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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력자다!’
류근철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용병단에서 잔뼈가 굵은 그가 보기에 최소한 상무, 어쩌면 특무 이상의 등급일지도 몰랐다. 상무는 대략 500명의 용병을 이끈다. 특무는 무려 2,000명의 대규모 병력을 책임지는 등급이었다.
뒤로 두 걸음 물러선 류근철은 주먹을 가슴에 올렸다. 용병식 인사였다.
“무례를 범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나는 용병이 아닙니다.”
류근철은 깜짝 놀라 말문이 막혔다. 설마 저 남자가 지금은 사라져 버린 도장 출신 무인일까?
단태는 흔들리는 눈빛을 통해 류근철의 속을 읽었다.
“무인도 아닙니다. 그저 우연히 귀한 기술을 익혔을 뿐입니다.”
“아무튼, 한 수 배우겠습니다.”
가볍게 고개를 숙인 류근철이 경쾌한 발놀림으로 공간을 줄이며 다가왔다.
단태는 그 방식에 놀라며 옆으로 피한 다음, 어깨로 상대의 등을 밀었다. 약점을 정확히 공략한 것이다.
류근철은 아까 자신이 부러뜨린 의자처럼 데굴데굴 굴러 골목길 끝에 이르러서야 멈출 수 있었다.
그 모습에 류근묵, 류근명 그리고 의자 값을 달라고 말을 해야 할지, 아니면 줄 때까지 잠자코 기다려야 할지 고민하던 여관 주인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탄력을 이용해 단숨에 몸을 일으킨 류근철은 단태 앞으로 걸어갔다.
“제 안목이 형편없어서 기인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부디, 제게 가르침을 주십시오.”
단번에 무릎을 꿇는 류근철.
이번엔 단태도 놀라고 말았다.
류근묵이 부채를 부치며 다가와 류근철 옆에 섰다. 부채로 동생을 가리킨 그는 단태를 쳐다봤다.
“동생의 무례에 형으로서 사과를 해야겠군요. 사과를 받아 주신다면 조언 하나 하고 싶은데, 어떻습니까?”
“사과, 받아들입니다.”
단태는 처음부터 형제들의 상황을 알고 있었기에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다.
“이 녀석에겐 장점이자 단점이 딱 하나 있습니다. 바로 인내심입니다. 어찌나 끈질긴지 어릴 때부터 약골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병치레를 하면서도 기어이 지금의 몸을 만들어 냈습니다. 머리 나쁜 아이가 노력만으로 용태학에 입학한 거나 마찬가지라고 이 녀석을 가르친 분들이 말씀하시더군요. 이 아이는 평생 딱 한 번 무릎을 꿇었고, 허약한 녀석은 싫다면서 한사코 거절하던 그분은 무려 삼 년 만에 이 아이를 제자로 받아들였습니다. 오늘 또 무릎을 꿇었으니 최소한 삼 년 동안은 제 동생으로 인해 귀하께서는 삶이 좀 불편해질 겁니다.”
“…….”
단태는 류근묵의 얼굴에서 농담기를 찾으려 애를 썼지만 실패했다. 류근묵 옆으로 다가온 류근명도 애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단태와 눈이 마주친 류근철이 소리쳤다.
“저를 제자로 받아 주십시오!”
단태는 당장 여관으로 들어갔다.
류근철이 단태를 뒤따랐다.
*후원자
명국영은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벽에 걸린 횃불, 천장에 매달려 사방으로 빛을 뿌리는 등불이 만들어 내는 얼굴 윤곽의 그림자는 시시각각 달라졌다. 그 인상의 변화는 각 사람이 입으로 토해 내는 주장과 맞닿아 있었다.
소규모 원정대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도시의 계승자 반우현의 얼굴은 지나치게 딱딱해서 살아 있는 사람이라기보다는 힘으로 똘똘 뭉친 대리석상 같았다. 반우현의 논리에 반대하여 이야기를 늘어놓는 당현추는 여러 개의 가면을 쓰고 필요할 때마다 적절한 가면을 드러내는, 품위와는 거리가 먼 전문 광대 같았다.
륜사는?
명국영은 속으로 웃었다. 륜사는 이 은밀한 자리에 참석한 사람 중 표정이 마음과 연결된 유일한 인물이었다.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나 굳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시장 반명은 소문대로 능구렁이였다. 최소한의 말로 최대한의 뜻을 전달하는 화법은 극도로 세련되어 명국영은 몇 번이나 탄복했다. 적이 된다면 쉽지 않은 상대였다.
