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192화 (192/293)

<-- 192 회: 5-27 -->

그런 당신이 무능하겠지.

단태는 빙긋 웃었다.

“됐습니다.”

계단을 내려와 빌린 배에 올라탄 단태는 노를 저어 이쪽을 노려보는 사내에게서 멀어졌다.

소마선을 마련할 돈은 충분했다. 무룡이 코를 골며 자는 대혈의 바닥에 깔린 금괴 하나만 가져와도 소마선은 물론 중마선, 어쩌면 대마선까지 살 수 있으리라. 쓸데없는 의심을 사지 않으려고 돈을 쓰지 않을 뿐이었지만, 매번 사공 딸린 배를 빌리거나 직접 노를 저으려니 시간이 아까웠다.

해 질 무렵, 단태는 상아별로 입구가 내려다보이는 건물 옥상에 서 있었다. 장벽 너머 상아별로는 부드러운 저녁 햇살로 반짝이는 건물로 가득 차 있었다. 비교적 경계는 느슨해졌으나 단태는 경솔한 행동으로 일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도시는 거대한 공간이었다.

마둔수탑에 종자로 있었을 때는 미처 몰랐다. 마둔수탑에 적응하기도 바빴던 터라, 도시 전체를 볼 여유가 그에겐 없었다. 당시의 단태에겐 탑이야말로 생존을 위해 알아야 할 세상의 전부였던 것이다.

도시가 광활할 이유는 공간의 크기, 너비 때문이 아니었다. 거기 사는 사람들의 다양함 때문이었다. 셀 수도 없이 다양한 삶이 도시를 채우고 있었다. 천천히 골목길을 걷기만 해도, 혹은 노를 저어 운하 위를 흘러가기만 해도 사람들의 삶이 귀로 파고들었다. 저마다 제각기 다른 걱정, 염려 그리고 희망과 꿈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다들 치열하게 살고 있었다.

시장 한편의 버려진 나무 상자에 앉은 채, 오가는 사람들…… 흥정하는 사람들……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 단태는 마치 방염산 꼭대기 분화구 옆에 선 것 같은 뜨거운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람들 하나하나가 용암을 품은 조그만 화산이었다. 적절한 조건이 되면 그 안에 숨겨진 용암이 밖으로 흘러내릴 수 있는 화산을 닮은 사람들이었다.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거는 태도, 타인을 밟아서라도 위로 올라가겠다는 의지, 어떻게든 이기고 말겠다는 확신은 모두 그 용암의 열기 같은 것이었다.

순진한 여자를 꼬드겨 싸구려 옷을 비싸게 팔아 넘었다는 이유로 기뻐하는 의류점 주인, 중요한 거래가 깨져 낙담한 나머지 벌써부터 만취한 장사꾼, 밤에 있을 ‘일’을 놓고 모의하는 사람들, 자릿세를 받으려고 등이 굽은 노파의 좌판을 뒤엎는 건달들까지.

한 번만 봐 달라는 노파의 애원에도 건달들은 실실 웃으며 좌판에 올려놓았던 몇 뿌리 안 되는 약초를 구둣발로 짓밟았다. 심지어 노파를 밀치고 앉아 있던 의자를 부숴 노파가 숨겨 놓은 잔돈을 찾아내기도 했다.

단태는 실실거리는 건달들 앞으로 갔다.

“뭐야?”

“손자.”

단태는 노파를 일으켜 세웠다.

“아! 그러면 부족한 자릿세를 받아야겠어. 원금에 이자까지 합치면 10마전은 될 거야.”

“그래?”

비틀거리던 노파를 한쪽 옆으로 데려가 앉힌 단태는 나서는 대신 구경이나 하려고 몰려든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며 건달들 앞에 섰다.

어떻게 할까?

쾌감이 몸을 관통했다. 짓밟아 버릴 수 있다. 오만한 미소가 걸린 저 얼굴을 묵사발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다. 죽여 버리는 것도 어렵지 않다. 단태에겐 그럴 만한 힘이 있었다.

그 힘, 사용해도 될까?

단태는…… 3년 전 시법원에서 재판 받던 기억을 떠올렸다. 높은 곳에 앉아서 피의자를 내려다보던 판사의 두툼한 얼굴, 잊을 수 없었다. 판결을 내리는 권한은 한 사람의 삶을 지옥으로 떨어뜨릴 수도 있고, 반대로 살려 줄 수도 있다. 이 순간, 단태는 저 건달들에게 판결을 내리는 판사가 된 기분이었다.

자, 어떤 판결을 내릴까?

“10마전으로는 안 되겠어. 계산이 틀렸거든. 20마전은 필요해. 자, 죽고 싶지 않으면 내놔.”

사각턱의 소유자가 말했다.

단태는 움직였다. 바람처럼. 돌풍처럼. 모든 것을 부수는 태풍처럼.

건달들은 우수수 떨어졌다. 힘없는 낙엽처럼. 왼쪽 팔이 부러진 놈들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뒤늦게 시장으로 출동한 경비대원을 발견한 단태는 사람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경비대는 누가 옳은지, 누가 악한지 판단하는 대신 관련자를 문제 있는 사람으로 몬다. 어릴 때부터 본 경비대는 항상 그런 식으로 분쟁을 다루었다.

