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175화 (175/293)

<-- 175 회: 5-10 -->

끈적끈적한 이물질로 범벅이 된 백율운현 옆으로 다가선 단태는 맥박을 살폈다. 다행히 죽지는 않았다. 과거를 떠올리면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지만, 그렇다고 그 일로 백율운현을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백율운현에게 인간적인, 정당한 대접을 해 줄 마음도 없었다. 받은 대로, 이자까지 듬뿍 쳐서 갚아 줄 생각이었다.

백율운현을 용혈로 데리고 올 유일한 방법은 무룡의 배 속이었는데, 결과적으로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대혈에 두면 무룡이 심심풀이 간식으로 먹어 치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단태는 백율운현을 업고 주혈로 데려갔다. 기다란 의자에 백율운현을 눕힌 그는 옷을 갈아입었다. 검, 방패, 갑옷, 무술서 따위가 보관된 방 무간에는 낡았지만 여전히 질긴 옷이 수십 벌이나 있었다.

마간으로 간 단태는 마법 물품이 보관된 곳을 뒤졌다.

“여기 어디에 있을 텐데.”

마법서가 대부분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지만, 목걸이와 반지, 팔찌 그리고 지팡이 등 마법이 걸린 물건도 꽤 많았다.

“찾았다!”

마법사라면 누구나 휘둥그레질 보물 더미에서 단태가 찾아낸 것은 한 쌍의 낡은 팔찌였다. 푸른색과 검은색의 팔찌는 형태가 동일했다.

사악하게 웃은 단태는 푸른색 팔찌를 손목에 찼다. 평범한 팔찌는 피부에 붙었고, 곧 푸르스름한 뿌리를 피부 안쪽으로 내렸다. 그 과정을 지켜본 단태는 검은색 팔찌를 들고 주혈로 돌아갔다.

백율운현은 아직 의식이 없었다.

“고생은 이제부터 시작이야.”

백율운현을 내려다본 단태는 검은색 팔찌를 채웠다. 그 팔찌도 백율운현의 손목에 찰싹 달라붙었다.

시험해 볼 요량으로 청색 팔찌를 찬 손목을 흔들자, 백율운현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비명까지 지르면서.

단태는 의자를 가져와 백율운현 앞에 놓고 앉았다.

고통이 줄어들자 백율운현은 숨을 헐떡이면서도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눈앞의 남자가 누구인지 알아내기 위해 주위를 훑었다. 한참 만에 그녀가 말했다.

“……넌 누구지?”

“피해자.”

“뭐?”

“어제까지는 피해자였는데, 오늘부터는 가해자 역할 좀 해 보려고.”

“무슨 말이야?”

“내 이름은 단태. 3년 전, 죄도 없이 방단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던 마둔수탑의 종자. 키가 커지고 얼굴이 좀 달라졌다고 해도 3년 밖에 안 지났는데, 아직도 기억이 나지 않아?”

“…….”

백율운현의 눈이 커졌다. 불신이 어린 눈은 천천히 이성적인 평소 상태로 돌아왔다.

“자, 내가 누군지 알았으니 이젠 여기가 어딘지 궁금하겠지? 이곳이 어디일까?”

단태는 목소리에 장난기를 섞었다.

“지금쯤 날 찾기 위해 도시가 뒤집어졌을 거다. 당장 날 풀어 준다면 처벌의 강도를 줄여 줄 수도 있다.”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모양이야.”

단태는 손목을 흔들었다.

백율운현은 긴 의자에서 떨어져 바닥에서 경련을 일으켰다. 고통이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방단이 도시를 이 잡듯 뒤져도 당신을 찾아낼 수는 없어. 여긴 유타루체가 아니거든.”

단태는 반쯤 정신이 나간 백율운현을 두고 주혈을 나와 용옥간으로 향했다. 거기 있는 용옥 때문이었다.

아무도 없는,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는 용옥간은 적막했다. 설고가 그리웠다. 그 끔찍한 이목구비로도 미소를 지을 줄 아는 설고가 옆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단태는 길게 숨을 내쉬고 커다란 용옥을 손에 쥐었다. 용마문의 봉쇄에도 끌어 올릴 수 있는 소량의 마력을 주입하자 용옥에서 연기가 흘러나와 단태를 에워쌌다.

섬광이 터진 순간, 단태는 화산의 분화구 가장자리에 서 있었다. 방염산 정상이었다.

무열군주가 다가오자 단태는 질문을 던졌다. 갑자기 심장이 뜨거워지고 뜨거운 기운이 몸 전체로 퍼져 나간 현상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였다.

