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174화 (174/293)

<-- 174 회: 5-9 -->

철무가 말했다.

“그렇습니까?”

“추명으로 오십시오. 명 선생이 뜻을 펼치기엔 마둔수탑보다는 추명이 더 나을 겁니다.”

“……제 뜻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

“보다 나은 세상이 아닙니까?”

“그런 표현은 추상적입니다. 폭군도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잔인한 통치를 일삼으니까요.”

“명 선생의 뜻은 무엇입니까?”

“지혜로운 자가 다스리는 세상입니다.”

“영웅이 다스리는 세상이군요.”

“비슷합니다.”

“위험한 이상론이라는 점, 명 선생이라면 잘 알 텐데요.”

“위험하다고 해서 포기할 수는 없으니까요.”

찾아온 침묵은 더 이상 자연스럽지 않았다. 두 사람은 대화를 통하여 서로가 어떤 사고방식을 지녔는지 파악했다. 둘 다 하나의 뜻을 품을 수 없음을 깨달았고, 그로 인해 침묵은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서로를 배척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새까맣게 반짝거리는 운하를 내려다봤다.

“그 녀석, 죽지 않았을 겁니다.”

철무가 말을 꺼냈다.

“그 녀석이라니요?”

“명 선생께서 한동안 가르쳤던 단태라는 녀석 말입니다.”

“그, 그걸 어떻게……?”

명국영은 깜짝 놀랐다.

“알고 있었습니까?”

철무도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3년 전, 호수로 날아가는 유천주의 발톱 사이로 단태를 봤습니다.”

“저도 그 광경을 봤습니다. 그 때문에 단태에 대해 조사를 해 봤고, 놀라운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노예였던 단태를 자유인으로 해방시킨 게 바로 명 선생이더군요. 혹시 명 선생이 기다린다는 영웅이 그 녀석입니까?”

“맞습니다.”

명국영은 차분하게, 담담한 어조로 답했다.

그 태도를 철무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정말 그 녀석이 시대를 바꿀 만한 영웅이라고 생각합니까?”

“단태가 시대를 바꿀지, 아닐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본 사람들 중에 그 아이만한 그릇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 정도입니까?”

철무는 단태에게서 엉뚱함을 찾아낼 수 있었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다.

“하늘이 기회를 준다면, 그 아이는 세상을 바꿀 겁니다.”

과격한 주장이 아니라, 평온한 확신이었다.

그때, 건물 그림자에 숨어 있던 사내가 달려와 철무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또 희생자가 나온 모양입니다.”

눈빛이 달라진 철무는 이미 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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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운장의 새벽은 고요했다.

사령마 만표는 3층 창가에 서서 우거진 숲을 내려다보았다. 지저귀는 새소리가 무척 영롱했다. 밤새 잠 한숨 자지 못했음에도 그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뜨거운 차를 마시며 새벽 특유의 분위기를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머릿속은 어젯밤의 일로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물의 도시 유타루체에 도착한 그날, 만표는 공들여 ‘사유위룡진’을 설치했다. 용의 접근을 알려 주는 마법 사유위룡을 담는 마법진을 돌바닥에 그리고 활성화시키는 데 꼬박 하루가 걸렸다. 후령사탑을 위시하여 죽음, 어둠에 몸을 담은 마법사들에게 용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인간이 전쟁을 벌이든, 땅따먹기를 하든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면 별 관심이 없는 용도 유독 죽음의 마법사만은 보는 족족 죽였다. 눈에 띄지 않으면 모르되 일단 보였다 싶으면 용은 집요할 정도로 따라붙어 죽음의 마법사를 없앴다.

이유는 알 수가 없었다.

갑자기 사라져 아직도 죽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흑사마 고육은 그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직접 용을 찾아가기도 했다. 결과는 최악에 가까웠다. 말을 걸어볼 시간조차 주지 않고 용이 공격했던 것이다. 고육이 살아난 건 기적이었다.

사유위룡은 용족과의 관계 때문에 생겨난 마법이었다. 죽음의 마법사는 주로 무리를 이루어 이동하는데, 용이 출몰하는 지역에 들어서면 반드시 사유위룡진을 설치하였다. 생존을 위한 예방책이었다. 용족을 덮친 저주에도 불구하고 후령사탑은 여전히 사유위룡진의 발동을 규율로 삼고 있었다.

