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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으로 급히 가야겠군. 고맙네, 친구.”
륜사는 명국영의 어깨를 꽉 잡은 후 밖으로 나갔다.
칠판 앞으로 걸어가던 명국영은 다시 방으로 들어온 륜사 쪽으로 몸을 돌렸다.
“전할 소식을 깜빡했어. 오늘 오후, 사령마 만표를 제외한 후령사탑의 마법사들이 도시를 떠났네. 탑으로 돌아가는 모양이야.”
“……그게 정말인가?”
“갑자기 결정된 모양인데, 이유는 알 수 없네. 그럼, 난 가 보겠네.”
륜사는 문을 닫고 나갔다.
명국영은 칠판 앞에 섰다.
후령사탑의 마법사들은 이번 연쇄살인사건의 유력한 용의자였다. 결정적인 증거는 없지만, 후령사탑의 마법사들이 도시로 온 후로 살인이 시작되었다는 점만 고려해도 의심을 피하기는 어려웠다. 조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자 두려움을 느껴서 도시를 벗어났을까?
그럴 가능성은 없다.
직접 겪어 본 죽음의 마법사가 얼마나 자부심이 강한지 명국영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또 다른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왜 사령마 만표는 남았을까?
무엇이 사령마 만표만 도시에 남게 만들었을까?
둘 중 하나였다.
후령사탑에 문제가 생겨 급히 탑으로 돌아가야 했거나, 사령마 만표 외에 물의 도시에 머물던 후령사탑의 마법사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위험을 감지했거나.
확인해 보면 된다.
명국영은 마영국을 찾아가 수정구를 빌렸다. 부탑주 륜사의 친구라는 점이 알려져서 수정구 사용은 쉬웠다. 명국영은 평소 친분을 쌓은 마법사, 학자와 연결을 시도했고, 최근 후령사탑에 급격한 변화가 있는지 알아봤다. 후령사탑은 팔마탑의 일원이어서 탑 내부의 소식은 비교적 빠르게 수도 곳곳으로 전해졌다. 어느 누구도 후령사탑의 분위기는 여전하다고 답했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명국영은 전자를 배제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이유만 남는다.
대체 무엇이 사령마 만표로 하여금 후령사탑에 소속된 마법사들을 탑으로 돌려보내게 만들었을까?
답은 즉시 튀어나왔다.
유천주였다.
죽음의 마법사와 용의 관계를 명국영은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사혈지 원정대에 속한 그 마법사는 용을 두려워했다.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이상 용이 인간을 먼저 공격하는 일은 상당히 드물기에 그 이유를 물었더니, 죽음의 마법사는 이렇게 답했다.
-우리는 용의 눈에 띄는 날이 죽는 날이야.
유천주의 움직임을 사령마 만표가 미리 알아차린 것이다. 그래서 아끼는 후배 마법사들을 도시 밖으로, 탑으로 돌려보낸 것이다.
명국영은 창가로 달려가 바깥을 살폈다. 혹시 유천주가 거대한 몸을 이끌고 방책을 넘어 날아오고 있지는 않을까? 3년 전의 그 악몽 같은 재앙을 명국영도 잊을 수 없었다.
다행히 도시는 평온에 잠겨 있었다.
방에서 왔다 갔다 맴돌며 생각에 잠긴 명국영은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유천주에 대한 정보는 그에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바로 단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사령마를 만나야 해.”
말로 내뱉자, 소름이 돋았다.
괴팍하기 짝이 없는 죽음의 마법사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용만큼이나 위험한 존재였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얼마든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마법사를 만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
명국영은 놓친 부분이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눈으로 칠판을 훑었다.
*생태계
백율운현은 허연 뼈로 만들어진 우리 안으로 들어갔다.
새까만 똥 한 무더기를 보자 한숨이 터져 나왔다. 태어난 순간부터 특별한 운명이 정해져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살아왔다. 백율가문의 미래를 책임지는 인재로 인정받았고, 그녀 스스로도 자부심을 가지고 운명에 걸맞은 역량을 가지고자 죽을힘을 다했다. 그런 그녀에게 청소는, 특히 화장실 청소는 다른 세계, 하인과 하녀 그리고 노예들에게나 어울리는 세계의 작업이었다.
“……난, 도저히 할 수 없어.”
백율운현은 고개를 돌려 우리 밖에서 붉은 사슴 열각수의 목덜미를 어루만지는 단태를 쳐다봤다.
“똥밭에서 구르고 싶다면 어쩔 수 없지.”
단태는 팔찌를 가리켰다.
