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181화 (181/293)

<-- 181 회: 5-16 -->

“그러면 지금 여기에 있는 건, 그자 때문이겠군요.”

“맞소. 그자는 반드시 돌아올 거요.”

철무는 성문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때, 창수가 걸어와 명국영 앞에 섰다.

“약제실장님이 경비대의 수사 보고서를 선생님께 전달하라고 해서 왔습니다.”

“고맙네.”

창수는 철무를 보며 가볍게 고개를 숙인 다음, 광장을 빠져나갔다.

경비대가 올린 보고서를 읽느라 명국영은 창수와 철무 사이에 오간 눈짓을 알지 못했다. 하층민을 대상으로 한 연쇄살인사건이어서 그런지 보고서는 허술했다. 그래도 명국영은 단서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보고서를 훑었는데, 기이한 부분이 있었다.

벽을 타고 지붕으로 달아가는 범인을 향해 화살을 쏘았는데, 화려한 색깔의 새가 날아와 방해했다는 내용이었다.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붉은 몸통, 은색의 머리, 하얀 날개의 작은 새였다.

명국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어디서 본 적이 있어…….’

“눈에 띄는 부분이 있습니까?”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명국영은 철무에게 보고서를 건네며 생각을 거듭했다. 왜 새를 묘사한 부분에 집중했을까?

그 순간, 입이 벌어지며 탄성이 흘러나왔다.

단태의 어깨에 앉아 있던 그 조그만 새!

소리 마법사를 따라다니는 백관조!

명국영은 흥분으로 숨을 쉬기 어려웠다.

둘 중 하나였다.

죽음의 마법사를 쫓아낼 만큼 강인한 용병의 정체가 소리 마법사거나, 단태가 돌아왔거나.

명국영은 고개를 흔들었다. 비약이 심한 논리였다. 용에게 잡혀 간 단태가 돌아왔다면 진작 탑으로, 혹은 자신을 찾아왔을 것이다. 게다가 단 3년 만에 패혈력을 얻으려 하는 죽음의 마법사를 맨몸으로 상대할 만큼 강한 용병이 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저 헛된 희망일 뿐이야.’

한숨을 내쉬던 명국영은 시선을 느꼈다.

“무언가 알아내셨습니까?”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 혼자 생각하다가 엉뚱한 내용으로 빠져 어디에 있는지조차 잊을 때가 가끔 있습니다.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서요.”

명국영은 서둘러 운하 쪽으로 가 버렸다.

명국영의 태도에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지만, 철무는 곧 성문에 집중했다. 이곳으로 온 이유를 잊지 않았던 것이다.

가져온 손수건이 땀으로 흥건해질 무렵, 철무 옆으로 세 사람이 다가왔다. 선뜻 말을 걸지 못하는 그들을 철무가 올려다봤다. 철무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무슨 일이야? 삼 형제가 다 같이 날 찾아오고?”

“……끝났네.”

철무와 동갑인 류근묵이 힘없이 말했다.

“끝나다니?”

철무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삼근맹이…… 넘어갔습니다.”

막내 류근명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좀 조용한 데로 가자. 가서, 자세히 이야기를 들어야겠어. 따라와.”

철무는 윤강의 소개를 받아 3년 전쯤에 유타루체로 찾아왔던 세 사람을 데리고 조용한 곳으로 갔다.

서늘한 맥주를 단숨에 들이켠 둘째 류근철은 특유의 낮고 거친 목소리로 그동안의 사정을 설명했다.

삼 형제가 용금탄을 떠나 유타루체로 내려와서 세운 삼근맹은 불과 1년 만에 입소문이 날 만큼 유명해졌다. 삼근맹은 약초는 물론 곡물, 가죽, 보석 그리고 자동기계를 비롯해서 고가의 장식품까지 취급하는 상점일 뿐 아니라, 의뢰를 받아서 온갖 일을 대행하는 용병단이었고, 윤가학관 등 명성이 높은 학교에 들어갈 수 있도록 기본을 마련해 주는 학원이었다. 첫째 류근묵은 학식이 뛰어나 서민은 물론 귀족, 상류층 자제들까지 몰려드는 삼근원을 이끌었고, 둘째 류근철은 용병단인 삼근단을 조직했으며, 막내 류근명은 삼근회를 운영했다.

삼근원, 삼근단, 삼근회는 별개의 조직인 동시에 하나의 집단이었다. 지혜가 탁월한 류근묵은 삼근원뿐 아니라 삼근단, 삼근회의 상황까지 파악해서 적절한 조언을 동생들에게 아끼지 않았다. 강단 있는 류근철은 형과 동생을 괴롭히는 지역의 주먹들을 평정했다. 막내 류근명은 이재에 밝아 삼근원, 삼근단이 재정적으로 어려워지지 않도록 조직의 구조를 튼튼히 하는 데 공을 들였다.

