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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포윤은 아니야.”
엄포윤이 죽음의 마법을 익혔다고 해도 실제로 서쪽 구역에서 살인을 저지른 놈, 직접 맞닥뜨려 쫓아 버린 그놈은 따로 있음을 단태는 알고 있었다. 그 생각만 하면 가슴 안쪽에 용암이 흐른다. 죽음의 마법사를 향한 증오와 분노는…… 본능에 가까운 반응이었다.
창으로 나온 단태는 근처 높은 건물 옥상으로 올라가 난간 끄트머리에 자리를 잡았다. 구름을 벗어난 달 아래로 펼쳐진 도시는…… 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마치 희미한 눈이라도 한 겹 쌓인 것처럼. 도시는 복잡하면서도 아름다웠다.
오랫동안 고향이라고 여겼던 울담반은 더 이상 고향 같지 않았다. 불과 3, 4년밖에 지내지 않은 유타루체가 그 자리를 꿰찼다. 마둔수탑과 호수 밑바닥 아래에 있는 용혈, 그리고 지금은 눈앞에 펼쳐진 저 도시가 울담반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한 셈이다.
처음으로 ‘나의 도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분이 묘했다. 어릴 때부터 장난감 하나 살 수 없는 형편 때문에 내 것이라곤 없었던 그에게 이 거대한 도시가 ‘내 것’이라는 생각은 낯설었다. 어쩌면 용족 특유의 사고방식 때문인지도 몰랐다.
유천주는 유타루체가 들어선 유타호 전체를 ‘내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 생각대로 행동했다. 서쪽 방책을 넘어와 호수 중앙으로 나온 크고 작은 배들은 유천주 입장에선 ‘내 것’을 건드리는 수작이었다.
용옥간에서 접한 용족의 기억을 훑어도 도시를 자기 것으로 여긴 용은 존재하지 않았다. 용은 도시의 분위기를 싫어했다. 고요하면서도 경이로운 자연과 달리, 용에게 사람들로 북적이는 도시는 시끄럽고 복잡하며 온갖 일이 벌어지는 시궁창 같은 곳이었다.
심장 때문일까?
왼쪽 가슴 아래에서 펄떡펄떡 쉬지 않고 뛰는 심장은…… 인간의 심장인 동시에 용의 심장이었다. 몸도 인간의 몸이면서 용의 몸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마음 역시, 취향 역시 인간이면서 용일 것이다.
그때, 저 멀리서 비명이 들렸다.
단태는 어느새 지붕 위를 달리고 있었다.
여럿이 한 사람을 짓밟고 있었다.
그들 뒤로 뛰어내린 단태는 가해자의 목덜미를 잡고 왼쪽으로 하나, 오른쪽으로 하나, 뒤로, 앞으로 던져 버렸다. 욕설을 지껄이며 일어나 단도를 꺼내 들고 달려든 놈들을 가볍게 단태가 쓰러뜨리는 동안, 맞고 있었던 사람은 골목을 벗어나 도로로 달아났다.
기절한 놈들의 주머니를 뒤져 적절한 보상을 찾아낸 단태는 다시 건물 위로 올라갔다. 경사진 지붕 위를 달리면서 왜 그 사람을 도와줬을까 생각했고, 곧 답을 알아냈다. ‘나의 도시’에서 벌어지는 일을 묵과할 수 없었던 것이다.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의 도시라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또 비명이 들리자, 단태는 그곳으로 달리고 있었다. 잠도 안 오는 밤이니 운동하는 셈치고 궁지에 몰린 사람을 도와주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무엇보다 나의 도시라는 생각 자체가 마음에 들어서였다.
그날 밤, 단태는 누군가 옥상에 널어둔 옷으로 얼굴을 가린 채 다섯 번이나 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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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패를 보여 주고 성문을 통과한 석현담은 이제 막 운하 선착장으로 내려가 준비된 소마선에 올라탄 부윤성을 눈으로 좇았다. 지난 몇 달 동안 부윤성은 제국 곳곳을 돌아다니느라 바빴고, 그 때문에 석현담도 마음 편히 하루도 쉬지 못한 채 제국 남쪽 물의 도시에 이르렀다. 석현담은 부윤성이 이곳에 온 이유를 알지 못해 답답했지만 계속 쫓다 보면 배후에 누가 있는지 알아낼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부윤성은 객관 ‘수현옥’에 들어갔다.
따라 들어선 석현담은 자부심 넘치는 종업원의 소개 덕분에 수현옥이 유타루체 최고의 객관임을 알 수 있었다. 수현옥에서도 값싼 방을 하나 얻은 그는 푹신한 침대, 야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창 바깥 난간, 언제나 뜨거운 물이 나오도록 열화 마법진까지 설치된 욕실을 갖춘 객실에 들어서자마자 가방에서 꺼낸 중족을 찢었다.
중간 크기의 족자가 찢어지자 푸르스름한 빛이 안개처럼 흘러나와 바닥에 내려앉으며 복잡한 마법진을 만들었다. 석현담은 그 마법진 중앙에 앉아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비천단령!”
