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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천파는 반우현 옆에서 돌, 나뭇조각 등을 치웠다.
반우현 혼자 들기 어려운 큼지막한 바위를 옮기기 위해 누천파는 물론 사람들 대여섯 명이 달라붙었다. 한참 낑낑거린 후에 겨우 바위를 굴려 옆으로 옮길 수 있었다.
숨을 헐떡이는 반우현 곁에 선 누천파가 말했다.
“연금술, 포기했냐?”
“뭐?”
“보통 몸이 아니야. 본격적으로 반극권 수련하고 있지? 아예 계승자 자리도 동생에게 넘겨 줄 생각이야?”
“포기한 건 아니야.”
“둘 다 할 수는 없을걸.”
“그러는 넌? 너도 황궁 바깥출입이 잦다던데. 쉬엄쉬엄 놀면서 언마의 경지를 이룰 수는 없을걸.”
“잠깐 외도 좀 했지.”
누천파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두 사람은 더 이상 용의 유산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가까이 지냈기에 서로의 기분을 금세 알아차린 것이다.
“이건 경고야.”
누천파가 무너진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경고라니? 무슨 뜻이야?”
“원정대.”
“설마 유천주가 그걸 알고 일부러 시청 건물만 부순 거라고?”
“그게 합리적인 결론이야. 내 생각에는.”
“…….”
반우현은 할 말을 잃었다. 듣고 보니 그럴듯했다. 그동안 잠잠했던 유천주가 갑자기 날아와 시청 건물만 건드린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천마가 떼로 덤빈다고 해도 용을 이기기는 어려워. 포기하는 게 좋아. 괜히 건드렸다가 도시 전체가 난장판이 될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말한 누천파는 일하는 사람들 사이로 가서 작업에 열중했다.
반우현은 그럴 수 없었다. 누천파가 한 말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마음만 먹으면 시청은 물론 상아별로까지 박살 낼 수도 있었던 유천주가 아닌가. 유독 시청 건물만 무너뜨린 건 이유가 있어서였다.
이 모든 게 원정대 때문이었다!
괜히 나서서 원정대를 구성한 륜사가 갑자기 미워졌다.
잠자코 있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할 수만 있다면 원정대는 시청이 아니라 마둔수탑과 관련이 깊다고 유천주에게 알려 주고 싶었다. 그러면 유천주는 시청이 아니라 마둔수탑을 무너뜨릴 것이다.
11인위원회가 천막 밖으로 나왔다.
반우현은 서둘러 그쪽으로 달려갔다.
반우현을 발견한 당현추가 싸늘한 시선으로 도시의 계승자를 쳐다보았다.
“어쩌면 너는 이 도시의 정점에 서지 못할 수도 있겠구나.”
충격적인 말을 남긴 당현추는 나머지 사람들과 함께 근처에서 대기하던 마차들 쪽으로 가 버렸다.
감히!
일개 가문의 가주 주제에 차기 시장에게 그따위 말을 지껄이다니!
반우현은 격분을 억누르며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가 깜짝 놀랐다. 평생 이토록 지치고 외로워 보이는 아버지는 처음이었다. 탁자에 팔을 올리고 턱을 괸 아버지는…… 딸을 보자 힘겹게, 있는 기운을 짜내어 웃었다.
“앉거라.”
“대체 무슨 일이에요? 당현추 그 작자가…….
“내 이야기부터 들어라.”
묵직한 목소리에 반우현을 입을 다물고 귀를 열었다.
아버지의 설명이 시작되자 반우현은 곧 귀를 의심했다. 도시의 재정이 그토록 심각한지 상상도 못 했다.
두 배 가까이 늘린 세금도 시청의 재정을 일으켜 세울 수는 없었다. 유천주로 인한 위험성을 인식한 상류층, 특히 귀족들이 도시에 있던 재산의 상당 부분을 안전한 곳으로 옮겼고, 그로 인해 연쇄적인 자금의 이동이 시작되었다. 대상인들도 유타루체를 떠나 용금탄이나 방염루체 쪽으로 근거지를 이동시켰다.
반명이 안간힘을 다 썼음에도 사람들의 불안 심리를 완전히 가라앉힐 수는 없었다. 3년 전 유천주는 시청 건물, 상아별로의 저택만 부순 게 아니라 도시의 중심을 무너뜨린 셈이었다. 유천주는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위험을 의미했고, 더 큰 부를 소유한 자일수록 그런 위험에 휘말리지 않으려 했는데, 반명은 그 경향성을 되돌릴 수 없었다.
