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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천주는 계산이 불가능한 존재였다. 만약 유천주가 중앙탑이 아니라, 그가 서 있는 탑을 무너뜨렸다면…… 그동안 다듬고 또 다듬었던 계획은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을 터였다.
유천주는 그에게 공포와 동의어였다. 형의 죽음도 따지고 보면 유천주 때문이 아닌가.
“앞으로는 아니야. 원정대가 저주로 약해진 유천주를 죽일 테니까.”
누천파는 두 팔을 뻗어 도시를 안았다.
나의 도시를.
나의 세상을.
*단존계
엄포윤은 힘겹게 숨을 이어 나갔다.
공기를 한껏 마시기 위해 가슴을 부풀려도 예전처럼 만족스럽지 않았다. 자백을 받아 내기 위한 고문이 가슴 안쪽에 자리 잡은 폐를 망가뜨렸고, 아무리 돈을 처발라 치료한다고 해도 이전처럼 자연스럽게 숨을 쉴 수는 없을 터였다. 심장도, 팔과 다리의 뼈도 마찬가지였다. 기율옥 전문가들은 갖가지 마법을 동원하여 사람을 고통의 바다로 끌고 가는 법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다만, 그들은 고문당하는 자의 몸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았다.
‘난 아니야…….’
지금까지 버티는 이유였다.
죽음의 마법을 익힌 건 사실이다. 그 과정에서 노예를 구입하여 죽인 것도 인정한다. 그러나 서쪽 지역에서 벌어진 연쇄살인사건에 대해서는 아는 게 전혀 없는데.
문이 덜컹 열리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오늘은 또 무슨 고문으로 괴롭힐까?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기율옥 담당자가 아니었다.
“난 사, 살인마가 아니오.”
“압니다.”
차분한 목소리에 엄포윤은 희망을 얻었다. 탑의 계승자가 힘을 써 준다면 일이 잘 풀릴지도 모른다. 죽음의 마법에 손을 대었으니 탑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겠지만.
“난 그저 더 강한 힘을 원했을 뿐이라오.”
“그게 문제입니다. 분수도 모르고 설쳤으니, 누굴 탓하겠습니까? 임시기율위원회가 소집되었고, 그 결과가 나왔습니다. 만장일치로 사율형이 결정되었습니다.”
“…….”
주름 잡힌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나마 명예로운 죽음일 겁니다. 탑에서 선처를 한다고 해도 시청이, 시법원이 당신을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공개적으로 사람들이 몰려드는 광장에서 목이 잘리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내가 죽이지 않았다는 사실, 안다고 하지 않았소?”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대체 왜…….
“제가 죽였거든요.”
“…….”
엄포윤은 누천파가 뻗은 손에서 흘러나온 새까만 구름을 보고는 할 말을 잃었다. 패혈력을 완성한 후에야 펼칠 수 있는 ‘패혈운’이었다! 저 흑운에 닿는 순간, 금이라도 녹아내린다. 그제야 엄포윤은 누가 범인인지 깨달았다. 이어서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도 알아차렸다.
잠시 후, 엄포윤은 공허한 눈빛으로 누천파를 쳐다봤다.
“륜사를 끌어내리기 위해 날 선택한 건가?”
“놀랐습니다. 이처럼 예리한 분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이런 식으로 끝내지 않았을 텐데요.”
아이처럼 즐거워하는 누천파.
“망려환, 어디서 얻었나?”
“그게 중요합니까?”
목소리에 짜증이 섞여 있었다.
“자네도 우연히 얻었을 테지? 조심하게. 자네도 나처럼 장기판 위의 말일지도 모르니까.”
“……재미있군요.”
생기로 반짝이던 장난기는 사라졌다. 말과는 달리 누천파는 당장 죽일 듯 엄포윤을 노려봤다. 엄포윤의 지적은 누천파가 오랫동안 고민해 온 부분을 정확히 찔렀던 것이다.
두 쌍의 망려환을 손에 넣은 건, 아무리 생각해도 행운이었다. 혹시 몰라서 나름대로 조사를 했지만, 누군가의 의도 따위는 찾지 못했다. 그래도 찝찝한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내가 자네였다면 절대 그런 반지에 손을 대지 않았을 걸세. 팔마탑의 일원이자 날이 갈수록 성장하는 마둔수탑의 계승자가 왜 죽음의 마법을 익혔는지 이해할 수가 없구먼.”
“평생 종자, 수련사로 늙어서 죽는 놈들도 약제실장 자리에 오르고도 죽음의 마법에 손을 댄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겠지요.”
“허, 그렇구먼.”
엄포윤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몸을 지탱하던 생명의 힘이 쑥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억울해서 버텼건만, 누천파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지금이 죽을 때라는 기묘한 확신이 들었다. 평생 올라가기 위해서 발버둥을 쳤고, 운이 좋아 진마, 약제실장 자리에 이르렀다. 거기서 만족할 수 있었다면 이런 꼴은 당하지 않았을 텐데.