짧고 굵은 소환에 마법진이 번쩍 섬광을 터트렸다.
곧 실바람이 불었다.
바람의 정령을 불러낸 석현담은 심호흡으로 흥분을 가라앉힌 뒤, 명령을 내렸다.
‘그를 따라가 주십시오.’
보이지 않는 바람은 창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가방에서 꺼낸 ‘차감풍’ 소족을 찢자, 석현담은 불러낸 비천단령의 오감을 느낄 수 있었다. 비천단령은 수현옥을 크게 두 바퀴 선회하더니 그가 묵은 방으로 부드럽게 날아들었다.
석현담의 방보다 열 배나 큰 객실에는 거실, 욕실, 침실은 물론 주방까지 딸려 있어 직접 요리를 할 수도 있었다. 용과 물고기가 새겨진 고풍스러운 탁자와 의자가 놓인 거실 한쪽에 부윤성이 홀로 앉아 있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비천단령은 부윤성을 맴돌았고, 그 덕분에 석현담은 그 어느 때보다 가까이서 부윤성을 볼 수 있었다. 평범한 서생이라 착각하게 만드는 호리호리한 몸매의 40대 중반 사내는 병권을 손에 쥔 대사마 좌영윤의 책사로 배후에서 적지 않은 일을 담당하고 있었다. 원무황단을 움직여 황제를 죽이려 한 시도도 그의 솜씨라는 게 석현담의 판단이었다.
그때, 문이 열렸다.
손에 부채를 든 남자가 여유롭게 객실로 들어서자, 부윤성은 벌떡 일어섰다.
“어서 오십시오.”
“탑주의 청을 못 이겨 이곳으로 왔으니, 너무 반가워하진 말게.”
“알고 있습니다.”
부윤성은 상대가 앉은 후에야 탁자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정중한 태도에서 조심스러움이 묻어났다.
비천단령을 통해 부윤성조차 몸을 사리는 사내를 본 석현담은 깜짝 놀랐다. 은후성탑이 배출한 천마 음마성 율암이 왜 부윤성을 만나러 왔을까? 은후성탑까지 반역에 관련이 있을까?
비천단령을 이 세계에 붙잡아 두기 위한 마력이 부족했다. 더 이상 지속하면 내장이 상할 수도 있지만, 석현담은 꾹 참고 대화의 내용에 귀를 기울였다.
“자, 나를 만나려는 이유가 뭔가?”
“천광탑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율암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못 들은 사람처럼 태연히 앉아 있었다.
“팔마탑의 질서, 바뀔 때가 되었다고 봅니다만.”
“그대는 정치를 하는 사람이 아닌가? 감히 정치꾼이 마법의 세계에 관심을 가지다니.”
율암의 어조가 달라지는 순간, 부윤성은 양손으로 귀를 막아야 했다. 기괴한 고음은 그 틈을 뚫고 고막과 그 안쪽의 기관까지 흔들었다. 엿듣고 있던 석현담도 마찬가지였다.
“……천광탑은 황제를 앞세워 그 질서를 깨뜨리려 합니다!”
귀에서 피가 흐른 부윤성이 소리치자, 뇌를 흔들어 녹이는 듯한 음파가 멈췄다.
“흥미로운 얘기군. 자세히. 한데, 쥐새끼가 들어와 있군.”
율암은 정확히 비천단령을 노려보았고, 비천단령을 통하여 부윤성과 율암을 지켜보던 석현담은 즉시 연결을 끊었지만 늦었다. 율암이 입으로 토해 낸 들리지 않는 소리가 비천단령을 통해 석현담을 후려쳤다.
마법진 그려진 바닥에서 튕겨 나가 벽으로 날아간 석현담은 바닥으로 떨어지며 피를 토했다.
벽을 잡고 겨우 일어선 그는 난간으로 달려가 망설임 없이 몸을 날렸다. 아래로 떨어지면서 각 방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볼 수 있었다. 그윽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남자와 여자, 술병을 들고 말없이 술에 취하려는 남자, 염려로 서성거리는 여자 등 평범하면서도 저마다 다른 삶, 한때 그가 원했던 삶을 사는 사람들이 거기 있었다.
몸을 돌린 석현담은 허리를 묶은 띠를 풀어 휘둘렀다. 등불을 매단 기다란 밧줄에 띠가 묶였다. 탄력을 이용해 단숨에 밧줄 위로 올라선 그는 숙련된 뱃사람이 파도로 흔들리는 범선의 가로대 위를 달리는 것처럼 질주했다.
밧줄의 탄력이 달라졌다. 고개를 돌린 석현담은 시꺼먼 옷을 입은 추격자를 발견했다. 밧줄을 밟고 쫓아오면서도 빨랐다. 두 번 맞붙었지만 백중세였다. 율암이 토해 낸 ‘투성시’만 아니었다면 이번에도 밀리지 않으련만. 지금 상태로는 운이 좋아야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석현담은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위로 휙 그림자가 지나갔다.
모퉁이를 서너 번 돈 후에야 석현담은 추격자가 하나가 아님을 깨달았다.