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195화 (195/293)

<-- 195 회: 5-30 -->

젊은 마법사가 철무 앞으로 나섰다.

“나는 마둔수탑의 계승자 누천파입니다. 당신은 누굽니까?”

“……탐사 철무요.”

철무는 있는 힘껏 몸으로 문을 막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우리에게 맡기십시오. 당신 혼자서는 그 안에 있는 악마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

철무는 눈빛으로 더 많은 설명을 요구했다.

“약제실장 엄포윤의 거동이 수상하다는 첩보를 받았습니다. 두어 번 무시했는데도 별다른 문제점이 발견되지 않아서 무시했습니다. 그러다가 최근 일어난 연쇄살인사건 때문에 다시 정밀 재조사가 들어갔고, 엄포윤이 죽음의 물에 손을 담갔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우리는…… 결코 저 악마를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누천파의 말에 철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들이 준비를 갖추자, 철무는 옆으로 몸을 날렸다.

열린 문으로 빠져나온 죽음의 안개는 열 명의 마법사가 내뿜는 푸르스름한 막에 갇혔다. 열 명의 마법사가 검은 안개를 가두는 동안, 누천파는 문 안으로 들어갔다. 철무는 경비대원들 틈에 서서 누천파와 엄포윤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상급 마법사가 얼마나 강력한지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죽음의 안개를 잃은 엄포윤은 발버둥을 쳤지만 결국 탑의 계승자에게 패하고 말았다.

밧줄에 묶인 엄포윤을 마법사들이 데리고 나갔다.

엄포윤의 손가락에서 빼낸 검은 반지를 손에 든 누천파는 철무 앞으로 다가왔다.

“이건 망려환입니다. 후령사탑의 악마가 남긴 위험천만한 반지지요. 아마 엄포윤은 골동품 상점에서 우연히 이 반지를 입수한 모양입니다. 더 큰 힘을 가지려는 탐욕에 눈이 물어 이런 짓을 한 거지요. 당신은 일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들을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당신이 아니었다면 저 악마를 잡지 못했을 겁니다. 마둔수탑을 대신하여, 당신에게 감사의 표시를 하고 싶습니다.”

“탐사로서 의뢰를 받아서 한 일이니, 감사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보다 유족들이나 신경 써 주십시오.”

“희생자들 유족들은 따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계승자로서의 성의니 받아 주십시오.”

누천파는 크고 반짝이는 홍옥을 내밀었다. 못해도 수천 마전에 달하는 보석이었다.

“……알겠습니다.”

철무는 못 이기는 척 받은 보석을 처분하여 살인마에게 당한 희생자들의 가족에게 골고루 나눠 줄 생각이었다.

햇살이 내리쬐는 한낮의 거리로 올라온 철무는 한 가지 의문 때문에 눈살을 찌푸렸다. 우연일까? 세상에 우연은 없다. 왜 하필 그때 경비대원과 마법사들이 들이닥쳤을까?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오늘, 그것도 철무 자신이 문을 막고 있던 그 순간에!

지금은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도,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 문을 막느라 진이 빠졌던 것이다. 배를 채운 다음 오랫동안 푹 자고 싶었다. 살인마를 쫓느라 쌓인 피곤을 풀려면 적어도 하루,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래 잠을 자야 할지도 몰랐다.

@

마둔수탑은 발칵 뒤집혔다.

근엄하면서도 인자한 미소를 잃지 않아서 하급 마법사는 물론 수련사, 종자 들에게까지 존경을 받았던 엄포윤이 죽음의 마법을 익히기 위해 서쪽 지역의 하층민을 연이어 죽인 살인마라는 사실이 도시 전역으로 퍼지는 데 걸린 시간은 반나절이면 충분했다. 처음엔 믿지 않았지만 탑의 계승자가 나서서 공식적으로 발표했다는 소식에 다들 혀를 차며 엄포윤을, 마둔수탑의 유타루체 지부를 비난했다.

명국영은 승강기에서 내려 부탑주실로 걸었다.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마음이 급했던 것이다.

문을 열고 부탑주실 안으로 들어선 명국영은 안절부절못하고 서성거리는 륜사를 발견했다. 명국영을 본 륜사의 안색이 밝아졌으나 다시 어둠이 내려앉았다. 명국영이라고 해도 이번 사태를 해결할 수는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미 들었겠지?”

륜사는 힘없이 웃었다.

“엄포윤과 관련된 사람들이 기율옥으로 끌려갔다면서?”

“내가 명령을 내렸네. 죽음의 마법에 가담한 자들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당장 그 명령을 철회하게.”

“무슨 소린가?”