바로 그 때문에 11인위원회, 즉 영향력 있는 11개의 가문에 도움을 요청했었다. 대가는 각종 이권이었다. 안 그래도 도시의 운영에 깊숙이 개입한 11개의 가문으로서는 위험을 무릅쓸 가치가 있는 기회였고, 그 가문들이 앞장서서 도시에 투자를 하자, 서서히 분위기가 달라졌다. 자금이 다시 유타루체로 흘러들기 시작한 것이다.
반명이 시청 건축을 서두른 이유도 사람들의 심리 때문이었다. 도시 중앙에 높고 견고한 건물이 우뚝 서 있으면 사람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 실체 없는 느낌이야말로 도시의 기둥이며,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보루였다.
오늘, 유천주는 그 보루를 무너뜨렸다.
반우현은 앞이 캄캄했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그려졌다.
다시 한 번 막대한 자금이 썰물처럼 도시 밖으로, 어쩌면 방염루체 쪽으로 흘러갈 것이다. 오랜만에 활기를 띄던 도시는 죽음을 앞둔 환자처럼 기력을 잃을 테고, 여유와 능력을 가진 자들은 유타루체를 떠나 안전한 곳으로 이동할 것이다.
어떻게 그런 흐름을 막을 수 있을까?
3년 전, 아버지는 11인위원회의 도움을 받아 겨우 위기를 모면했다. 이번에도 그럴 수 있을까?
힘들 것이다.
유천주로 인해 11개의 가문은 적지 않은 피해를 볼 테고, 그 책임을 아버지에게 돌릴 것이다. 각 가문은 거대한 조직이었다.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듯, 조직은 커질수록 내부에 복잡한 문제가 생긴다. 각 가문의 가주들 역시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터였다.
아버지의 설명이 이어졌다. 3년 동안 힘을 기른 11인위원회는 이제 반명의 자질을 문제 삼았다. 반명 때문에 도시에 두 번이나 재앙이 닥쳤다는 것이다.
반우현은 그런 비난의 이면에 숨겨진 뜻을 금세 알아차렸다. 누군가, 아마도 당현추가 시장 자리에 욕심을 내는 모양이었다. 적절한 타개책을 통해 위기를 넘기지 못한다면 다음 시장은 반가가 아니라 당가에서 나올지도 몰랐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반우현은 당당해서 언제까지나 우뚝 서 있을 것만 같았던 아버지와 어울리지 않는 어깨를 쳐다보았다. 축 처져 도시의 지배자답지 않은 어깨.
“재정 문제가 해결된다면요? 시청의 건축 자금은 물론 막대한 양의 자금이 생긴다면요?”
“방법이 없단다.”
“아니, 있어요.”
“설마, 연금술에 성공했느냐?”
아버지의 눈이 반짝거렸다.
“……그건 아니에요.”
“말해 봐라.”
별로 기대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용혈로 내려가서 필요한 금과 보물을 가져오겠어요.”
“뭐?”
반명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제 생각엔 원정대 관련 소식이 유천주의 귀에 들어간 것 같아요. 어떻게 유천주가 알았는지 모르지만, 도시 전체가 사소한 승리에 흥분한 나머지 원정대에 대해 떠들었으니 유천주도 알게 됐겠죠. 저는 은밀하게 원정대를 조직할 생각이에요. 물론 기존의 원정대는 해체한다고 발표해야겠지요. 방단의 참여를 반대하는 마법사들도 마법서 따위의 마법 관련 물품의 소유권을 인정한다면 시청의 개입을 인정할 거예요.”
“원정대의 실패는 곧 유타루체의 멸망일지도 모른다.”
반명의 목소리는 무거웠다.
“저는 도박을 해서라도 저의 도시를 지킬 생각이에요.”
반우현은 그 말을 하는 순간, 계승자를 포기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시장의 자리 역시 남에게 줄 수 없음을 깨달았다. 무엇이든 잃어야 그 진가를 알 수 있는 법. 반우현은 가문이 흔들리는 이 시점에서 개인적인 희망 따위에 연연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알았다.”
“백율운현이 실종되었다고 했지요?”
“그래. 백율가에서 사방을 뒤지고 있지만, 소득이 없는 모양이야.”
“그러면 절 방단의 임시 수장으로 임명해 주세요.”
“널?”
“방단의 대표라면 원정대에 참가할 수 있을 테니까요.”
아버지는 딸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다 컸구나, 우리 딸.”
“그동안 아버지가 이렇게 힘드신 것도 모르고, 죄송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