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172화 (172/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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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차린 것이다.

단태는 흥분한 백율운현의 목덜미를 걷어차서 기절시켰다. 백율운현의 말처럼 늪지대 곳곳에 악어 특유의 눈이 반짝거렸지만, 다가오는 녀석은 하나도 없었다. 놈들은 예리한 후각으로 인간이 아닌 기이한 존재를 알아차린 것이다.

백율운현을 업어 배로 돌아온 단태는 노를 저으며 고민에 잠겼다.

사람들의 입장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었다. 용마렵에 참가한 천마들이 원정대를 구성하여 유천주를 죽인다면 물의 도시 유타루체로서는 더 이상 좁은 곳에 갇혀 있을 필요가 없다. 호수 전체를 향해 뻗어 나갈 수 있을 테니까.

게다가 유천주는 3년 전에도 방책을 넘어 큰 피해를 입힌 악룡이 아닌가.

3년 동안 유천주와 함께 용혈에서 지내면서 용옥을 통하여 용족 특유의 삶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단태 역시 원정대를 전적으로 찬성했을지도 몰랐다. 십중팔구 원정대의 목표가 달성되기를 빌었을 것이다.

단태는 혼란스러웠다.

그 순간, 설고가 떠올랐다.

지능을 가진 거미, 특별한 거미로서 살았던 설고는 결국 본능에 충실한 동족을 위해 자신을 버렸다. 그 결과 싸늘한 시체가 되어 용혈 아래쪽의 구덩이에서 썩고 있을 터였다. 설고는 오랫동안 용족과 동족 사이에서 고민하며 갈피를 잡지 못했었다.

“……이제 네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 것 같다.”

한숨을 내쉰 단태는 백율운현을 처리하기 위해 동쪽으로 배를 몰았다.

여관에 두고 온 란조가 날아와 단태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기다리기 지루하다. 기다리기 지루하다.”

“그랬어? 좀 늦었지? 미안해.”

단태는 란조의 은색 머리를 손가락으로 만졌다.

그때, 짧고 날카로운 비명이 멀리서 들렸다. 강화된 청각으로 포착한 그 소리에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선 순간, 죽음을 앞둔 여자의 비명이었다.

란조가 먼저 반응했다. 어깨에서 뛰어올라 단태 위를 맴돈 백관조는 곧장 그 비명이 들린 곳으로 날아갔다.

단태는 배를 가까운 건물 난간에 묶어 두고 건물 벽을 타고 올라 지붕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굴뚝과 경사진 지붕, 지붕 사이의 공간을 거침없이 달리자, 란조가 옆으로 붙었다.

또 다시 그 비명이 들렸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공포에 대한 반응이었다.

가파른 지붕을 딛고 올라가 등마루에 선 단태는 골목길 끝 가로등 아래 쓰러진 여자를 내려다보는 두건을 쓴 남자를 발견했다.

단태는 건물 벽에 설치된 관을 잡고 미끄러지며 땅으로 내려왔다.

“오호, 의외로 빨리 왔는걸.”

단태를 힐끔 쳐다본 사내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금속성 섞인 괴이한 목소리에 단태는 눈살을 찌푸리며 누워 있는 여자 쪽으로 시선을 옮겼는데, 그 순간 몸이 얼어붙었다.

극심한 고통 때문에 뒤틀린 자세로 말라 버린 시체였다.

분명히 여기서 비명이 들렸는데.

“서부 경비대 소속이겠지?”

두건 쓴 사내는 소매를 걷어 올렸다. 손가락은 물론 팔뚝까지 새까만 색이어서 어둠과 분간하기 어려웠다. 팔에서 스멀스멀 어둠이 흘러나왔다. 가로등 불빛이 없었다면 새까만 연기 같은 그 어둠을 알아차릴 수도 없었을 터였다.

단태는 망설이지 않고 돌진했다. 몸이 버텨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도로 다가선 그는 망토를 걸친 사내의 무릎을 걷어찼다.

퍽.

견고한 돌벽을 찬 느낌이지만, 상대는 휘청거렸다.

단태는 뒤로 돌아가는 회전력을 고스란히 이용하여 상대의 목덜미를 손날로 쳤다. 백율운현을 한 방에 보낸 공격이었다. 유천주에게 자주 당한 기술이어서 단태는 이 소름 끼치는 작자를 잡았다고 내심 생각했다.

그러나 손날은 허공을 갈랐다. 손날에 닿은 사내의 몸은…… 연기로 변하며 흩어졌다.

상대는 가로등의 불빛이 닿지 않는 어둠에서 다시 형체를 갖추었다.

할 말을 잃은 단태는 곧 머릿속에 저장된 수많은 마법서를 통하여 상대의 정체를 알아냈다. 죽음의 마법사가 애용하는 ‘흑무투’였다. 본체는 다른 곳에 두고 암현력이라 불리는 어둠의 기운으로 만든 허상을 보여 주는 게 흑무투의 핵심이었다.