돌아가는 길에 삼근맹 이야기가 귀로 파고들었다. 단태는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삼근맹에 관심이 생겨 수다를 떨던 사람들을 쫓아 선술집으로 들어섰다.

기다란 탁자 앞에 앉아 주문한 맥주를 홀짝거리며 귀를 열어 놓은 단태는 삼근맹이 서민의 희망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나 같이 삼근맹의 붕괴를 자신의 일처럼 아까워했다.

“이제 막 유타루체에 도착했는데, 삼근맹 사건이 뭡니까?”

단태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술집 주인에게 물었다.

소매를 걷어 올려 불룩불룩 근육질의 팔뚝이 드러난 주인은 당장 흥분했다.

“희망이 사라졌소. 한데, 어쩌겠소? 힘 있는 놈들이 찍어 누르니 어쩔 수가 없지. 삼근맹을 운영하던 삼 형제, 괜찮은 사람이었는데. 정말 아까워. 돈독이 올라 돈 없으면 당장 시험이 코앞인 학생까지 내쫓던 다른 학원과는 차원이 달랐거든. 류근묵 원장은 실력이 얼마나 좋은지 윤가학관에서 교수로 초빙까지 받았는데도 가난한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거절했다지? 둘째 류근철은 또 어떻고? 부러질지언정 절대 휘어지지 않는 사람이지. 한번 마음먹은 건 어떻게든 해내는 사람이니까. 셋째 류근명도 걸물이야. 상회를 운영하는 놈들은 죄다 탐욕스러운 장사꾼이라고 생각했는데, 류근명은 아니거든. 상도에 맞게 돈을 버니까 누구도 류근명에게 손가락질 하지 않지. 그런 사람들이 잘돼야 하는데, 쯧쯧.”

주인의 말에 사람들이 다가와 한마디씩 보탰다. 다들 삼근맹의 붕괴는 있는 놈들의 음모라고 확신했다. 뇌물 상납을 한사코 거부한 게 몰락의 원인이라고 제법 논리적으로 분석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아쉽다면 류씨 삼 형제를 도와주면 되지 않을까요?”

“…….”

단태의 질문에 다들 입을 다물었다. 서로 눈치를 보던 그들은 순식간에 흩어졌다.

주인이 단태에게 속삭였다.

“힘없는 서민이 뭘 할 수 있겠나? 술이나 마시며 투덜대는 것뿐이지.”

술집 밖으로 나온 단태는 쉽게 흥분하던, 그러나 질문 하나에 흩어져 버린 사람들을 비난하지 않았다. 분통이 터져 잘못을 말할 수는 있지만 가족, 친지를 버릴 용기는 없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단태 자신도 오랫동안 그들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이었다.

건물과 건물 사이의 틈으로 시청의 중앙탑이 보였다. 전율이 몸을 움켜쥐었다. 무룡이 무너뜨린 중앙탑. 평범한 사람은 절대 할 수 없는, 꿈도 꿀 수 없는 일.

단태는 자신은 더 이상 평범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방법을 찾아야겠어.”

단태는 삼근맹의 붕괴를 안타까워 하지만 도와줄 수 없는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을 대신하여 삼근맹을 도와줄 수 있는 특별한 사람이었다.

@

붉은 덩굴에 휘감겨 죽을 뻔했던 백율운현은 석실로 기어서 돌아와 벽에 등을 댄 채 한참 동안 헐떡거렸다. 단태가 들어가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주었던 그 방에 함부로 들어간 대가로 목숨을 잃을 뻔했다. 혹시 거기서 탈출에 필요한 무언가를 얻을 수 있지는 않을까 기대했던 백율운현은 귀중한 교훈을 몸으로 얻었다.

이곳은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이다.

덩굴에 감겼던 발목은…… 뻘건 자국이 남아 있었다. 달군 채찍이라도 맞은 것 같았다.

그 방에는 불타는 나무도 있었다. 불이 붙은 채 꺼지지 않는데도 멀쩡한 나무는 상상도 할 수 없는데. 반대로 냉기를 뿜어내는 은색의 나무도 있었고, 시시각각 형태가 바뀌는 기이한 나무도 보았다. 아무리 봐도 익숙해질 수 없는 숲이었다.

백율운현이 출입 가능한 방은 기괴한 동물, 식물, 광석, 호수, 조류로 그득한 다섯 개의 방에 그녀가 머무는 조그만 석실뿐이었다. 유천주가 있었던 그 거대한 공간으로 나가는 통로는 막혀 있었다. 백율운현은 단태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부지런히 방을 돌아가며 청소를 할 뿐이었다.

두려움과의 싸움은 힘겨웠다.

단태가 영영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나?

대화 한마디 나눌 수 있는 상대가 없다는 점도 참기 어려웠다. 답답해서 소리를 지르고 싶은데, 혹시 유천주가 듣고 잡아먹지는 않을까 무서워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공포에 짓눌려 두 손 놓고 있을 여자는 아니었다. 백율운현은 부지런히 손을 놀려 우리를 깨끗이 하면서도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