“…….”
백율운현은 수십 번, 아니 체감적으로는 수만 번 당한 끔찍한 경험을 떠올리고는 가져간 나무통에 똥을 담았다. 하얗고 기다란 두 손으로.
똥의 감촉은…… 정말이지 상상을 초월했다. 끈적끈적하고, 온기가 느껴져 더 고약한 냄새가 나는 이물질이었다.
한 시간, 아니 두 시간 만에 하나의 우리를 깨끗이 치웠다.
백율운현이 청소를 마치고 나오자 단태는 열각수를 우리에 넣었다. 오랜만에 우리가 깨끗해지자 열각수는 시원하게 불을 뿜었다. 단태는 이미 피했지만 화염의 범위 안에 있던 백율운현의 머리카락에 불이 붙었다. 백율운현은 바닥을 뒹굴었고, 옆에 있던 나무통이 쓰러지는 바람에 몸은 물론 얼굴까지 거기 담긴 똥으로 범벅이 되고 말았다.
“난 아무것도 안 했어.”
단태는 얄밉게 웃었다.
단태를 미워할 여유는 없었다. 이 방에만 수백 개의 우리가 있고, 우리마다 듣지도 보지도 못한 동물이 싸질러 놓은 배설물로 가득했다. 모두 백율운현의 몫이었다.
“차라리 날 죽여!”
백율운현이 소리쳤다.
“정말 죽고 싶어?”
단태가 진지해지자 백율운현은 바닥에 흘린 똥을 나무통에 담았다. 이번에도 두 손으로.
거기 있는 우리를 하루 만에 치울 수는 없었다. 또한 다른 방에도 해야 할 일로 넘쳐 났다. 단태는 백율운현이 감당할 만한 일감을 주었고, 백율운현은 처음으로 하녀처럼, 노예처럼 주어진 일을 마칠 수밖에 없었다.
하루의 작업이 끝나자 백율운현은 주혈 한쪽에 솟아나는 샘물로 몸을 씻었다. 잠시나마 악취에서 벗어나니 살 것 같았다. 샘 곁에 앉은 그녀는 충동적으로 눈물 나도록 뺨을 후려쳤지만 현실은 그대로였다. 꿈이 아니었다. 방단의 수장으로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다가 하루아침에 노예의 신세로 전락하니, 눈물이 핑 돌았다.
단태가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직접 일을 해 보니 기분이 어때?”
“개새끼.”
분이 풀리지 않았다.
“아직 힘이 남았나 보네.”
활짝 웃는 단태.
“왜 날 여기로 끌고 왔지?”
“말했잖아. 난 가해자 역할이고, 넌 피해자……. 그러니까 고문당하는 역할이라고.”
“…….”
백율운현의 눈에 두려움이 어렸다.
“자, 아까 하다 만 이야기를 계속해야지. 11인위원회에 대해 말해 봐.”
“너 따위가 그게 왜 궁금하지?”
백율운현은 허세를 부렸다.
“이봐, 난 지금 무척 신사적으로, 정중하게 대하고 있어. 내가 3년 전에 이유도 모르고 끌려가서 당한 대로 갚아 준다면 당신이 내게 질문을 할 수 있을까?”
“…….”
백율운현은 말문이 막혔다. 저 녀석에게 붙잡혀 이 더럽고 불편한 곳으로 내려온 후에야 가문의 힘이 얼마나 막강했는지 그녀는 깨달았다. 이곳에서는 어릴 때부터 배운 지식도, 가문 특유의 무술도, 경험을 통해 익힌 처세술도 소용이 없었다. 단태라는 녀석에겐 백율가의 이름은 전혀 의미가 없었다.
방단의 수장으로 잘못이 있든, 없든 마음대로 잡아다가 고문을 했던 백율운현은 한 번도 자신이 고문당하는 입장에 서리라고 상상하지 않았다. 고문 과정을 지켜보았고, 때로는 거기서 쾌감을 느꼈기에 그녀는 더욱 무서웠다.
집게로 손톱을 떼 내고, 물이 집어넣고 죽기 직전까지 물을 먹이고, 모욕적인 자극을 가하는 고문은 상상만으로도 몸이 떨릴 지경이었다.
“어서.”
단태는 냉정했다.
잠시 후, 백율운현은 11인위원회에 대하여, 그리고 그녀가 아는 도시에 대하여 설명하기 시작했다.
백율운현이 11인위원회의 구조와 역할에 대해 간략한 이야기를 마칠 무렵, 단태는 왜 이 여자가 방단의 수장인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