서로의 약점을 채워 주는 운영 방식 덕분에 경쟁력이 남다른 삼근맹은 2년 만에 열 개의 지부를 개설했고, 올해는 방염루체까지 진출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가끔 삼 형제를 만나서 술잔을 기울였던 철무는 탄탄대로를 달리던 삼근맹이 넘어갔다는 말을 믿기가 어려웠다.

“어젯밤, 흑수파가 삼근맹의 본부로 쳐들어왔습니다. 동시에 왕우파와 황적회, 일월회, 청명파가 삼근맹의 지부를 덮쳤습니다. 유타루체를 대표하는 폭력조직 다섯 개를 한꺼번에 감당할 수가 없어서 경비대에 연락했고, 용파와 마파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한데, 경비대는 요청을 무시했고, 용파와 마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때문에 본부는 불타 버렸고, 지부도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

철무는 할 말을 잃었다. 흑수파와 왕우파가 손을 잡다니. 이익이 눈앞에 있어도 서로가 싫어서 아예 상종하지 않으려는 폭력조직이 아니었던가. 그런 두 개의 파벌을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면…… 이번 일 뒤에 누군가 있다는 말이다.

“추명도 삼근맹을 무시했습니다.”

류근철은 크고 까만 눈으로 철무를 노려봤다. 주름진 이마 때문에 더 나이 들어 보이는 류근철, 막내 류근명이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미안하네. 허수아비 같은 지도자라서. 사실, 조금 전에 추명에서 쫓겨났네. 아니, 쫓겨나기 직전 자존심 때문에 먼저 나와 버렸네.”

“정말인가?”

맑고 투명한 분위기를 풍기는 첫째 류근묵이었다. 류근묵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발음이 정확하면서도 자연스러워서 듣기만 해도 마음이 진정되는 느낌이었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네.”

“죄송합니다, 철무 형님.”

류근철이 벌떡 일어나 허리까지 굽혔다. 화를 내면 철무조차 감당하기 어렵지만, 뒤끝은 없는 사나이의 행동에 철무는 빙긋 웃었다.

“우연이 아니군. 그렇지?”

류근묵이었다.

“맞네.”

“자네를 추명에서 내친 건, 칠하 그 늙은이들이지?”

“…….”

철무는 쓴웃음을 지었다.

“하층민의 권리와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추명의 칠하가 흑수파, 왕우파 따위와 손을 잡고 이런 일을 벌이다니. 간이 배 밖에 나왔어. 아니야. 그건 아닐 거야. 칠하가 벌이기엔 규모가 컸어. 어젯밤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면 도시가 불타 버릴지도 모를 만큼 여기저기서 화재가 일어났으니까. 철무,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까?”

“솔직하게 말해도 되겠나?”

철무는 각기 성향이 다른 세 사람을 쳐다봤다. 깊은 물을 들여다보는 느낌의 류근묵, 잘 벼린 단도 같은 서늘한 분위기를 풍기는 류근철, 닳아도 가치를 잃지 않는 금화 같은 류근명 모두 그가 보기에 괜찮은, 아니 만나기 어려운 사람들이었다.

“아파도 감당해야 하는 게 진실이라네.”

류근묵이었다.

“내가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삼근맹으로 인해 손해를 보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야. 삼근원으로 아이들이 몰리면서 기존에 있던 학원들 절반이 문을 닫았지. 삼근단의 합리적인 요금 때문에 유타루체를 대표하던 용병단인 당용단과 정본단의 위상이 흔들렸고 무엇보다 삼근회로 인해 명건조합, 유면조합의 매출이 줄어들었다고 하더군. 이번 일의 배후에는 칠하가 아니라, 11인위원회가 있을 거야. 그리고 그 뒤에는 시장이 있겠지.”

“…….”

삼 형제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기존의 질서를 깨뜨리는 자에 대한 본보기일 거야. 일벌백계, 일종의 경고인 셈이지.”

“어떻게 해야 되겠나?”

류근묵이 물었다.

“당장은 방법이 없어. 도시의 지하를 장악한 폭력조직, 하층민이 철석같이 신뢰하는 추명, 이해관계가 얽힌 학원들, 용병단, 상업조합, 그리고 11인위원회와 시장이라면…… 도시 전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지. 자네 세 명이 도시 전체와 싸울 수 있겠나? 그럴 힘도, 그럴 영향력도, 그럴 돈도 없을 텐데.”

“……포기하라는 말입니까?”

둘째 류근철이었다.

“때를 기다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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