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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중 씨, 여기서 뭘 하는 겁니까?”
마괘를 내린 창수가 물었다.
“그냥 시간 죽이고 있는 겁니다.”
미치광이라고 하면서 고개를 흔든 수련사들이 탑으로 돌아가는데, 창수만 남아 있었다.
“다른 곳으로 가서 시간을 죽이는 게 좋을 겁니다. 다들 신경이 예민해져서 짐작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으니까요.”
“혹시 이곳에 명국영 선생님이 있지 않습니까?”
“그분을 만나러 온 겁니까?”
“딱히 그런 건 아닌데, 용금탄에서 그분 강의를 인상적으로 들은 적이 있어서요. 뭐, 이런 상황에서 명 선생님을 만날 수 있으리라 기대하진 않습니다.”
“잘 아시는군요. 그분은 바쁘십니다. 유천주 사건 이후, 저도 그분을 뵙지 못했습니다.”
“알겠습니다.”
단태는 엉덩이를 털고 일어섰다. 창수에게 진실을 들려 주고픈 충동은 겨우 참았다.
여관으로 돌아오는 길은…… 멀고 지루했다. 명국영을 만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사실을 아는데도 마음은 제멋대였다. 빛이 새어나오는 여관 앞에 선 순간, 단태는 왜 기분이 엉망인지 깨달았다. 륜사처럼 명국영에게도 실망을 할까 두려웠던 것이다.
결존계를 통하여 단태는 명국영의 내면을 일부 들여다볼 수 있었다. 분명 거기에는 잃어버린 제자를 향한 그리움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 감정이 전부는 아니었다. 황제를 향한 충성심, 도시를 위하여 유천주를 죽여야 한다는 신념, 인간은 용을 넘어설 수 있다는 확신도 거기 담겨 있었다.
단태는 여관 앞 돌계단에 주저앉았다. 구름이 걷힌 하늘에선 별이 총총 떠 있었다.
“스승님이 내 이야기를 이해하실 수 있을까?”
용옥간에 갇혀 용족이 남긴 기억으로 풍덩 빠져 3년 가까이 시간을 보낸 후에야 겨우 용족 특유의 사고방식을 받아들인 단태는 아무리 명국영이라고 해도 인간 중심적인 생각을 벗어던지기 어렵다는 점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명국영은 아직 바다 밖으로 나오지 않은 물고기였다. 그런 사람에게 또 다른 세상 이야기는 허무맹랑한 망상에 불과할 것이다.
“스승님을 용옥간으로 모셔 갈까? 그래 봐야 소용없어. 스승님은 용옥 내부로 들어갈 수 없으니까.”
그 어떤 마법사도 용옥을 쥐고 그 안에 깃든 용의 기억을 경험할 수 없다. 오직 용족만이 가능하다. 단태는 특이한 경우였다. 암탄주가 남긴 유산으로 인해 몸이 변화했기에 용족을 쥐고 그 안에 잠든 용의 기억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똑똑한 란조는 단태의 생각을 방해하지 않았다. 그저 지켜보면서 가끔 왼쪽에서 오른쪽 어깨로, 오른쪽에서 왼쪽 어깨로 옮겨 다녔을 뿐이다.
혼자라는 생각이 훅 가슴 안쪽으로 들어왔다. 갑자기 겨울의 한파라도 불어닥친 것처럼, 몸과 마음이 추위에 떨렸다. 설고가 보고 싶었다. 설고라면 이런 상황을, 이런 고민을, 지독한 외로움을 이해할 뿐 아니라 잠시나마 그 쓸쓸함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지혜로운 조언을 해 줄 텐데.
한숨을 내쉰 단태는 문을 열고 따뜻한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
“어?”
비어 있으리라 예상했던 일 층 식당 중앙에 세 사람이 앉아 있었다. 푸짐한 요리를 앞에 두고 술잔을 쥐고 있던 사내들이 이제 막 들어온 단태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제 왔어? 저녁은? 아직 안 먹었다고? 알았어. 내가 준비해 줄게.”
사내들이 듣도록 크게 떠든 여관 주인이 다가와 속삭였다.
“총각은 나만 믿어. 일자리를 찾는 중이라고 했지? 내가 오늘 그 일자리 찾아 줄게. 그러니까 저기 저분들 옆으로 가서 앉아. 알겠지?”
주인은 크고 두툼한 손으로 단태를 밀어 그 사내들 옆에 앉혔다. 단태가 거절할 여유 따위는 주지 않았다. 엉겁결에 주인에게 떠밀려 그 자리에 앉은 단태는 세 사람을 살폈다.
란조는 날아올라 서까래 위쪽 어둠에 자리를 잡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누구든 단태를 공격하면 발톱으로 긁어 버릴 기세였다.
이목구비가 닮은 형제 같은데, 분위기는 천차만별이었다.
“류근묵이라고 하네. 일자리 때문에 유타루체에 남았다고 들었는데, 그런가?”
맑고 깨끗한 목소리는 듣기 좋았다.
“……맞습니다.”
