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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기는 빠르게 식었다.
그와 함께 용마문이 위력을 발휘하여 마력을 봉인했고, 감각은 둔해졌다.
열기는 사라졌다.
남은 건, 가슴 안쪽의 증오였다. 사람을 이런 꼴로 만든 그놈을 향한 강렬한 증오는 오히려 커졌다.
그때, 인기척이 느껴졌다.
“살인마다!”
모서리를 돈 경비대원이 단태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곧 창과 칼, 석궁을 든 경비대원들이 골목의 입구를 막았다.
설명해 봐야 소용이 없는 분위기. 게다가 드러내 놓고 신분을 밝힐 수 없기에 단태는 건물의 벽을 타고 지붕으로 올라갔다. 화살이 날아와 벽에 탁탁 박혔다.
화살을 장전하려는 경비대원들은 란조의 발톱에 긁혀 시기를 놓쳤다.
단태는 휘파람을 불며 지붕 너머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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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마선을 타고 서쪽 지역 중 하나인 암방거로로 들어설 때까지 명국영과 엄포윤은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를 불편해한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서부 경비대 지소인 암방거소 앞에 선 엄포윤은 따라온 명국영을 향해 몸을 돌렸다.
“조사는 내게 맡기게.”
“알겠습니다. 다만, 사소한 조언은 해도 되겠지요?”
“……마음대로 하게.”
엄포윤은 혀를 차며 암방거로 안으로 들어섰다.
엄포윤이 입은 망토에 새겨진 마둔수탑의 문양을 본 경비대원들은 천천히 일어섰지만 환영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마법이 사용된 살인 사건이라 마법사의 개입은 필연적이지만, 이런 경우에도 경비대는 스스로의 능력만으로 사건을 해결하고 싶어 했다. 경비대, 용병단 등 몸을 쓰는 사람들은 마법사를 체질적으로 싫어했다.
경비대원이 안쪽으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바싹 말라 버린 세 구의 시체를 본 엄포윤, 명국영은 할 말을 잃었다. 보고서를 통해 접한 내용과는 차원이 달랐다.
“여기 이 시체는 죽은 지 이틀이 지난 겁니다. 나머지도 길어야 보름입니다.”
경비대원의 설명이었다.
엄포윤은 주먹을 꽉 쥐며 신음을 흘렸다. 보자마자 시체의 상태를 알아차렸다. 어찌 모를 수 있을까? 망려환으로 불러낸 검은 문을 통과하면 눈앞의 시체와 같은 시체들이 세 구나 있다. 패혈력을 얻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었다.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했을까?
엄포윤은 즉시 물의 도시에 들어와 있는 후령사탑의 마법사를 떠올렸다. 사령마 만표를 위시하여 적어도 열 명의 수준급 마법사들이 원정대에 참여하기 위해 조용한 별장에 머물고 있었다. 그들 중 하나가 패혈력을 위해서 이런 살인을 저질렀을까?
“패혈계로군요.”
명국영의 말에 엄포윤은 깜짝 놀랐다.
“……그런가?”
“사혈지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사혈지? 거길 가 봤다는 건가?”
제국의 북동쪽은 죽음의 땅으로 유명한 사혈지였다. 풀 한 포기도 살기 힘든 사혈지에는 이미 죽었는데도 돌아다니는 시체들이 많았다. 호기심에, 혹은 사혈지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는 보물을 위해 용기를 내어 사혈지로 들어선 많은 마법사, 보물사냥꾼, 용병 들의 말로였다.
어떤 용병은 한몫 잡으려고 사혈지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가 수십 년 전에 죽은 아버지와 맞닥뜨렸고, 그 아버지에 의해 삶을 마감했다. 물론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죽음의 땅을 떠돌기 시작했다. 또 다른 희생자를 기다리면서.
“깊이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명국영은 시체를 살피느라 엄포윤이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채지 못했다.
“패혈계가 무엇입니까?”
익숙한 목소리에 명국영은 고개를 들어 경비대원 뒤에 서 있는 건장한 사내를 쳐다봤다.
그 사내였다!
“이 사람은 죽은 여자의 사촌 오빠입니다.”
경비대원이 설명했다.
명국영은 철무를 보며 패혈계가 무엇인지 알려 주었다.