만족?
갑자기 그 단어의 의미가 확 다가왔고, 저절로 이해되는 느낌을 받았다. 물러설 때와 나아갈 때를 구분할 줄 알아야 진정한 사내라는 말을 숱하게 들었지만, 죽음 직전이 되어서야 그 격언의 깊이를 실감하다니.
만족할 수 있었다면, 많은 것이 달라졌을 텐데.
결혼해서 자신을 닮은 아들도 낳았을 텐데.
그 아들의 재롱, 무럭무럭 자라는 모습도 볼 수 있었을 텐데.
엄포윤은 열 배, 백 배나 무거워진 고개를 겨우 들어 올렸다.
“늙은이로서 한마디 하겠네. 뭐, 여긴 자네밖에 없으니 유언이라고 해도 되겠지. 거기서 멈추게. 어디까지 올라가고 싶은지 모르겠지만, 거기서…… 그 자리에서 만족하게나. 나처럼 죽기 직전에 후회하지 말고. 먼저 태어난 사람으로서 하는 말이네.”
누천파는 대답 대신 엄포윤의 정수리에 손을 올렸다. 손바닥에서 흘러나온 시꺼먼 구름이 엄포윤을 감쌌다. 그 구름에 휘감긴 엄포윤은…… 서서히 녹아내렸다.
극심한 고통에도 엄포윤은 비명은 물론 신음조차 흘리지 않았다. 오히려 차분한 마음으로 마지막을 준비했다.
많은 것들이 떠올랐다. 어린 시절, 탑에 처음 들어선 순간의 기분, 훌륭한 종자라고 칭찬받았던 기억, 사소한 잘못으로 어긋난 성공의 길, 숱한 모욕, 공금을 횡령하여 구입한 노예 단태 그리고 최근의 행운까지.
죽음이 코앞에 다가오자 자신으로 인해 고통 받았던 사람들에게 용서를 빌고픈 마음이 생겼다. 단태에게, 죽음의 마법 때문에 희생된 사람들에게. 소용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는 속으로 말했다.
‘부디 나를 용서해 주게나.’
그 순간, 어둠이 엄포윤을 덮었다.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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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태는 눈을 떴다.
얼핏 잠이 든 모양이었다. 용혈을 벗어나면 거의 잠을 자지 않았는데. 그 짧은 시간 동안 꾼 꿈이 떠올랐다.
어두컴컴한 방 중앙에 놓인 철제 의자에 묶인 엄포윤과 그 앞에 선 남자. 그늘진 남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멍과 핏자국으로 그득한 엄포윤의 애처로운 얼굴은 코앞에서 본 것처럼 선명했다. 그 꿈에서 엄포윤은 용서해 달라고 말했다.
분명 꿈인데, 꿈이 아닌 느낌.
그 이야기는 단태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암방거로, 차망로, 서천목로 등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의 범인이 마둔수탑의 엄포윤이라는 소문. 이례적으로 관련 내용이 신문에까지 실렸다.
수청보는 귀족 출신 지식인들은 물론 중산층, 일부 하층민까지 읽을 정도로 인기 있는 신문이었다. 유타루체로 내려온 명국영은 주기적으로 원고를 보내어 수청보에 글을 실었는데, 그 신문을 읽고 명국영의 통찰력에 감탄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단태도 과거 그 신문의 도움을 받았다.
대략 4년 전, 단태와 배망식의 충돌은 륜사와 당고와의 대결로 이어졌고, 단태는 죽음의 문에 한 발을 내디딘 당고를 살려 주었다. 당고가 가진 탑내 영향력을 고려할 때, 힘없는 종자에 불과했던 단태의 안전은 바람 앞의 등불이었는데, 당시 명국영이 수청보에 마탑 내부의 분쟁을 글로 실어 단태를 도왔던 것이다. 그 일로 명국영은 륜사와 친구가 되었다.
수청보는 엄포윤이 어떻게 죽음의 마법을 익혔는지, 어떻게 살인을 저질렀는지 그 내용을 상세히 실었다. 그와 동시에 마둔수탑이 독초 같은 엄포윤을 어떻게 색출해냈는지도 알려 주었다. 수도 용금탄에서도 유타루체의 탑 내부 상황을 지켜본 탑주 누마탄과 계승자 누천파로 인해 마둔수탑이 비교적 일찍 엄포윤을 찾아내어 기율옥에 가두었다는 내용이었다.
침대에서 빠져나온 단태는 소윤의 상태를 살핀 후에 창가로 가서 드문드문 등불이 켜진 골목길을 내려다보았다. 어둠에 잠긴 도시는 태양이 떠오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