“각성이라네.”

“……각성이라니요?”

“용은 알에서 깨어나 잠룡이 되어 명룡에게서 가르침을 받지. 명룡의 허락이 떨어지면 초룡이 되는데, 자네도 알다시피 초룡은 독립하여 자신만의 용혈을 가질 수 있네. 그 위로 하룡, 중룡, 상룡, 마룡 그리고 신룡의 단계가 있지만, 모든 용이 그 신룡의 경지까지 오르는 건 아닐세. 이유는 모르지만, 각성을 경험한 용만이 용오군의 경지인 마룡의 단계를 넘어설 수 있네. 그렇다고 각성을 경험한 모든 용이 신룡이 되는 건 아닐세.”

“그렇다면 좋은 현상이군요.”

단태는 뭐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싶었다.

“어쩌면 자네가 오랫동안 용족을 괴롭혀 온 저주를 끊을지도 모르겠군.”

그렇게 말한 적서룡 무열군주는 각성이 무엇인지 자세히 알려 주었다.

무열군주의 설명에 따르면, 각성은 용족에서도 드문 경험이었다. 수백 년을 살아도 각성과 상관없는 용이 대부분이었고, 각성하기 위해 애를 쓰는 용도 거의 없었다.

일단 각성을 하면 상황은 달라졌다. 오랜 수명, 압도적인 힘, 깊은 지혜로 인해 무엇이든지 서두르지 않고 여유롭게 결정하고 행동하던 용도 각성을 경험한 이후에는 하나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인간처럼, 아니 그보다 열정적으로 의지를 발휘했다.

“각성은 일종의 사로잡힘이네. 용족에겐 익숙지 않은 상태지만, 굳이 설명을 한다면 세상에 태어난 이유, 목적을 알게 되었다고 할 수 있지. 그러니 얼마나 맹렬하게 그 목표를 이루려 하겠는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자네 속에 있는 의지의 불꽃이 자네를 이끌 걸세.”

용옥 밖으로 나온 단태는 벽에 등을 대고 앉아 생각에 잠겼다.

무엇에 사로잡혔을까?

왜 그 기괴한 시체를 봤을 때, 각성이 찾아왔을까?

아직은 손에 잡히는 게 없었다. 답답하지만 거기에 집중할 필요도, 여유도 없다.

단태는 용옥간 밖으로 나와 주혈로 걸어갔다. 손을 올려 주혈의 문을 여는 순간, 백율운현이 달려들었다. 놀라기는커녕 속으로 웃으며 뒤로 두 걸음 물러선 단태에게 백율운현의 공격은…… 장난처럼 보였다.

너무 느렸다.

유천주가 여기 있다면 정신 차리라고 팔 하나쯤은 부러뜨렸을 것이다.

살짝살짝 몸을 움직여 공격을 피한 단태는 바람처럼 다가가 백율운현의 명치에 주먹을 박았다.

백율운현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혀를 찬 단태는 백율운현의 발을 잡고 안쪽으로 끌고 가서 긴 의자에 눕혔다.

잠시 후, 백율운현이 정신을 차렸다.

“주, 죽여 버리겠어!”

악을 쓰는 백율운현.

“맘대로 해. 그보다, 여기가 어딜까?”

“……몰라.”

“걸을 수 있지? 따라와.”

단태는 몸을 일으켜 먼저 입구로 향했고, 백율운현은 비틀거리며 뒤따랐다.

주혈 밖으로 나온 단태는 대혈로 올라갔다. 일부러 뒤를  보지 않았다. 비교적 가파른 통로를 낑낑대며 올라오는 백율운현의 모습을 통해 쾌감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였다. 가해자 역할은 나쁘지 않지만, 지나친 심취는 정신을 망가뜨릴 것이다.

대혈은 비어 있었다. 단태에게 먹잇감을 빼앗긴 무룡은 호수로 사냥을 나간 것이다.

거대한 공간으로 나온 백율운현은 헐떡거리며 주변을 살폈지만 이곳이 어디인지 여전히 알 수 없었다.

그때, 대혈 한쪽에 자리 잡은 연못이 출렁이더니 무룡이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머리, 야성이 담긴 눈, 벌어진 입 사이로 보이는 날카로운 이빨, 시청마저 박살 낸 몸통과 꼬리까지.

백율운현은 입을 벌렸다. 아니, 벌어졌다.

저 용, 본 적이 있다.

3년 전! 유타루체를 재앙으로 몰아넣었던 그 용!

유천주였다!

그, 그렇다면 이곳은…… 용혈?

백율운현은 정신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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