류근묵? 들은 적이 있는 이름이었다.
“이곳 주인아주머니는 우리더러 자네에게 일자리를 줄 수 있다고 믿는 모양인데, 안타깝게도 삼근맹은 망했네.”
“삼근맹이라구요?”
“자네도 들은 적이 있는 모양이군.”
류근묵은 맥주가 든 병을 들어 단태 앞에 놓인 잔을 채웠다.
눈살을 찌푸린 단태는 그제야 류근묵, 삼근맹을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해 냈다. 방단의 우두머리 백율운현의 입을 통해서였다. 방단은 온갖 정보가 흘러드는 저수지 같은 조직이었다.
단태는 세 사람을 다시 뜯어보았다. 백율운현이 묘사한 류씨 삼 형제가 분명했다.
“어이, 뭘 할 줄 알지?”
류근묵과 달리, 예의 따위는 싹 치워 버리고 핵심을 찌르는 질문이 둘째 류근철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단태는 그를 쳐다봤다. 그 오만한 태도에 ‘시청의 중앙탑을 무너뜨릴 줄 압니다.’라고 말하려다 참았다.
“싸움 좀 합니다.”
“그래?”
노골적으로 비웃는 류근철. 류근묵, 류근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 전에도 열두 명을 혼자서 쓸어버렸습니다.”
“뭐?”
가늘어진 류근철의 눈에 광기가 어렸다. 울화통이 터져 누구 하나 반쯤 죽여 버리고 기분에 잘 걸렸다는 마음이었다.
단태는 말리지 않는 두 사람을 노려봤다. 아마도 성격 더러운 둘째 류근철을 말리는 대신, 이런 식으로 울분을 풀라고 결정한 모양이었다. 고개를 돌려 폭발 직전인 류근철을 응시한 단태는 백율운현의 설명을 떠올렸다.
삼근맹은 방단의 개입으로, 시장은 물론 11인위원회의 적극적인 관여로 무너졌다. 백율운현이 단태에게 납치되기 전에 세운 계획이 그대로 실행된 것이다. 3년이나 피땀 흘려 세운 삼근맹이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되면 누구나 꼭지가 돌 수는 있다. 그렇다고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눈을 부라리며 광기를 흘려도 되는 건 아니다.
“혹시 절 아십니까?”
단태는 차분하게 물었다.
“내가 너 같은 새끼를 어떻게 알아?”
“입이 험하네요, 류근철 씨.”
“……뭐?”
벌떡 일어난 류근철이 의자를 발로 찼다. 데굴데굴 구르던 의자의 다리가 똑 부러졌다.
“주인아주머니 놀라실 테니, 밖으로 나가죠.”
단태는 천천히 걸어서 여관 밖으로 나갔다.
류근철이 씩씩거리며 따라오자 류근묵, 류근명 두 사람도 밖으로 나왔다.
란조는 즉시 날아와 단태의 어깨에 앉았다.
“넌 안에 들어가 있어. 내가 질 일은 없으니까.”
단태가 속삭이자 란조는 힐끔 류근철을 쳐다보더니 여관 안쪽으로, 아까 그 포근한 자리로 가 버렸다.
오가는 사람 없이 텅 빈 골목길에서 단태와 류근철이 마주 보며 서 있었다. 서늘한 밤바람이 두 사람 사이로 불었다.
“말려야 하지 않을까요?”
“근철이 녀석, 적당히 할 거야. 아무리 화가 나도 선을 넘지는 않으니까.”
류근명의 질문에 류근묵이 답했다.
류근철이 움직였다.
단태는 아까 싸웠던 건달들과 차원이 다른 동작에 적잖이 놀랐다. 눈에 집중하자 시간이 느려진 것처럼 류근철의 동작이 하나하나 보였다. 발목을 사용하는 방식이 독특했다. 몸의 무게중심을 부드럽게 옮기는 방식도 인상적이었다. 수천 번, 수만 번의 힘겨운 단련 과정을 거쳐 매끄럽게 연결되는 동작은 연이어 몰려오는 파도 같았다.
목을 움켜쥐려고 편 손가락의 각도를 살피며 옆으로 비껴 선 단태는 류근철이 얼마나 오랫동안 이 공격의 동작을 완성시키려고 애를 썼는지 알 수 있었고, 그로 인해 탄성이 절로 터져 나왔다.
“아!”
단태는 반격 대신 류근철을 지켜보았다. 이 아름다운 동작의 향연을 멈추고 싶지 않았다.
한 걸음, 혹은 반 걸음 옮겨 날카로운 공격을 피해 버리는 단태 때문에 류근철은 입에서 단내가 났다. 처음엔 하루나 이틀 침대에 누워 있게 만드는 수준으로 공격을 했다. 너무나 쉽게 상대가 피해 버리자 정신이 번쩍 들어 본격적으로 초식을 전개했는데도, 상대는…… 그림자처럼 손에 잡히지 않았다.
자신이 아는 최강의 기술마저 썼지만 여전히 저 평범한 녀석, 아니 평범해 보이는 녀석은 그 너머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