“과연 서부 경비대는 만만찮군. 허나, 흑와선까지 막아 낼 수 있을까?”

사내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새까만 연기 같은 어둠이 회오리를 만들었다. 용오름 같은 소용돌이는 빠르게 다가오며 커졌다.

단태는 물러서며 회오리를 관찰했다.

흑와선은 암현력을 회전시켜 생성시킨 회오리로 적을 가두는 강력한 어둠의 마법이지만, 단태는 그 약점을 꿰뚫고 있었다. 회전력을 극대화시킨 풍갑에 비하면 흑와선의 위력은 미풍이나 다를 바 없었다. 풍갑에 휘말린다면 흑와선은 당장 무너지고 말 것이다.

문제는 용마문으로 인해 풍갑을 펼칠 수 없다는 점이었다.

단태는 오히려 앞으로 내달렸다.

눈앞의 소용돌이는 완성된 흑와선이 아니었다. 암현력이 부족해서 비집고 나갈 틈이 있었던 것이다. 검은 안개 같은 암현력이 팔에 닿자 피부가 얼어버릴 듯 차가웠다. 세 번의 급격한 방향 전환을 통하여 흑와선을 통과한 단태는 두건의 그늘에 가린 상대의 눈이 휘둥그레졌음을 직감했다.

단태는 돌진하는 힘을 이용하여 상대의 얼굴에 주먹을 먹였다.

퍽.

코가 주저앉고 얼굴을 구성하는 뼈의 일부가 부러지는 느낌.

그 순간, 뒤로 물러선 사내는 동그랗게 새까만 구체를 땅에 던졌다. 검은 연기가 가로등의 불빛까지 덮어 버렸다.

단태는 움직이지 않고 감각을 곤두세워 접근하는 적을 기다렸으나,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그때, 바늘처럼 예리한 기운이 등을 찔렀다.

아뿔싸!

“윽…….”

사내의 신음이었다.

몸을 돌린 단태는 아무것도 볼 수 없지만 검은 안개로 뒤덮인 앞쪽에서 상대가 무언가와 싸우고 있음을 직감했다. 날갯짓 소리를 내며 어둠을 뚫고 하늘로 솟구쳐 오른 란조의 부리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

“너, 은후성탑의 마법사인가?”

“나는…….

“흥, 재미있군.”

목소리는 급격하게 멀어졌고, 짙은 연기가 바람에 실려 사라지자 가로등 불빛 아래 누워 있는 시체만 보였다. 두건 쓴 놈은 도망치고 없었다.

란조가 어깨에 내려와 앉았다.

단태는 소매로 란조의 부리를 닦았다.

“고맙다, 란조. 너 아니었으면 놈에게 당할 뻔했어.”

“죽음의 마법사, 죽음의 마법사.”

“……맞아.”

용혈의 마간에 쌓인 수많은 마법서를 머릿속에 우겨 넣으면서 접했던 어둠의 마법, 죽음의 마법은 제정신이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마법이었다. 힘을 갖기 위해 인간성마저 스스로 버리는 자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만 생각했는데, 직접 죽음의 마법사와 맞닥뜨리니…… 기분이 이상했다.

세상이 좁아진 느낌이랄까.

단태는 시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패혈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금세 깨달았다. 두건 쓴 그놈은 죽음의 마법사였고, 패혈계를 통과하여 패혈력을 얻거나 강화하려고 산 사람의 목숨을 빼앗은 것이다.

그 순간, 심장이 뜨겁게 타올랐다. 달군 돌멩이를 연이어 심장 안쪽에 밀어 넣는 것만 같았다. 심장에서 그 열기가 퍼져나가 온몸을 태우고 있었다.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한 단태는 시체 옆으로 뒹굴었다.

란조가 날아오르며 노래를 불러 단태를 도우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심장은 조용히 폭발한 화산이었다. 심장이 뿜어낸 혈액은 모든 것을 녹이는 용암이었다.

극심한 고통이 누그러들자, 단태는 열기를 느끼며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더 이상 아프지는 않지만 몸 안쪽의 용암 같은 흐름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어?”

단태는 깜짝 놀랐다.

유천주가 손바닥에 새겨 놓은 마법진, 마력의 출입을 봉쇄하는 용마문이 흐릿해지더니…… 그 어느 때보다 마력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또한 오감까지 예민해져 이곳으로 몰려오는 사람들의 대화는 물론 근처 건물에 숨어서 두려움에 떠는 이들의 심장 박동 소리까지 들렸다.

용마문이 해제되었다!

홍수로 불어난 강물처럼 마력이 몸 안에서 넘실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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