바닥에 자리 잡은 유천주의 용혈로 접근할 거라는 이야기에 단태는 눈을 감았다. 유천주가 무룡이 된 지금, 천마들의 접근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그들이 용혈을 찾아낸다면 유천주, 아니 무룡은 잡혀서 죽고 말 것이다.
막아야 한다.
어떻게?
방법이 없어서 답답했다.
단태는 반쪽짜리 용, 아니, 용마문에 의해 마력의 흐름이 봉쇄된 지금은 몸 튼튼하고 감각이 뛰어난 인간에 불과했다. 용마문은 오감의 능력까지 일부분 제한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천마들이 포진한 원정대를 막을 방법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악!”
백율운현이 비명을 질렀다.
“여, 여기는 간척장이야! 어두워지면 악어가 나온다고! 어서 날 풀어줘! 제발, 살려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