백휘섬선 광오선은…… 바닥이 없는 우물 같은 사람이었다. 말투로, 다른 사람들의 말에 반응하는 표정으로, 때로는 눈빛을 통하여 그 안을 들여다봐도 아무것도 없었다. 분명 눈앞에 있는 사람, 뼈와 살로 이루어진 사람인데도 손에 잡히는 게 없어서 명국영은 자신도 모르게 광오선을 힐끔힐끔 살폈다.
열띤 토론은 잠시 중단되었다.
광오선이 다가와 물었다.
“내 얼굴에 뭐가 묻었나?”
“……아닙니다.”
“예전에 만난 적이 있던가?”
“그것도 아닙니다.”
감정을 배제한 눈으로 본 광오선은 친근한 노인이었다. 주름진 눈매는 인자로웠고, 언제나 웃는 입가는 손자에게나 보일 법한 할아버지의 미소를 닮아 있었다. 대륙 최강의 마법사라기보다는 이웃집 할아버지 같은 사람이 바로 광오선이었다. 명국영은 두뇌의 오작동으로 인해 눈앞의 노인을 오해했다고 결론 내렸다.
“자네 의견은 어떤가? 지금까지 자네 생각을 드러내진 않은 것 같던데?”
광오선은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원정대, 찬성합니다.”
“그런가? 다행이군.”
“한데, 의문이 있습니다.”
“말해 보게.”
“용혈로 갈 수 있는 지도를 확보해 놓고 왜 지도의 존재를 공개하셨습니까? 천광탑이라면 원정대를 조직하여 몰래 유타루체의 지하로 내려갈 수도 있을 텐데요?”
명국영은 핵심을 찔렀다.
“그럴 수도 있었고, 실제로 그럴 생각도 있었네. 문제는 그럴 경우 천마는 나 혼자뿐이라는 점일세. 유천주는 용이야. 투기를 지닌 진짜 용. 아무리 천마라고 해도, 팔마탑 중 수위를 차지하는 천광탑이라고 해도 어쩌지 못하는 용 말일세. 그러니 배가 아파도 지도를 공개하여 다른 천마들과 손을 잡을 수밖에.”
광오선은 담백한 어조로 답했지만, 그 내용은 명국영의 예상을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명국영은 마음속 찜찜한 부분을 도려낼 수 없었다. 무언가 더 있는데, 꼬집어 설명할 수가 없었다.
때때로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어도 가슴이 납득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명국영은 살아오면서 그런 상황에서는 머리보다 가슴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지혜를 몇 번의 고통 속에서 배웠다. 그 때문에 완벽에 가까운 광오선의 대답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
회의가 재개되었다. 토론은 점점 막바지로 치달았다. 시장의 암묵적인 동의, 계승자의 주장에 당현추의 현실론은 조금씩 밀렸고, 결국 소규모 원정대를 보내자는 의견이 채택되었다.
공기가 축축한 지하실을 벗어나 위로 올라가자, 륜사가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난 회의가 싫어.”
“회의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
“자넨 관리들이 시간 죽이며 입이나 나불대는 회의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상상도 못 할 거야.”
륜사는 고개를 흔들었다.
“하긴…….”
그 자신이 관리로서 얼마 전까지 공무를 집행했기에 명국영은 제국의 운영 체계가 얼마나 허술한지, 그 체계의 일부인 관리들이 얼마나 느리게 생각하고 움직이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때로는 관례적으로, 때로는 고의적으로 일 처리를 늦추는 관리들 때문에 분통이 터져 일을 그만두었다.
두 사람은 대기하던 소마선에 올라탔고, 여화는 조종하는 자리에 서서 배를 몰기 시작했다. 시원한 밤바람이 회의로 지친 두 사람을 쓰다듬었다.
“의외였어.”
륜사는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뭐가?”
“회의 내내 자넨 말을 아꼈지. 내가 보기에도 답답한 순간까지 자넨 꾹 참고 있었어. 왜 그랬나? 난 자네가 시장과 계승자, 11인위원회의 대표 그리고 백휘섬선까지 깜짝 놀라게 할 만큼 탁월한 의견을 내놓을 줄 알았거든.”
“굳이 입을 열 필요가 없었네. 반우현은 똑똑한 여자야. 도시의 운영을 맡아도 될 만큼. 그리고 원정대의 필요성에는 나도 찬성하네. 유타루체가 성장하려면 호수로 진출할 필요가 있으니 말일세.”
“그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