“엄포윤은 철저하게 비밀을 지켰네. 최소한 일 년, 어쩌면 삼 년 가까이 혼자 죽음의 마법을 익혔을 거야. 엄포윤에게 배속된 수련사, 종자 들은 아무것도 모르네. 아무리 마법사의 권위가 대단하다고 해도 수련사, 종자 들의 입을 꽉 다물게 할 수는 없네.”

“철회는 불가능해.”

“륜사…….”

“사람들이 보고 있어. 그들이 뭐라고 떠들지 자네는 몰라. 내가 젊은 나이에 천마의 경지에 오르자, 시기와 질투로 그득한 놈들은 내가 손대지 말아야 할 마법에 손을 댄 것처럼 말하더군. 그때는 일부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젠 아니야. 다들 나를 손가락질할 거야. 더러운 마법을 이용해서 천마에 올랐다고 말이야.”

“…….”

명국영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분위기를 바꾸긴 어렵겠지?”

“그럴 거야.”

“후후, 절치부심 이곳을 멋지게 만들려고 노력했는데, 수포로 돌아가는군.”

륜사는 책상을 어루만졌다. 서류 작업을 질색했음에도 하루에 몇 시간씩 마둔수탑을 위해 일했던 곳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명국영의 머릿속에서 몇 가지 조각이 하나로 맞춰졌다. 철무는 잠에 빠져들기 전 명국영에게 대략의 내용을 편지로 보냈다. 그 내용에 따르면, 누천파는 기다렸다는 듯 엄포윤의 은신처에 경비대와 함께 나타났다. 익명의 제보를 받았다는데, 명국영은 익명이 얼마나 쓸데없는 말인지 잘 알고 있었다.

연쇄살인사건을 조사하면서 살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사실은 명백했다. 살인은 수단이었다. 목적이 무엇인지 궁금했는데, 어쩌면 륜사가 목적이었는지도 몰랐다. 륜사를 이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게 목적이라면 누가 살인을 저질렀는지도 분명해진다.

누천파 짓일까?

아니면 누마탄이 개입했을까?

제대로 한 방 맞고 말았다. 방심의 결과였다. 3년 전 륜사가 기적적으로 천마의 자리에 오른 이후, 마둔수탑의 탑주 누마탄 그리고 황궁으로 돌아간 계승자 누천파에 대해서는 아예 신경을 끄고 살았다. 명국영은 감찰 관리로 시간을 보내며 틈틈이 단태에게 마음을 썼고, 륜사는 더 강한 영향력과 완벽한 탑을 위해 살았다. 그사이, 이를 악문 아버지와 아들은 이런 계획을 준비한 것이다.

추측에 불과한데도 명국영은 그들 짓이라고 확신했다. 논리를 초월하는 직감 때문이었다.

륜사에게 말하지는 않았다. 진실을 안다면 륜사는 기다리기는커녕 누천파를 찾아내어 죽이고, 당장 수도로 달려갈 것이다. 그런 식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오히려 죽음의 마법으로 천마의 자리에 오른 악마로 낙인이 찍혀 평생 쫓기며 살게 될 것이다. 어쩌면 륜사는 마둔수탑의 마법사라는 자존심을 꺾고 그를 받아 주는 유일한 탑, 후령사탑으로 들어갈지도 몰랐다.

어떻게 해야 할까?

당장은 뾰족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때, 누천파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부탑주님?”

“…….”

륜사는 말없이 계승자를 노려봤다.

“아버지께 편지를 보내고 오는 길이에요. 부탑주는 이번 일과 관련이 없다고 썼어요. 잘못이라고 한다면 휘하의 마법사를 제대로 관리 못한 것뿐이죠.”

“그래, 네 말이 옳다.”

“당분간, 여론이 잠잠해질 때까지만 제가 임시 부탑주 자리를 맡는 게 좋겠어요.”

“뭐?”

“그래야 사람들 눈에 마둔수탑이 무언가 잘못을 뉘우치고 있구나 생각하지 않을까요?”

“……알았다.”

륜사는 한숨을 내쉬고 복도로 나갔고, 명국영이 그 뒤를 따랐다.

혼자 남은 누천파는 터져 나오는 쾌감을 억누르느라 주먹을 꽉 쥐었다. 3년 만에 입장이 바뀌었다. 천마의 자리에 오른 륜사를 이곳에서 쫓아낼 수 있다니! 역시 륜사는 마법에 적합한 체질을 타고났을 뿐, 지혜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륜사 옆에 찰싹 붙어 있는 명국영이 거슬렸지만,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제거할 수 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누천파는 창가로 가서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무너진 중앙탑과 달리, 마둔수탑은 도시의 상징으로 우뚝 서 있었다. 저 멀리 서쪽 방책 너머 호수를 바라본 그는 한껏 달아오른 흥분을 가라앉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