죽음의 마법사는 패혈력, 흡사력, 암현력을 추구한다. 셋 다 죽음과 관련이 깊은데, 특히 패혈력은 죽음 그 자체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패혈력을 얻으려면 필연적으로 시체를 다루어야 하고, 시체로부터 죽음 특유의 기운을 흡수해야 하지만, 단계가 높아지면 살아 있는 사람으로부터 생명력을 빨아들여야 한다.
“그렇다면 후령사탑의 마법사 짓입니까?”
철무는 명국영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죽음의 마법사 전부가 후령사탑의 마법사는 아니니까요.”
명국영은 엄포윤에게 자리를 비켜 준 다음 암방거소 밖으로 나왔다. 밤바람이 시체 냄새를 걷어 갔다.
철무가 다가왔다.
“오랜만이오, 명 선생.”
“그렇군요.”
빙긋 웃는 명국영.
“……혹시 나를 만나러 오셨소?”
“추명의 지도자를 이리 쉽게 만나다니, 운이 좋았습니다.”
“…….”
눈빛이 달라진 철무는 주위를 살폈다.
“저 혼자 당신을 만나러 온 겁니다.”
“이유는?”
짧고 딱딱한 질문.
“조금 전까지는 그 이유를 몰랐는데, 지금은 알 것 같습니다. 믿기 어렵겠지만, 아무래도 대화의 상대가 필요했던 모양입니다.”
“믿기 어렵겠지만, 그쪽의 마음을 알 것 같소. 실은 나도 그쪽 생각을 했으니 말이오.”
철무는 속내를 털어놓았다. 연쇄살인사건으로 추명의 혼란은 가중되었다. 추명의 현재와 미래를 놓고 속 시원히 이야기를 나눌 사람은 눈을 씻어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혼자 술잔을 기울이는 때가 잦았고, 조금씩 사람들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잠시 걸읍시다.”
명국영은 가로등 대신 횃불이 타오르는 거리를 걷기 시작했고, 철무가 옆으로 따라붙었다.
“마둔수탑 부탑주이자 그 대단한 용천마의 친구인데 왜 대화 상대가 없다는 겁니까?”
“하층민을 보호할 뿐 아니라 도시의 서쪽 지역을 장악한 추명의 지도자인데 왜 대화 상대가 없다는 거죠?”
두 사람은 잠시 서로를 쳐다보다 쿡쿡 웃음을 터트렸다.
운하를 가로지르는 다리 한가운데 난간에 선 두 사람은 밤하늘이 담긴 물을 내려다보았다.
“아직 민중을 신뢰합니까?”
명국영이 물었다.
“……믿음이 약해지고 있습니다. 명 선생께서는 시대를 바꿀 만한 영웅을 찾으셨습니까?”
“기다리는 중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어색하고 불편한 적막은 아니었다. 더 깊이 생각하도록 북돋아 주는 기분 좋은 고요였다.
철무가 입을 열어 추명의 현재 상황을 설명했다. 지도자로서 추명 내부의 사정을 알리는 건,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에도 그는 명국영에게 진실을 털어놓았다. 조언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설명을 마친 철무가 질문을 던졌다.
“명 선생이 지금의 제 위치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야겠지요.”
명국영은 웃으며 말했다.
“달아날 수 없다면요?”
철무의 눈에 깃든 절박함을 알아차린 명국영은 웃음을 지우고 고민에 잠겼다.
“극약 처방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곪은 살은 도려내야 하고, 병이 스며든 뼈는 긁어내야 합니다.”
“…….”
“철 선생도 방법은 아실 겁니다. 다만 선택하기 쉽지 않을 뿐이지요.”
“그 방법뿐일까요?”
“조직이 끝장나지 않기를 바란다면 그 방법뿐입니다.”
“……역시 그렇군요.”
철무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명국영 차례였다.
명국영은 점점 뜻하는 바가 달라지는 륜사와의 관계를 간략하게 설명했다. 명국영이 보기에 륜사는 시야가 좁았다. 마둔수탑, 그리고 마법사들만이 륜사에게 의미 있는 세계였다. 명국영이 기회를 봐서 더 넓은 세상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면 륜사는 갖가지 핑계를 대어 다음에 듣겠다고 말하곤 했다.
“답은 간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