“음…….”

좋아하는 차 맛도 느끼지 못할 만큼 긴 한숨이었다.

어젯밤, 사유위룡진이 반응했다.

사유위룡진은 구조와 투입된 마력에 따라 달라지지만, 건물 지하에 그려진 마법진은 대략 반경 200온(4킬로미터) 범위에 들어온 용을 감지할 수 있다. 공간이동 마법이 아니라면 용은 반지름 200온의 원형의 가장자리에서 감지된다. 공간이동 마법으로 단번에 이동했다면, 어디서 왔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는지 방향은 알 수가 있다.

계산을 통하여 위치를 알아보니, 유타루체 서쪽 방책 안쪽이었다. 용이…… 유천주가…… 도시로 들어와 있다는 뜻이다.

더 놀라운 건, 용이 사유위룡의 감지력을 무력화시켰다는 사실이었다. 사유위룡진의 결과는 용이 특유의 기운, 즉 용투기를 감출 수 있음을 의미했다. 유천주가 용투기를 감춘 채 이곳 파운장으로 숨어들었다고 해도 사유위룡진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을 터였다.

“부르셨습니까?”

단정한 사내가 창가로 다가왔다.

“너는 오늘 아이들을 이끌고 탑으로 돌아가거라.”

“……사유위룡진 때문입니까?”

혈마수 율각이 물었다.

“수백 년 동안 우리를 지켜 주던 사유위룡이 수명을 다했구나. 그러니 넌 아이들을 데리고 탑으로 돌아가서 즉시 용의 접근을 알아내는 마법의 개발에 착수하거라.”

“저는 남고 싶습니다.”

“내가 걱정되느냐?”

“……죄송합니다.”

율각은 고개를 숙였다. 등골이 오싹했다. 하마터면 이 자리에서 죽을 뻔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후령사탑에 단 일곱 명뿐인 용마의 경지에 올랐다고 해도, 천마 사령마 앞에서는 당장이라도 죽일 수 있는 허약한 마법사에 불과했다.

“후령사탑의 명예는 내가 지킨다.”

“알겠습니다. 준비하겠습니다.”

율각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가자, 만표는 시선을 돌려 아래의 숲을 보았다.

낯선 감정이 가슴을 건드렸다.

두려움이었다.

평생 두려움의 대상으로 군림해온 만표는 씁쓸하게 웃었다. 아무리 강한 인간이라고 해도 용 앞에서는 밟아 죽일 수 있는 개미 한 마리와 다를 바 없는 게 현실이었다. 용족조차 어쩌지 못한 저주로 인해 압도적으로 강한 존재의 파멸이 코앞에 다가온 것은 인간에게, 특히 죽음의 마법사에게 행운이었다.

유천주는 왜 도시로 들어왔을까?

그것도 몰래?

유천주는 지금쯤 원정대 소식을 알고 있을 것이다. 개미 새끼 같은 인간들이 힘을 합쳐 감히 용혈을 털 생각을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유천주는 극도로 분노할 것이다.

“원정대는…… 실패야.”

원정대를 가능케 한 전제조건은 바로 저주로 인해 허약해진 유천주라는 가정이었다. 그러나 유천주가 용투기를 숨기거나 조절할 수 있게 되었으니, 더 이상 가정은 유효하지 않다. 게다가 원정대의 계획을 유천주가 알았다면, 지하로 내려가는 길은…… 스스로 무덤 안으로 들어가는, 참혹한 재앙이 되고 말 터였다.

만표는 빙긋 웃었다.

이 사실을 원정대에 참가하는 다른 탑의 마법사들에게 알릴 생각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기회라고 생각했다. 우후죽순 성장하는 마탑의 전력을 약화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이번 원정이 실패로 돌아가면, 힘을 고스란히 보존한 후령사탑은 팔마탑 중에서도 도드라진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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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룡은 입을 꽉 다물고 있었다.

“뱉어.”

거대한 머리를 좌우로 흔드는 무룡에게서 고집이 느껴졌다.

“훨씬 맛있는 거 줄 테니까, 뱉어.”

무룡은 커다란 눈으로 뱉고 싶지 않다는 뜻을 표현했으나, 단태는 팔짱을 끼고 단호하게 명령했다.

“어서 뱉어내!”

결국 무룡은 입을 벌리고 호숫가에서 삼켰던 백율운현을 토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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