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187화 (187/293)

<-- 187 회: 5-22 -->

반우현은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굳은살 박인, 그리고 주름진 손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강인한 손이라고 생각했건만.

천막 밖으로 나와 망가진 시청을 쳐다본 반우현은 자신의 손으로 재앙의 악순환을 끊어 버리겠다고 마음먹었다. 유타루체는 유천주로 인해 감옥에 갇힌 아이처럼 말라죽고 있었다. 유천주만 없앨 수 있다면, 유타루체는 호수 전체로 뻗어 나갈 수 있으리라.

그러면 도시는 지금보다 두 배, 아니 열 배는 더 커질 것이다. 제국 최고의 도시가 되는 것도 꿈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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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부심은 금세 박살 났다.

피난 행렬은 동쪽 성문이 가까워질수록 지옥을 방불케 했다. 운하는 배로 가득 차서 오도 가도 못한 배들 사이에 충돌이 벌어졌다. 여기저기서 싸움이 일어났고, 짐을 들고 좁은 길로 들어선 사람들은 서로 먼저 도시 밖으로 나가기 위해 몸싸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공포에 질려 도망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오직 성문을 향해 돌진하는 사람들 틈바구니에 낀 단태는 용은 떠났다고,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소리쳤다.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단태를 미치광이 쳐다보듯 무시하곤 더 빨리 성문에 도달하기 위해 앞에 있는 사람을 밀었다.

하늘엔 크고 작은 용들이 귀족, 부유한 상류층을 태운 채 도시 밖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행렬에서 벗어나 좁은 골목길로 접어든 단태는 벽에 기대고 숨을 몰아쉬었다. 이런 결과는 전혀 예상 못했다. 무룡은 시청의 중앙탑만 부순 다음 호수로 날아가 버렸는데도 사람들은 안전한 곳, 도시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언제까지 계속될까?

사람들은 앞쪽의 상황은 무시한 채 밀고, 또 밀었다. 그런 사람들 뒤쪽에서도 다급하게, 있는 힘껏 미는 사람들이 있었다. 두려움이 사람들을 밀었고, 또 밀리게 하고 있었다. 공포가 넘어진 사람을 짓밟고 가도록 군중을 움직이고 있었다.

왜 빨리 가지 않냐고 소리치는 사람들 때문에 단태는 정신이 없었다.

‘이런 걸 원하진 않았는데…….’

단태는 당혹스러웠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왜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고 예상하지 않았을까?

그때,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뺨에 그을음이 묻어 있는 여자 아이는 단태의 손을 잡고 있었다. 대여섯 살로 보이는 아이는 튼튼한 신발을 신고 조그만 가방까지 메고 있었다. 부모와 피난 행렬에 휩쓸렸다가 손을 놓친 모양이었다.

“오빠도 엄마를 놓쳤어?”

“…….”

단태는 골목 밖 사람들 중에 딸을 잃은 부모가 있지 않을까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나, 배고파.”

“알았어.”

아이를 업은 단태는 골목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피난 행렬에 들어섰다가는 성문 밖까지 떠밀려 갈 것이다.

평소라면 아이들이 뛰어놀 만한 공터는 비어 있었다. 공터 몇 개를 지난 단태는 여관 안으로 들어섰다. 여섯 번째 들른 여관인데, 다행히 문이 열려 있었다. 1층 식당 공간은 텅 비어 있었다. 희미한 등불 두 개가 주방으로 통하는 쪽 탁자 위쪽 공중에 매달려 있는데, 거기 앉아 있던 주인이 단태와 등에 업힌 소녀를 보고는 몸을 일으켰다.

“아유, 예쁘게 생겼네.”

풍만한 가슴을 내밀며 다가온 여관 주인은 그새 잠이 든 아이를 안았다.

“혹시 딸?”

“……아닙니다. 도시 밖으로 나가려다 부모와 헤어진 모양입니다.”

“착한 총각이네. 거기 좀 앉아 있어. 아이는 내가 위로 올라가서 재울 테니까.”

주인은 삐걱삐걱 나무 계단을 올라 위로 사라졌다.

단태는 낡았지만 정성스레 닦아서 보기 좋은 의자에 앉아 가만히 있었다. 주위는 기괴할 정도로 조용했다. 뛰어노는 아이들의 까르르 웃음소리, 그리고 낮부터 술에 취해 돌아다니는 주정뱅이들의 왁자지껄한 노랫소리 따위가 그리웠다.

다시 계단 삐걱대는 소리가 들리며, 주인이 내려왔다.

“너무 조용하지?”

“그러네요.”

“무서울 정도로 조용해. 과연 유천주가 대단하긴 대단한가봐. 그 울음소리에 동네 개들이 똥, 오줌을 질질 싸며 달아나 버렸으니까. 뭐, 사람들도 다를 바는 없지. 간단한 짐만 가지고 다들 살기 위해 동쪽으로, 도시 밖으로 가 버렸으니까.”

“……주인아주머니는 왜 여기 남으신 겁니까?”

망설이던 단태가 물었다.

“나? 아들이 올해 시험을 보거든. 지금도 저 어둡고 축축한 지하실에서 머리에 끈을 동여매고 공부하고 있어.”

“시험이라니요?”

도시를 빠져나가려는 사람들의 광기를 직접 본 터라, 단태는 시험이라는 이유로 남아 있는 여관 주인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윤가학관.”

주인은 자부심 넘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윤가학관?

11개의 가문 중 하나인 윤가에서 운영하는 교육기관 이름이 바로 윤가학관이라는 사실을 기억해낸 단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시험을 준비한다고 해도 목숨이 아까워서 다들 도시를 빠져나가는 상황을 무시하고 지하실에서 공부를 하다니.

“거기 들어가기 위해 삼근원에 다녔는데, 안타깝게도 불이 나서 망해 버렸다더군. 삼근원만큼 돈 적게 받고 잘 가르치는 학원은 없는데. 그건 그렇고, 총각은 여기 출신이 아니지? 그렇지?”

유타루체 출신이면 다 안다는 뜻.

“……전 운면산맥 남쪽의 울담반에서 왔어요.”

“역시! 그럴 줄 알았어. 여기 사람들, 특히 돈 없는 사람들이 가난에서 벗어날 길은 딱 두 가지야. 타고난 재능을 발휘하여 마법사가 되거나, 공부를 잘해서 윤가학관처럼 좋은 학교에 들어가거나. 내 아들은 부모 잘못 만난 죄로 죽을 똥 살 똥 공부하는 수밖에 없어.”

“아…….”

머릿속으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열변을 통하는 여관 주인의 표정을 보니 그 의지가 느껴졌다.

주인은 단태를 앞에 두고 그동안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가르치느라 고생했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가끔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총각 앞에서 하는지 모르겠지만’, 혹은 ‘총각 앞에서는 마음이 편해서 그런지 별별 이야기는 다 하네’ 등등 이야기를 중단하는 듯한 말도 했지만, 여관 주인은 거의 쉬지 않고 두 시간이나 떠들었다.

그 덕분에 단태는 물의 도시에 거주하는 평범한 가정이 어떤 식으로 살아가는지 느낄 수 있었다. 3년 전 유천주에게 잡혀 가기 전까지 경험했던 노예의 삶과는 여러 면에서 달랐지만, 공통점도 적지 않았다. 현재의 처지에 만족할 수 없어서 어떻게든 한계를 극복하려는 의지는 노예든, 평범한 자유인이든 다를 바가 없었다.

주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가난한 사람이 성공할 수 있는 길은 재능 혹은 머리였다. 장사를 하려고 해도 밑천이 필요했고, 용병으로 먹고살려면 타고난 재능이 요구되었다. 태어난 집에서, 아무런 발전도 없이, 꿈도 없이 살아간다면 굳이 발악할 필요는 없지만, 부모는 자식이 자신처럼 살기를 원치 않았다.

2층에서 잠들었던 아이가 배고프다며 내려오는 바람에 수다는 중단되었다. 아이는 고기를 넣은 죽을 두 그릇이나 먹었다. 단태도 두툼한 고기구이 요리를 먹어 치웠다. 맛은 최고였다.

졸린 아이를 침대에 눕히고 돌아온 주인은 단태를 보며 대뜸 물었다.

“총각은 뭐 하는 사람이야?”

“그게…….

선뜻 할 말이 없었다. 오늘 도시로 날아와서 시청을 무너뜨린 용의 주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쯧쯧, 일하려고 이곳으로 온 거지? 그렇지? 그럴 줄 알았어. 한데, 쉽진 않을 거야. 갈수록 일거리는 줄어들고, 일감을 찾아서 도시로 오는 사람은 많아지고 있거든. 총각이 좀 어리면 공부를 해 보라고 권하겠는데, 아무래도 머리가 굳어 버린 것 같아. 그러면 공부로는 성공할 수 없어.”

“일거리가 줄어든다니요?”

“그야 뻔하지. 유천주가 날아와 시청을 부수었잖아. 그건 언제든지 유천주가 도시로 난입해 엉망진창을 만들 수 있다는 뜻이야. 돈푼깨나 있는 사람들이 위험천만한 곳에서 살고 싶겠어? 돈 가진 자들이 도시를 떠나면…… 일자리는 줄어들어. 귀족들의 행태는 괘씸하지만 그들이 한꺼번에 없어지면…… 유타루체는 무너지고 말 거야.”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드나들어 나누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어깨너머로 들었던 여관 주인의 푸념에는 진실이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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